San Martin del Camino에서 Astorga까지
‘쇼하고 있다’라는 말이 있다. 만약 우리가 일상생활을 하면서 늘 보던 일을 무대에서 공연한다면 아마 그 쇼는 금방 망할 것이다. 뭔가 흔히 볼 수 없는 일이기에 관객들이 시간을 내서 비싼 비용까지 지불하면서 쇼를 보는 것 아닐까? 그러니까 엑스맨 울버린이 코트 입고 나오는 영화 “위대한 쇼맨”에서도 주인공 바넘이 ‘괴물(freak)’ 출연자들만 찾았던 것이 아닐까?
이런 의미에서 오늘 우리는 자그마한 쇼를 했다. 아침 6시가 넘어, 평상시에 비해 조금 일찍 출발했다. 그래서인지 새벽이라 캄캄하고 춥기도 한데 추적추적 비까지 조금씩 떨어진다. 여기저기 찢어진 곳을 테이프로 대충대충 덕지덕지 수선한 비옷을 입고 출발한다. 비옷에 달린 모자까지 쓰면 상당히 시야가 줄어드는데, 그 줄어든 시야를 헤드랜턴의 불빛에만 의지해 코앞의 바닥만 보고 걷는다. 그러다 보니 우리도 모른 사이에 우리는 까미노길이 아닌 차도 안쪽의 옥수수 밭 사이에 난 길을 걷고 있었다.
에고 한 손에는 스틱을 들고 있으니 입을 이용해서 다른 한 손의 장갑을 벗고 바지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내서 켜니 노안으로 화면이 잘 안 보인다. 슬프다…. 스틱을 든 손으로 안경을 이마 위로 밀어 놓고 휴대폰에서 까미노앱을 찾아서 터치를 하는데 이번에는 손이 축축하니 터치가 잘 안 된다. 이런…. 대충 옷에 문지르고 후후 불어 습기를 제거하고 드디어 까미노앱 지도를 띄워서 우리 위치를 확인한다. 그리고 이제 한 손에 스마트폰을 들고 다시 까미노길인 도로 옆길로 찾아간다.
우리도 까미노길을 걸은 지 20여 일이 넘으니 나름의 생존 노하우가 생겼다. 그 노하우 중 하나는 ‘짧은 길’을 찾아가는 것이다. 까미노앱에서 가르쳐주는 까미노루트만 고집하지 않고 까미노길과 구글지도에 나온 길을 비교해서 단축길을 선택해서 걷는 것이다. 그리고 ‘살다 보면 이런 삶의 지혜가 필요할 때도 있지’ 말하곤 했다. 그런데 오늘따라 까미노길이 꼬불꼬불이다. 그냥 차도를 따라 조금만 가면 되는 길을 까미노앱은 오르락내리락, 이리저리 꼬불길을 따라가라고 한다. 초짜 순례자라면 순순히 따라가겠지만, 우리는 이미 ‘44가지’ 없는 순례자라서 노란 화살표를 전격 무시하고 직선으로 시원하게 뚫린 차도를 따라 걷는다.
이렇게 ‘효율적?’으로 걷고 있는 우리 앞에 직선의 차도와 그 차도의 안쪽으로 노란 화살표가 가리키고 있는 약간 오르락+꼬불꼬불해 보이는 까미노길이 나타났다. 이번에도 차도가 더 지름길처럼 보이지만 너무 큰 차들이 쌩쌩 달리고 있어서 이번에는 효율 대신 안전한 까미노길을 선택했다. 길게 자란 풀들이 무성한 것이 사람들이 많이 걷지 않고 오랫동안 방치된 느낌이 들었다. 아마도 많은 순례자들이 얍샵하게 직선 도로길을 택했나 보다 생각하면서 우리는 ‘우직하게’ 까미노길을 따라 걷는다라면서 자조를 했다. 또 차도와 우리가 걷는 길 사이로 철조망이 쳐져 있는 것을 보고 내심 이렇게까지 생각했다. ‘잔머리를 써서 고속도로로 걷는 사람들은 까미노길로 다시 돌아오려면 다시 철조망이 없는 저 뒤편까지 다시 돌아갔다가 와야겠구나. ㅋㅋㅋ 쌤통이다!’
그 순간 차도 건너편의 우리를 향해 손을 흔드는 한 커플 순례자들이 눈에 들어온다. 우리를 부르는 건가? 어? 왜? 진짜 우리? 뭐 잘못됐나? 자기들 쪽으로 건너오라는 손짓 같다. 까미노길 이틀째 되는 날에 론세스바예스에서 수비리로 가는 길의 중간 마을에서 우리는 마을 길을 따라 계속 직진하고 있는데, 누군가 뒤에서 우리를 불러 세운 적이 있었다. 오른쪽으로 꺾어야 하는데 우리는 그 우회전 지점을 넘어서 그냥 직진했던 것이다. 나중에 그들을 만나서 정말 감사하다는 인사를 했었다. 그런데 그 느낌이 데자뷔처럼 다시 훅 들어온다. 혹시 하는 마음에 스마트폰을 꺼내 까미노앱 지도를 확인하니, 허걱! 이런!! 우찌!!!…헐…!!!! 우리가 걷는 길이 아닌 건너편 길이 바로 까미노길이었다.
이상하다? 우린 분명히 노란 화살표가 시키는 대로 도로 안쪽길로 걸어왔는데? 돌이켜 생각해 보니 안쪽 길로 걷다가 다시 차도 건너편으로 넘어가라는 표시가 있었을 텐데 아마도 우리가 그 표식을 놓치고 계속 갔었던 것 같다. 이런 고얀 까미놈 같으니라고! 노란 화살표 표식이 비바람에 훼손되었든지 좀 눈에 띄지 않게 되었나 보다. 초지일관 도로로 걸어갔다면 차도를 건너라는 까미노 노란 화살표를 놓치지 않았을 텐데. 아무튼 다른 순례자들이 아니 우리가 돌아가야 하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It’s Showtime!
여기까지 온 길이 너무 아까워서 우리는 도저히 왔던 길을 다시 돌아갈 수는 없고 용기를 내어 현재 우리 위치와 차도 사이의 철조망을 한번 넘어가 보기로 맘을 먹었다. 그나마 우리처럼 올바른? 판단을 한 사람들이 이전에도 몇몇 있었는지 철조망까지 가는 길의 풀들이 좀 밟혀 있고 철조망은 당겨서 조금 낮아진 곳이 보였다. 먼저 철조망까지 수풀을 헤치며 접근해서, 마치 권투 코치가 선수가 입장하도록 링을 손으로 잡아 올려주는 것처럼 서로 번갈아 철조망을 잡아주면서 차도까지는 나왔다. 두 번째로 인정사정없이 쌩쌩 달리는 큰 차들을 피해 고속도로를 재빨리 무단횡단을 했다. 이제 넘어왔구나 하고 안심을 하는 순간, 허걱! 이쪽 편에도 차도와 안쪽 까미노길 사이에 철조망이 또 있다. 그것도 우리 키높이의 철조망이 망가진 곳도 없이 튼튼하게 설치되어 있다.
우리가 당황하며 머뭇거리는데 그곳을 지나가던 순례자 네 명이 우리를 보며 또 손짓을 한다. 처음에는 우리의 상황에 당황스럽기도 하고 쑥스럽기도 해서 그냥 모른척하고 지나가 주면 좋겠다는 마음을 먹고 모른 체하는 데, 우리를 정확히 겨냥하면서 이쪽으로 넘어오라고 손짓을 하고 있다. 이런 감동이…. 추측건대 멀리서 걸어오면서 우리의 철조망 넘는 쇼를 보고 이쪽 편의 철조망 넘는 것을 도와주려고 미리 와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다. 감사합니다. ㅎ
이쪽 철조망은 위로는 도저히 넘을 수는 없고 TV에 나오는 해병대 훈련소에서 철조망 장애물을 통과하듯이 철조망 아래로 통과해야 한다. 그래서 1. 먼저 우의를 벗고, 2. 무거운 배낭과 스틱은 번쩍 들어 올려서 철조망 위로 고마운 순례자들에게 넘겨주고, 3. 그분들이 철조망을 위로 당겨주면 그 아래로 포로수용소 탈출하듯이 네발로 통과하고, 4. 다시 역순으로 배낭을 메고 우의를 입고. 헉헉 자 이제 한 명 더! 한마디로 ‘쇼를 했다.’
보통 우의를 입고 걷다가 비가 멈추면 더워지기 때문에 우의를 바로 벗는데, 어떤 이들은 걸음 속도를 늦추지 않기 위해 걸어가면서 우의를 벗기도 한다. 이 정도로 한번 시작한 걸음은 잘 멈추지 않는 편인데, 우리를 도와주려고 비가 오는 와중에 걸음까지 멈추면서 생면부지의 우리를 기다려서까지 도와준 네 명의 프렌치 순례자들…. 정말 정말 메르시 보꾸보쿠보꾸다. 엑스맨이 턱시도 입고 나왔던 영화 ‘위대한 쇼맨’에 이런 대사가 있었다고 한다. 이 대사로 오늘 우리의 쇼를 조금이나마 합리화해 본다. ㅎ
"No One Ever Made a Difference by Being Like Everyone Els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