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마른침을 삼키며 [2032.04.01. 연구 일지] 파일을 터치했다. 파일명과 함께 섬광처럼 번뜩이는 구절이 그녀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2032. 04. 01. Sat]
“That's one small step for man, one giant leap for mankind.”
닐 암스트롱이 달에 첫발을 내디뎠을 때 남긴 이 문구는 지금 나의 심정을 대변한다. 인류의 한계를 뛰어넘는 미지의 영역으로의 첫걸음. 어쩌면 신의 영역에 대한 아슬아슬한 침범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이미 선택의 기로에 섰고, 결국 그들의 제안을 수락했다.
내일이면 미국행 비행기에 몸을 싣고 인류 신경과학 역사에 새로운 이정표를 세울 연구에 본격적으로 합류하게 된다. 이 길의 끝이 인류의 구원이 될지, 아니면 또 다른 파멸이 될지는 알 수 없다. 하나 나는 반드시 이 연구를 성공으로 이끌어, 아직 인류에게 미지의 영역인 인간의 뇌를 정복하고 말 것이다.
나의 이름, 류현수가 인류 지성사에 영원히 각인되기를 바라며, 이 연구에 내 모든 것을 바친다.
아마 미국으로 떠나기 전날 밤, 아버지가 비장한 각오로 쓴 일기인 듯했다. 세린은 아버지가 이런 거대한 야망과 신념을 품었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그녀는 숨을 들이켜며 천천히 다음 장으로 넘어갔다.
[2032. 04. 05. Wed]
오늘, 드디어 카론의 담당자로부터 내가 참여할 연구에 대한 최종 브리핑을 들었다. 솔직히 말해, 내가 상상했던 것 이상이었다.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깊이 있고, 윤리라는 미명 아래 인류가 결코 침범해서는 안 된다고 여겨왔던 경계를 무자비하게 허무는 거대한 프로젝트. '의식의 데이터화'라니. 그저 개념을 되뇌는 것만으로도 온몸의 신경망이 현기증을 느끼는 듯했다.
이들은 단순한 뇌의 작동 원리 규명을 넘어, 인간 존재의 근본적인 정의 자체를 뒤흔드는 패러다임을 설계하고 있었다. 생명의 불꽃이라 여겨졌던 인류의 정신을 디지털 세계로 전이시키는 것, 이는 문자 그대로 '새로운 생명'의 창조가 아닌가. 경외감과 함께 섬뜩한 전율이 흘렀다. 내가 이끌어갈 프로젝트의 코드명은 '2.0'. 단순한 숫자의 나열이 아니다. 인류 진화의 다음 단계, 어쩌면 존재 양식의 대전환을 의미하는 암호와도 같았다.
내일부터, 이 모든 것이 현실이 된다.
프로젝트 2.0? 류세린의 뇌리에 아버지가 죽어가는 순간 핏물 속에 남겼던 그 의문의 숫자 '20'이 섬광처럼 스쳐갔다. '20'. 그때까지 단순한 잔상이나 무의미한 낙서인 줄 알았던 그 숫자가 순간적으로 류현수 박사가 담당한 연구 프로젝트의 코드명을 가리키는 것일 수도 있다는 섬뜩한 가능성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아버지는 죽어가는 순간에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일까? '20'은 단순한 숫자가 아니었다. 분명 아버지가 진행하던 '프로젝트 2.0'과 관련된 핵심 코드였다.
그녀는 손끝으로 떨리는 화면을 넘겼다.
[2032. 04. 20. Tue]
오늘, 드디어 '프로젝트 2.0'의 핵심 피실험체, Young, Lee를 처음으로 마주했다. 그는 뇌 기능은 온전히 살아있었으나, 불행히도 전신이 마비된 식물인간 상태에 놓여 있었다. 그의 텅 빈 눈빛은 필사적으로 나를 향해 애원하고 있었다. 이 갑갑하고 무정한 육체의 감옥에서 자신을 해방시켜 달라고, 살려달라고, 그렇게 외치는 듯했다.
나는 그에게 '프로젝트 2.0'의 목적을 설명했다. 그의 '의식'을 완벽하게 데이터화하여, 이 물리적 육신이라는 한계에서 그를 영원히 해방시켜 주는 것이라고. 그의 미세한 뇌파를 이용한 간이 통신 장치로, 우리는 짧지만 강렬한 대화를 나누었다. 고통과 절망 속에서도, 그가 그토록 간절히 갈망했던 것은 오직 '자유'였다.
마치 수천 년 전, 망자의 영혼을 저승으로 건네받는 뱃사공 카론처럼, 나는 그의 의식을 이승이라는 육체적 세계에서, 새로운 디지털 세계로 인도하는 길목에 서 있었다. 어깨를 짓누르는 윤리적인 무게감이 엄청났지만, 그의 눈 속에 담긴 그 간절한 열망은 나를 멈출 수 없게 만들었다. 그의 눈빛은 과학적 탐구의 한계를 넘어, 미지의 영역으로 나를 끊임없이 재촉하고 있었다.
류세린의 두뇌는 격렬하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분명 공항에서 연구가 성공적으로 끝났다고 했다. 그 말은 Young, Lee의 의식을 데이터화하는 데 성공했다는 뜻이다. 그렇다는 건...
‘가만, Young, Lee란 이름 낯설지가 않다. 한국이름 이영.’
‘이영, 이안. 이 둘은 대체 무슨 관계지?’
류세린의 심장이 마치 정밀 기계처럼 한 박자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그녀의 뇌는 지금껏 얻은 조각난 정보들을 빠르게 스캔하며 새로운 연결 고리를 찾으려 애썼다. '프로젝트 2.0', '의식의 데이터화', '이영', 그리고 아버지 살해범으로 지목된 '이안'… 이 모든 것이 하나의 미궁 속에서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직감이 날카롭게 경고했다. 뭔가 거대한 그림이 가려져 있었다.
그녀는 서둘러 손가락을 위로 스와이프 했다. 그리고 아래에는 Young, Lee의 신상 정보가 나와 있었고, 그 옆에는 그의 사진이 선명하게 박혀 있었다.
사진 속 이영의 얼굴을 본 순간, 류세린의 심장에 차가운 전류가 흘렀다.
태블릿 속 'Young, Lee'의 얼굴을 본 순간, 류세린의 뇌는 격렬하게 폭주하기 시작했다. 그 얼굴은 CCTV 영상 속 아버지의 살해범, '이안'과 놀랍도록 닮아 있었다. 아니, 너무나도 완벽하게 똑같았다. 이안과 Young, Lee는 쌍둥이였다! 이 하나의 결정적인 사실이 뇌 속의 모든 퍼즐 조각을 번개처럼 재조합했다.
차가운 논리가 류세린의 뇌를 관통했다. '프로젝트 2.0'은 'Young, Lee'의 '의식 데이터화' 연구였고, 아버지는 그 연구가 성공했다고 했다. 그런데 CCTV에 찍힌 아버지의 살해범은 분명 '이안'이었다. 그리고 경찰은 이안이 아버지 사망 일주일 전 이미 뇌사 판정을 받았다고 했었다.
뇌사 상태의 인간은 자발적으로 움직여 살인을 저지를 수 없다. 이는 뇌과학의 가장 기본적인 전제였다. 그렇다면 CCTV 속 범인의 눈동자가 그토록 텅 비어 있었던 이유가 비로소 설명되었다. 마치 감정 없는 인형처럼, 초점 없는 시선. 그것은 생명체의 본래 의식적 통제가 부재했음을, 주체가 되는 신경 활동이 없었음을 명확히 의미했다.
그리고 아버지의 시신 옆 핏물 속에 남겨져 있던 그 의문의 숫자 '20'. 그것은 단순히 '프로젝트 2.0'의 코드만이 아니었다. Young, Lee, '이영'의 숫자! 이 모든 단서들이 류세린의 뇌 속에서 섬광처럼 연결되며 하나의 완전한 그림을 그려냈다. 아버지를 공격한 육체는 분명 '이안'의 것이었지만, 그 육체를 조종한 의식은 '이안' 본인의 것이 아니었다.
아버지는 자신을 공격하는 그 육체 속에서 'Young, Lee'의 의식이 발현되었음을 간파했을 것이다. 자신의 연구, '프로젝트 2.0'이 초래한 섬뜩한 진실을, 바로 그 순간 직감했을 터였다. 아버지는 죽어가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딸에게 이 혼란스러운 상황의 핵심을 꿰뚫는 단서, 즉 '20'을 남겼던 것이다. 그것은 단순한 숫자가 아니었다. 'Young, Lee'의 존재, 그리고 그의 '의식 데이터화' 연구를 향한 강력한 경고이자, '이안'이라는 육체 뒤에 가려진 진정한 의문에 대한 암시였다.
이안은 진정한 살인범이 아닐 가능성이 농후했다. 그는 분명 어떤 거대한 계획에 의해 이용당했거나, 어떤 알 수 없는 힘에 의해 조종당한 것일 터였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배후에서 지휘하고 가능하게 만든 '카론'이라는 그림자 같은 존재. 그들은 대체 누구이며, 무엇을 계획하는가. 이 거대한 퍼즐의 열쇠는 아버지의 연구일지, 그리고 '카론'의 정체에 있을 터였다. 류세린은 몸을 전율시키는 충격과 동시에 아버지를 향한 한없는 경외심을 느꼈다. 그리고 이제, 그녀는 필사적으로 이안의 사형 집행을 막아야 했다. 이 모든 복잡한 진실을 알릴 시간은 없었다. 그녀에게 주어진 과제는 오직 하나, 지금 당장, 이안의 죽음을 막는 것이었다.
진실은 예상보다 훨씬 더 복잡했고, 시간은 그녀를 무심히 재촉했다. 태블릿을 움켜쥔 채, 그녀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급히 차에 몸을 실었다. 시간은 이미 정오를 향해 빠르게 달려가고 있었다. 이안의 사형 집행까지 남은 시간은 채 한 시간도 되지 않았다. 류세린의 붉은 스포츠카는 빗물이 채 마르지 않은 도로 위를 미친 듯이 질주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