빚의 시작
《빚의 시작》
그 달의 카드 청구서가 도착했다.우체통에서 꺼낸 하얀 봉투가 손끝으로 차갑게 전해졌다.
박정우는 식탁에 앉아 조심스럽게 봉투를 찢었다.서류가 펼쳐지는 소리가 방 안에 가볍게 울렸다.
₩1,423,000
그는 그 숫자를 조용히 바라보았다.잠시 머릿속이 비어졌다가, 잔잔하게 숫자들의 조합이 다시 떠올랐다.사료비, 약값, 정기 검진비, 카드 할부, 병원비 선결제.
‘이젠, 계산이 무의미해졌다.’
그는 속으로 조용히 생각했다.
책상 구석에 놓인 수첩을 펼쳤다.예전에는 또렷하던 글씨가 이제는 군데군데 삐뚤어져 있었다.
그는 연필 끝으로 적혀 있는 지출 목록을 다시 훑었다.줄을 긋고, 덧셈을 하고, 잠시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초롱이는 이불 위에서 자고 있었다.가볍게 숨을 쉬며 몸을 둥글게 말고 있었다.
‘아직 먹어야 할 사료가 있고, 다음 검사가 남아 있다.’
그 생각이 떠오르자 이마가 천천히 무거워졌다.
다음 날, 그는 조용히 은행 상담 창구에 앉아 있었다.
직원의 목소리는 낮고 단정했다.
"소액 생활자금 대출은 한도가 적긴 합니다만, 어르신께선 장기 거래 고객이라… 천만 원까지 가능하십니다."
박정우는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걸로 신청하겠습니다."
서류에 서명하는 동안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펜 끝이 종이 위를 긋는 소리가 오래 울리는 듯했다.
그날 밤, 복지사가 집으로 찾아왔다.
"박 어르신, 혹시 급하시면 구청 지원금 신청도 도와드릴 수 있습니다. 긴급복지 지원도 가능하고요."
박정우는 잠시 생각하다 조용히 말했다.
"그건 나중에... 지금은 내가 해볼 수 있는 데까진 해봐야죠."
복지사는 더 말을 잇지 않았다.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작게 미소를 지었다.
"혹시 힘드시면 언제든 연락 주세요."
그는 문 앞까지 배웅을 나가 조용히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문을 닫고 돌아서는데, 발밑에 초롱이가 조용히 다가왔다.그 작은 몸이 다리에 가볍게 부딪혔다.
박정우는 무릎을 굽혀 초롱이를 품에 안았다.
"괜찮아. 아직 괜찮아."
목소리는 낮고, 조용히 떨렸다.
《밤새 초롱이 간병 》
겨울의 초입.창문 밖으로는 눈발이 희미하게 흩날리고 있었다.
박정우는 거실 바닥에 깔린 이불 위에 초롱이를 눕혀 두고 있었다.작은 전기방석 위로 얇은 담요를 덮었다.
초롱이의 숨소리가 짧고 불규칙하게 새어나왔다.숨을 들이쉴 때마다 가슴께가 미세하게 오르내렸다.그리고 가끔, 아주 짧은 경련처럼 가슴이 움찔거렸다.
저녁부터 음식은 거의 입에 대지 못했다.물도 조금밖에 마시지 않았다.약을 먹이려다 토해낸 것도 두 번이나 되었다.
박정우는 식탁 위에 놓인 약봉지를 바라봤다.손가락이 가볍게 떨렸다.테이블 끝엔 며칠 전 병원에서 받아 온 진료서가 놓여 있었다.
‘심장 기능 저하 심화 — 전반적 쇠약 진행’
담담하게 인쇄된 글씨가 차갑게 박혀 있었다.
박정우는 초롱이 곁으로 다가앉았다.손끝으로 귀를 가만히 쓸어주었다.초롱이는 눈꺼풀을 살짝 들었다가 다시 감았다.눈빛은 흐릿했지만, 짧게 꼬리가 한 번 움직였다.
"괜찮다… 아프지 말자.조금만, 조금만 더 버텨주렴."
그의 목소리는 거의 숨처럼 낮았다.
밤은 길었다.이따금 초롱이의 숨이 멈춘 듯 고요해지다가다시 급하게 들이쉬며 깨어나곤 했다.
그럴 때마다 박정우는 놀라 손바닥으로 가슴께를 덮었다.그 안에서 미약한 박동이 아직 살아 있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의 눈꺼풀도 무거워졌다.소파에 기댄 채 잠시 졸다가도초롱이의 몸이 움찔할 때마다 다시 깨어났다.
새벽 세 시.창밖에는 눈발이 조금씩 굵어지고 있었다.가로등 불빛 아래 하얀 눈이 조용히 내려앉았다.
박정우는 이불 끝을 다시 덮어주며 중얼거렸다.
"내가 깨어 있는 한 널 지킬게."
그 말은 바람에 스며들 듯 방 안을 맴돌았다.이 겨울 밤은 길고 조용했다.그리고 둘만의 시간이 조용히 흘러가고 있었다.
《전동 휠체어의 필요》
봄 햇살이 조금씩 따뜻해졌다.나뭇가지 끝에는 초록 싹이 맺히고 있었다.
박정우는 산책을 나섰다.하지만 몇 걸음 가지 못하고 벤치에 앉아 숨을 골랐다.무릎 아래로 묵직한 통증이 내려앉았다.
초롱이는 그의 곁에 앉아 가늘게 숨을 쉬며 그를 올려다봤다.짧은 꼬리가 가볍게 흔들렸다가 멈췄다.
그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이젠… 내가 더 못 버티겠구나."
며칠 후 복지사가 다시 찾아왔다.
"어르신, 전동 휠체어 신청하실 수 있어요.구청에서 지원이 되긴 하는데, 심사랑 서류 준비에 시간이 좀 걸립니다."
박정우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심사 기간, 대기 시간, 서류 준비.
‘그 시간이면 봄이 다 가겠지.’
생각이 머릿속에서 조용히 흘렀다.
"급하게 필요하시면 중고 장터나 렌탈도 있긴 합니다."
복지사의 목소리는 조심스러웠다.
박정우는 미소처럼 입꼬리를 조금 올렸다.
"내가 알아서 해볼게요."
밤이었다.
거실 한켠의 서랍을 조용히 열었다.맨 아래 칸, 얇은 보자기 속에서 보석함을 꺼냈다.뚜껑을 열자 금반지가 조용히 드러났다.
빛은 거의 사라졌지만, 오래된 금속의 온기가 손끝에 닿았다.결혼식 날, 아내의 손가락을 처음 잡았던 기억이 잠시 스쳤다.그 날의 손등, 그 미세한 떨림.
그는 반지를 조심스럽게 쥐었다.손바닥에 놓인 금속이 작고 무거웠다.
이튿날 아침, 박정우는 전당포로 갔다.
점주는 반지를 살펴보았다.
"순도는 좋은데 오래돼서 흠집이 많네요.이 정도면… 오늘 시세로 삼십오만 원 드릴 수 있겠습니다."
박정우는 잠시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렇게 하죠."
사인을 하고 현금을 받아 나왔다.봉투 속 지폐가 손 안에서 가볍게 흔들렸다.
며칠 후, 작은 전동 휠체어가 배달됐다.
그는 조심스럽게 전원을 켜고 속도를 조절했다.움직임은 부드러웠다.
초롱이는 옆에서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살짝 꼬리를 흔들었다.그리고 이내 작은 바구니 안으로 몸을 말고 들어갔다.새로 마련한 초롱이 전용 바구니였다.
박정우는 핸들을 잡고 조용히 미소 지었다.
"이제 우리, 조금 더 멀리 갈 수 있겠다."
햇살 아래서 바람이 살며시 얼굴을 스쳤다.그들은 천천히 공원 길로 나섰다.
《초롱이의 악화》
봄은 완전히 열려 있었다.거리의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하지만 박정우는 그 꽃들을 오래 바라보지 않았다.
요 며칠, 초롱이의 숨소리가 달라졌다.먹던 사료도 절반 이상 남기기 시작했다.자주 토했고, 걸을 때마다 숨을 짧게 쉬었다.
그는 초롱이를 안아 들고 병원으로 갔다.
수의사는 혈액검사 결과지를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간 수치가 많이 올라갔습니다."
박정우는 입술을 다물고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정확한 원인은 알 수 없지만… 나이 탓이 클 겁니다.노령성 간기능 저하가 시작된 것 같습니다."
의사는 말을 잠시 멈췄다가 조용히 덧붙였다.
"지금부터는 집중적인 관리가 필요합니다.보호자분도 마음의 준비를 조금씩 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박정우는 손가락으로 서류 가장자리를 조심스레 쓸었다.
"치료는… 계속할 수 있겠죠?"
"네, 물론입니다.간보호제, 특수 처방식 사료, 수액 치료를 병행하면 지금보다 안정될 수 있습니다."
의사가 건네준 예상 치료비 견적서 위에 또다시 숫자들이 줄지어 있었다.
₩ 980,000
박정우는 그 종이를 오래 바라보다가, 한 번 숨을 길게 내쉬었다.
"해 주세요. 가능한 만큼 다."
그 목소리는 낮고 단단했다.그러나 안쪽 어딘가가 조용히 부서지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지갑 속에 들어 있는 현금을 꺼내 세어봤다.작은 봉투 안 지폐가 얇았다.그 아래로 대출 이자 고지서가 보였다.
초롱이는 그의 품 안에서 잠들어 있었다.가벼운 몸무게가 유난히 더 가벼워진 듯 느껴졌다.
그는 조용히 독백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버텨보자."
그 말은 누구에게 한 것인지 그도 알 수 없었다.자신인지, 초롱인지, 아니면 텅 빈 방 안을 향한 것인지.
이불 위에 초롱이를 눕히고 그는 한참을 바라보았다.조용히 숨을 몰아쉬며, 작은 가슴께가 천천히 들썩였다.
그는 살며시 초롱이의 귀를 쓸어내리며 속삭였다.
"고맙다. 살아줘서."
방 안에 말의 끝자락이 서서히 스며들며 사라졌다.
《고립과 지쳐가는 마음》
밤이 깊어질수록 방 안의 소리는 사라졌다.벽시계 초침 소리마저 희미해졌다.
박정우는 거실 소파에 앉아 있었다.식탁 위에는 약봉지와 병원비 영수증, 대출 상환 일정표가 나란히 펼쳐져 있었다.
손끝이 종이 위를 천천히 미끄러졌다.그 얇은 종이들이 유난히 무거워 보였다.
옆에서는 초롱이가 조용히 숨을 쉬고 있었다.오늘은 사료를 거의 먹지 못했다.
그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피곤이 아니라, 두려움이었다.
며칠 전 복지사가 또 다녀갔었다.
"박 어르신, 이젠 보호소 위탁도 한번 고민해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박정우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숙였다.
"보호소라고 해도 요즘 시설 좋아졌습니다.간병 인력도 있고, 의료비도 보조되고요."
복지사의 목소리는 조심스러웠다.그 말의 끝에는 연민이 묻어 있었다.
박정우는 오랫동안 대답하지 않았다.한참 뒤,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럴 수 없습니다."
그 말은 낮고 단호했지만, 스스로에게는 떨리는 선고처럼 들렸다.
복지사는 더 말을 잇지 못했다.
밤은 깊어갔다.그는 결국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숨소리가 손바닥 틈으로 새어 나왔다.
"또 버리면 안 되지…"
목구멍 안에서 굵고 낮게 웅얼거렸다.몇 번이고 되뇌었다.
이불 속 초롱이가 잠결에 몸을 웅크렸다.그 작은 움직임이 그의 손끝에 닿았다.살아 있는 체온이 조용히 그를 붙잡고 있었다.
박정우는 숨을 길게 삼켰다.눈물이 흘러내렸지만, 그는 닦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앉아 있었다.밤이 그의 어깨 위에 천천히 내려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