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적 한자어와 일본식 한자어: 일본식 한자어의 의미 분화 18
한자는 표의 문자(表意文字, 뜻글자)여서 글자의 앞뒤 순서를 바꾸어도 뜻이 같거나 비슷한 경우가 많다. ‘성품1〔性品〕과 품성1(品性)’, ‘대접〔待接〕과 접대(接待)’, ‘혼령〔魂靈〕과 영혼(靈魂)’, ‘성품2(性稟)과 품성2(稟性)’, ‘명운(命運)과 운명【運命】’, ‘열정(熱情)과 정열【情熱】’…처럼 우리말에서는, 대부분 한국식 한자어와 중국식 한자어, 또는 전통적 한자어와 일본식 한자어 관계에서 나타나지만, 중국어에는 매우 흔하다. 예를 들어 우리말의 ‘누적되다(累積―), 쌓이다’는 중국어로는 ‘累积[lěijī](누적), 또는 积累[jīlěi](적루)’라고 하고, 우리말의 ‘투쟁(鬪爭), 싸움③’은 중국어로 ‘斗争[dòuzhēng](투쟁), 또는 争斗[zhēngdòu](쟁투)’라고도 하는데, 이렇게 글자의 앞뒤 순서를 바꾸어서 같거나 비슷한 의미로 쓰이는, 즉 우리에게는 낯설지만 자순 도치(字順倒置)로 쓰이는 중국어는 너무나 많다.
우리말 속에서 비슷하게 쓰이는 한자어 중에는 구성상 글자 순서만 바뀐 것처럼 보이지만, 그 의미가 다른 것들도 많다. 앞에서 논의한 바 있는 습관(習慣)과 관습【慣習】은 단순히 글자 순서만 바뀐 것이 아니라 자순 도치(字順倒置)의 방법으로 새롭게 만들어진 일본식 한자어이다. 계승(繼承)과 승계【承繼】도 글자의 구성으로만 보면, ‘繼(이을 계), 承(이을 승)’이라는 같은 뜻의 글자를, 자순 도치의 방법으로 만든 단어지만 그 성격은 다르다. 승계【承繼】는 계승(繼承)처럼 본래부터 중국에서 쓰던 말이지만, 근대 일본에서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 말이기 때문이다.
본래 승계(承繼)는 중국에서 계승(繼承)과 함께 옛날부터 쓰던 말이다. 하지만, 중국어에서 승계(承繼)는 ‘이어받다’라는 계승(繼承)과 같은 뜻이어서 표의 문자인 한자의 특성상 단순한 자순 도치(字順倒置)에 해당한다. 그래서 ‘啟賢,能敬承繼禹之道。(계비(啟)는 어질어 능히 禹의 도를 공경하여 이어받았다)’《孟子·萬章上》, ‘承繼祖宗之業。(조상 대대로 이어온 일을 이어받다)’《史記·封禪書》, ‘承繼父業(부업을 이어받다)’처럼 옛 문헌에서는 보통 왕위·덕업·도(道)·가업·관직 따위를 계승한다는 뜻으로 쓰였고, 때로는 (아들이 없어서) 백부·숙부에게서 ‘혈통이나 가문을 잇다’의 뜻으로도 쓰였다.
승계(承繼)에 계승(繼承)과 다른,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 것은 근대 일본이다. 일본 메이지 시기(19세기 후반)에 서양 법제를 번역하면서, ‘succession’(상속, 승계)을 承継(しょうけい)[shōkei]라고 번역하면서 ‘法律行為の一般的承継(법률행위의 일반적 승계)’처럼 ‘권리나 의무를 이어받는 것’이라는 의미로, 기존의 상속(相續)과 구별하여 사용하기 시작한 말이다. 곧 승계(承継)는 법률적 계승이라는 의미로서, 기업 경영에서의 ‘고용 승계(雇用承繼), 사업 승계(事業承継)’처럼 법률‧경제 용어로 체계화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그런데, 19세기 말~20세기 초, 청나라 말 신정기(新政期)와 신문화운동 시기(1900~1920년대)에 일본어에서 번역된 법률·경제 용어가 중국어에 많이 들어오게 되는데, 당시 법학·경제학 서적에 承继(승계)가 继承(계승)과 함께 쓰이되, ‘权利义务之承继(권리와 의무의 승계)’처럼 법률적·제도적 의미로 전문화되어 쓰이기 시작했다. 현대 중국어에서도 继承(계승)은 일반적으로 ‘이어받는 것’에 쓰이고, 承继(승계)는 ‘法人的承继(법인의 승계)’, ‘国家主权的承继(국가 주권의 승계)’, ‘承继合同(승계 계약)’, ‘权利承继(권리 승계)’처럼 법률적이고 제도적인 측면에서 권리·의무·지위‧기업·국가 등을 이어받는 것으로 구분하여 쓰이고 있다(엄밀하게 말하면 그런 경향이 강하다). 이처럼 전통적으로 쓰이던 중국어 承繼(승계)는 근대 일본에서 법률‧경제 용어로 전문화된 후에 중국어에 역수입된 것이다.
한국어에서도 승계【承繼】는 중국어와 비슷한 개념으로 수용되어 계승(繼承)과 구별하여 쓰이고 있다. 즉 계승(繼承)은 ‘전통의 계승; 전통을 계승하다’, ‘전통문화의 창조적 계승; 전통문화를 창조적으로 계승하다’처럼 주로 문화, 정신, 사명 등 비물질적 유산을 잇는 의미를 표현할 때 쓰고, 승계【承繼】는 ‘경영권 승계; 경영권을 승계하다’, ‘고용 승계; 고용을 승계하다’, ‘사업 승계; 사업을 승계하다’, ‘상속 재산의 승계; 상속 재산을 승계하다’처럼 지위, 직위, 권리, 재산 등의 법적·제도적 맥락에 주로 사용한다.
한편, 아래의 한중일 한자어 비교에서 보는 것처럼 ‘승계 취득(承繼取得)(상속이나 매매‧양도에 의해 다른 사람으로부터 권리를 취득하는 것. derivative acquisition), 채무 승계(債務承繼); 채무를 승계하다’의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현대 중국어(대륙)에서는 법률적인 의미의 승계(承繼)(-하다)를 继受(계수)라고도 한다. 继受(계수)는 ‘이어받다(繼, 이을 계 + 受, 받을 수)’라는 뜻으로 우리말 사고 과정과도 일치하는 말이어서 이해하기 쉽다. 우리말 속에 들어온 일본식 한자어의 비중과 막강한 영향력을 생각할 때, 이러한 조어 방식은 매우 신선한 느낌을 준다.
언어의 기본적 기능은 의사소통에 있지만, 단순히 소통의 도구에만 그치는 것은 아니다. 말에도 생명이 있어서 시대에 따라 형태나 의미도 변하고, 변하면서 그 시대를 담아 내기도 한다. ‘계승과 승계’처럼 비슷하지만 다르게 쓰이는 말 속에 우리나라를 포함한 동아시아 근대화 과정에서 나타난 힘의 역학 관계가 녹아 있는 것이다.
계승(繼承)(-하다)[계ː/게ː‧] n. ① 조상의 전통이나 문화유산, 업적 따위를 물려받아 이어 나감. ② 선임자의 뒤를 이어받음. =승계(承繼)(-하다)
㊥ 继承[jìchéng]; 承继[chéngjì], ㊐ 継承(けいしょう), Ⓔ succession
예) 전통의 계승(傳統繼承); 전통을 계승하다. 왕위 계승(王位繼承); 왕위를 계승하다. 전통을 발전적으로 계승하다. 发展地继承传统。fāzhǎn de jìchéng chuántǒng. 창조적 계승(繼承); 창조적으로 계승하다. 创造性的继承; 创造性地继承。chuàngzàoxìng dì jìchéng. ㊐ 創造的に継承(けいしょう)する。전통문화에 대한 비판적 계승 对传统文化的批判继承。duì chuántŏng wénhuà‧de pīpàn jìchéng. 전통문화를 계승하다. ㊐ 伝統(でんとう)文化(ぶんか)を継承(けいしょう)する。민화(民畫)를 현대적으로 계승하다. 계승자(繼承者) 继承人[jìchéngrén]; 继承者[jìchéngzhě], ㊐ 継承者(けいしょうしゃ)
승계【承繼】(-하다) [‧계/게] n. 이전의 사업이나 권리를 이어받음/물려받음. =계승(繼承)②[계ː‧].
㊥ 承继[chéngjì], 继承[jìchéng]; 继受[jìshòu], ㊐ 承継(しょうけい), Ⓔ succession
예) 고용 승계(雇傭承繼); 고용을 승계하다. 劳动合同承继[láodòng hétóng chéngjì]; 雇佣承继[gùyōng chéngjì], ㊐ 雇用承継(こようしょうけい); 雇用の承継: 기업의 인수·합병(M&A) 등에서 기존 근로자의 고용 관계를 새로운 기업이 그대로 이어받는 것. 불법 승계【不法承繼】; 불법적으로 승계하다. 非法承继[fēifǎ chéngjì]; 违法承继[wéifǎ chéngjì], ㊐ 不法承継(ふほう しょうけい). 사업 승계(事業承繼); 사업을 승계하다. 承继事业; 继承事业; 继受企业, ㊐ 事業承繼(じぎょうしょうけい). 채무 승계(債務承繼); 채무를 승계하다. 债务承继[zhàiwù chéngjì](대만‧홍콩); 债务继受[zhàiwù jìshòu](대륙), ㊐ 債務(さいむ)の承継; 債務の引継(ひきつ)ぎ. 승계자【承繼者】 继承人[jìchéngrén], ㊐ 承継者(しょうけいしゃ)[shōkei-sha]. 선임자의 뒤를 이어받은 사람. successor.
승계 취득(承繼取得)(-하다)[‧계/게#‥] (법률) 상속이나 매매‧양도에 의해 다른 사람으로부터 권리를 취득하는 것.
㊥ 承繼取得[chéngjì qǔdé](대만. 홍콩); 继受取得[jìshòu qǔdé](대륙), ㊐ 承継取得(しょうけいしゅとく). Ⓔ derivative acquisition.
예) 승계 취득 재산(財産)
cf) ‼계승(繼承)과 달리 주로 비즈니스나 법적 맥락에서 사용되는 용어로 전임자의 역할을 이어받거나 자산을 정식으로 물려받는 것을 강조할 때 사용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