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on에서 San Martin del Camino까지
발이 아파서 한동안 신지 못했던 등산화를 다시 꺼내 신고 걷기 시작했다. 오늘은 25km를 걸었는데 도착한 알베르게에는 대문도 없고 알베르게를 지키고 있어야 할 호스피탈레라도 가버리고 보이지 않는다.
문이 잠겨 있는 알베르게 사무실 겸 다이닝룸 안을 창문 틈으로 살펴보니 좀 썰렁하다. 알베르게 건물을 빙 둘러보아도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 우리가 잘못 찾아왔나 하는 생각이 서서히 들기 시작할 즈음에 드디어 호스피텔레라가 나타났다. 체크인을 하고 다이닝룸을 살펴보니 전체적으로 오랫동안 아무도 사용한 흔적이 없어 보인다. 바 카운터에는 먼지도 뿌옇고 접시나 컵도 여기저기 굴러다니고, 카미노앱 알베르게 소개에는 있다고 나온 전자레인지도 고장이 났다. 짐정리를 하고 다시 와보니 호스피탈레라는 그새 퇴근해 버리고 그나마 앉아서 뭘 먹을 수 있는 테이블이 있는 다이닝룸마저 잠가버렸다. 허걱!
날씨는 까미노길을 걷기 시작한 이래로 제일 춥고 싸늘해서 알베르게의 처마 밑에 앉아서 가끔씩 지나가는 순례자들을 보고 있자니 우리 본새가 좀 처량해지는 기분이다. 일요일이라 마트는 문을 닫았고 이 작은 마을에 레스토랑은 딱 두 곳만 영업 중이다. 이제 10월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까미노길 성수기 시즌도 끝날 때가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이곳도 곧 문을 닫고 다음 시즌이 되어서야 문을 연다고 한다. 어쩐지 이곳에 묵는 사람들이 별로 없고 피에르나 안드레도 오늘은 좀 더 걸어 다음 마을로 간다고 하면서 우리를 지나쳐 가더라…? 자식들
오늘의 알베르게는 2차 세계대전 배경의 전쟁영화에 자주 나오는 유대인 포로수용소 느낌이 물씬 나는 숙소이다. 망가진 자물쇠의 문을 밀고 건물 안으로 들어가면 어두침침한 복도가 양쪽으로 이어져 있고, 오른쪽으로 돌아 미닫이 문을 열고 들어가면 도미토리가 있다. 도미토리 안에 발을 딛는 순간 썰렁한 기운이 온몸에 훅 느껴지고, 줄무늬 죄수복을 입은 포로들이 누워서 뒹굴고 있을 법한 이층침대들이 듬성듬성 놓여 있다. 왼쪽으로 복도를 따라가면 천정에는 안쪽에 먼지가 쌓여서 어슴푸레해진 희미한 전구들이 있고 불이 들어온다고 해도 금방이라도 지지직 소리를 내면서 깜박거릴 것 같은 분위기이다. 그리고 뒤에서는 누군가 소리 없이 다가와서 어깨를 툭툭 치면서 ‘여기 누구 없소?’라고 말을 걸 것만 같다.
알베르게의 전등은 대부분 센서와 타이머가 설치되어 있어서 사람이 지나가면 저절로 켜지고 몇 분이 지나면 예고도 없이 퍽 꺼진다. 한밤중에 화장실을 간다면 늑대인간이 출근할 것 같은 달빛에 의지해서 복도를 지나야 하고 드디어 화장실 문을 열면 비로소 깜박깜박 불이 켜진다. 휴~~ 그런데 만약 센서가 고장 났다면 영화의 장르가 호러무비로 바뀐다. 그리고 혹시나 큰일이 있어서 학문에 집중을 하는 중에 타이머가 끝나서 불이 꺼져버리면 일어나지는 못하고 앉은 채로 손발과 머리를 흔들어서 다시 센서를 깨워야 하는 장면이 연출된다. 영화가 호러무비에서 코미디로 다시 장르가 바뀌는 순간이다.
아무튼 아무리 알베르게가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까미노길에서의 하루일과는 대충 이렇다.
1. 새벽 네 시쯤 눈이 떠진다. 너무 이르기 때문에 다시 잠을 청해보다가 5시 전후에 일어난다. 이층 침대에서 사다리를 조심조심 밟고 내려온다. 캄캄하고 아직 잠에서 덜 깬 비몽사몽 한 상태에서 사다리 난간을 잘못 디디면 그렇지 않아도 아픈 발가락, 발바닥, 발목이 ‘으아아’ 할 수도 있고 중심을 못 잡고 이리저리 손발을 휘젓다가 적막한 어둠 속에 와장창 소리를 낼 수도 있다. 다른 순례자들의 잠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휴대폰 라이트를 켜지는 못하고 살짝살짝 휴대폰 화면 빛에 의지해서 어둠 속을 뚫고 화장실에 가서 학문에 힘도 쓰고 이도 닦고 고양이 세수 등등.
2. 다시 어둠을 뚫고 자리로 돌아와서 이제는 좀 적응이 된 어둠 속에서 침낭을 꾸역꾸역 침낭 파우치에 쑤셔 넣고 바셀린 통을 더듬더듬 찾아서 발바닥에는 바셀린을 바르고, 종아리에는 마사지 크림을 바르고 얼굴에는 로션을 바르고 (아 순서가 바뀌었다. 얼굴부터이다) 아직까지도 적응이 되지 않은 발가락 양말을 신고, 그 위에 일반 양말을 또 신고, 발목 또는 무릎보호대를 착용하고 등등.
3. 일곱 시 전후 알베르게를 나서기 전에 둘이 출발 사진을 찍는 것이 하나의 의식이 되었다. 휴대폰 카메라 5초 세팅 후에 적절한 곳을 찾아서 휴대폰을 세워 두고 포즈를 취하고 손바닥을 촤악 펼친다. 찰칵!
그런데 행여나 비라도 오면 한숨을 쉬면서 다시 배낭을 내리고 우의를 꺼내 입고, 심호흡을 한 번 더 하고 출발한다. 이제는 제법 차가워진 새벽공기를 마시면서 도로나 벽의 노란 화살표를 찾아가면서 걷기 시작한다. 길치인 나는 주차장 출구를 막 나와서 오른쪽으로 가야 하나 왼쪽으로 가야 하나가 제일 어려웠던 것처럼, 알베르게 출입문을 나오면 처음에 방향 찾기가 제일 힘들다. 기껏 일찍 나왔는데 길을 헤매다가 시간을 낭비하면 정말 아깝다. 마치 흡연자가 천 원에 네 개 하는 일회용 라이터를 잃어버린 것처럼…. 걸어가면서 새벽 별도 보고, 유일하게 아는 별자리인 북두칠성과 오리온자리만 반갑게 한번 씨익 봐주고 걷는다.
4. 1시간 반쯤 걷다 보면 우리 뒤편으로 해가 떠오른다. 우리는 동쪽에서 서쪽으로 걷기 때문에 항상 뒤에서 해가 떠오른다. 틈틈이 돌아서서 역광샷, 일출샷, 하늘의 비행기 자국샷 등 사진 몇 장을 찍고 또 걷고 또 돌아서 찍고를 반복하면서 걷는다. 드디어 첫 번째 마을이 나오면 여기에서 쉴까 아니면 다음 마을까지 조금만 더 갈까 고민을 하다가 그냥 자리에 앉는다. 늦은 아침으로 카페 콘 레체와 토티야 파타타를 먹으면서 첫 번째 휴식을 갖는다.
5. 다시 두 시간 정도 걷고 휴식을 하고 또다시 걷고 쉬고 하다 보면 오늘의 목적지에 도착한다. 어느 알베르게에서 묵을지 마을 초입에 서서 잠시 고민하다가 그냥 습관대로 공립 알베르게로 발길을 돌린다. 그래도 하룻밤을 보내야 할 곳이니 매트리스 커버를 씌우고 침낭을 꺼내어 펼쳐 놓고, 침대 주변으로 빨랫줄을 묶고, 샤워를 하고, 오늘의 빨래를 하고, 발바닥 물집 정비를 한다. 그리고 간단한 휴식의 시간을 보낸다. 하나 둘 옆 침대들이 순례자로 채워지면 서로 인사도 한다. 그리고 아마도 A는 이때쯤 이미 도미토리 내부의 인물스캔을 모두 끝냈을 것으로 예상된다.
6. 초간단 마을 구경. 우리는 일부러 마을 구경을 나선다고 하기보다는 마트 가는 길에 보이는 광경이 단지 우리 눈에 들어온다고 하는 것이 더 적절한 표현인 것 같다. 하지만 여력이 된다면 한가롭고 여유 있는 시골마을 산책은 다른 관광지에서는 경험하기 어려운 호사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마트 가기 전에는 알베르게의 주방을 반드시 확인하고 가야 한다. 걸은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제법 규모가 있는 알베르게에 묵은 적이 있는데 전반적인 시설이 좋아 보여서 저녁식사는 오랜만에 고기를 먹겠다는 일념으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마트로 직행해서 목살을 넉넉히 사온 적이 있다. 그런데 주방에 들어서니, 공공 도서관 식당 같은 넓은 테이블들만 있고, 주방에는 자동판매기와 냉장고 그리고 전자레인지 하나밖에 없었다. 헐! 그럼 사온 고기는? 생고기를 배낭에 넣고 하루를 더 걸을 수도 없고 다음 사람을 위해 냉장고에 남겨두기에는 아시아대륙처럼 생긴 목살 덩어리가 내일 걷는 내내 눈에 아른거릴 것 같았다. 하지만 임기응변 또는 임프로바이제이션 (Improvization) 또는 애드립이 나름 발달된 우리는 ‘목마구’를 만들어서 와인과 함께 아름다운 저녁을 먹는 데 성공했다.
‘목살 마이크로웨이브 구이’
7. 이렇게 저녁을 비어 또는 와인과 함께 먹는다. 물론 오늘 만난 이 사람 저 사람, 이 경치 저 경치, 이런 집 저런 건물 등등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도 하면서…. 그러다 반가운 얼굴이 보이면 같이 어울려서 또 이 사람 저 사람, 이 경치 저 경치 이야기를 하고
8. 마지막으로 취침 전에는 침대에 누워 오늘 종일 찍은 사진을 정리하고 휴대폰에 오늘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얼마나 걸었는지, 얼마나 돈을 낭비가 아닌 소비를 했는지, 걸으면서 어떤 생각이 떠올랐는지 등등 간단한 오늘의 기록을 남긴다.
그리고 정말로 취침! 아 부지런한 사람들은 자기 전에 스트레칭[1]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난 패스!
[1] 까미노길에서 최상의 몸 컨디션을 유지하기 위해 스트레칭이 매우 중요하다고 한다. D+13에 소개된 시인 쟝은 늘 알베르게에 도착하면 항상 먼저 스트레칭을 한다. 아침에도 눈을 뜨자 마자 차가운 대리석 바닥에서도 스트레칭을 하고 하루를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