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몽이 문제일까 내가 문제일까 사장이 문제일까
고등학생때 우연히 내 눈에 들어오게 된 애니메이션 "꿈빛 파티시엘".
아무것도 모른 채 학교에 입학해서 그랑프리 우승까지 하는 주인공을 보며, 나도 모르게 파티시에를 꿈꾸게 됐다.
그러다 발견한 바리스타 제과제빵과.
커피도, 빵도 같이 배울 수 있는 학과 였고,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다른 학과는 쳐다보지도 않고 합격하자마자 바로 입학원서를 넣었다.
다니다보니, 나는 빵이랑 케이크 보단 커피쪽에 더 재능이 있다는걸 알게되었다.
그래서 바리스타가 되기 위해 차근차근 일을 배워보자고 마음먹었다.
자취방 근처에 한적해 보이는 개인 카페에 알바를 지원했고,그렇게 나의 첫 바리스타 생활이 시작됐다.
그 카페는..음.
지금 생각해도, 분위기가 이상했다.
사장님은 본인의 방식과 고집이 강한 분이였고, 카페 전체에 엄한 공기가 흐르고 있었다.
손님들 조차도 뭔가 까다로워 보였다.
아, 이때 눈치 챘어야 했다. 도망쳤어야 했는데.
처음으로 일을 배우는 날이였다.
그날은 유독 손님이 많았다.
내가 일하기 시작한다는 소문이라도 돌았는지, 그날 이후로 그렇게 손님이 많은 날은 없었다.
이 카페는 자몽에이드를 청이 아닌 직접 착즙한 자몽즙으로 만드는 곳이었다.
내 기준으로는 좀 신기했고, 솔직히 불편했다.
그날도 어김없이 자몽에이드 주문이 물밀듯이 들어왔다.
아무것도 할줄아는게 없던 나는, 구석에서 설거지를 열심히 하며 조용히 눈치만 보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내 앞에 스퀴즈기와 자몽 몇 개가 툭-하고 던져졌다.
사장님은 정신없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냥 짜."
그리고는 사라졌다.
어리둥절 할 새도 없었다.
자몽을 반으로 가르고 낑낑거리며 힘껏 짜내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힘이 들었고, 뭔가..자몽이 너무 딱딱했다.
정말 유독 그날의 자몽은 단단하고, 단단하고, 단단했다.
아니다 사람이 문제였을지도.
나는 알려준것도 없이 혼자 열심히 자몽즙을 병에 모아 두었다.
마지막 자몽을 짜고 있을 무렵 사장님이 다가와 병을 들여다 보더니
세상 쓰디쓴약을 삼킨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내 손에서 자몽을 신경질적으로 홱 뺏어가더니 말했다.
"가게 말아먹을일 있어? 자몽을 짜랬더니 짜는 시늉만 하고 있네! 일하기 싫으면 나가!"
순간, 아무말도 할 수 없었다.
그냥 생각했다.
'내가 그렇게 까지 잘못했나?'
'자몽하나 잘못 짠 게 정말 가게 하나를 무너뜨릴수 있나?'
첫 알바였던 탓에, 바리스타의 길이 이렇게 험난하다면 난 못하겠다는 생각이 스쳐갔다.
그날 이후로 자몽을 볼 때마다 약간의 PTSD가 왔다.
그 뒤로 과일을 착즙 한다는 모든것이 싫어졌다.
물론 지금은 힘들이지 않아도 착즙해주는 기계도 나오고 세상 좋아졌기에 극복했지만, 그때를 되돌아보면 여전히 상처다.
그건 자몽 때문이 아니었다.
그건 사람을 존중할 줄 모르는 누군가를 만났기 때문에 생긴 상처였다.
그리고.. 그 사장님은 앞으로 내가 만날 사장님들 중 그저 시작에 불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