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점 쓰러져가는 엄마
새해를 맞이하며, 항상 그랬던 것처럼 엄마는 평온한 얼굴로 가은이를 안아주었다. 하지만 평온해 보이는 표정 속에, 끝없는 자책으로 이미 엄마의 가슴이 무너지고 있었음을 남편인 나는 안다. 휴직 전에는 가은이를 재우고 한 번씩 얘기했던 가슴앓이 말들이, 휴직 후에는 조금씩 그 농도가 진해진다.
임신하고 눈세포가 가장 먼저 발달한다는데, 우리 크게 싸웠을 때 내가 너무 큰 스트레스를 받았었나?
아니면 내가 임신 중에 뭘 잘못 먹었을까?
그것도 아니면 그냥 내가 나쁜 유전자를 가은이에게 물려준 거 아닐까?
생물학적으로 엄마 혼자서 임신할 수는 없다. 책임을 져도 남편이 나와 함께 져야 하는 법. 하지만, 가은이가 엄마와 단둘이 배 속에서 지냈던 10개월의 추억 때문인지 그렇게 간단히 생각할 수는 없는 것 같다.
임신하고 처음 느껴 본 태동. 엄마가 되는 게 정말 너무 신비롭다며 기뻐했던 그녀의 얼굴
점점 발길질이 강해진 것 같아 뿌듯하다며, 출산 며칠 전의 설렘을 생생하게 공유했던 그녀
근데 그 벅참의 감정들이 지금에 와서는 와이프를 더 강하게 때리는 것 같다. 엄마는 가은이에게 새로운 생명을, 그리고 이 세상을 경험할 기회를 제공한 위대한 사람이다. 하지만, 그 엄마가 얼마 전부터 걷잡을 수 없는 자책으로 인해 크게 흔들리고 있는 것 같다.
문득 와이프가 가은이 암 확진받은 날, 교단에 섰을 때 느꼈다는 그 상황이 생각난다. 갑자기 수업 중에 선생님을 바라보는 아이들의 모습에서 '눈'만 보였다고 한다. 학생 한 명당 2개의 눈, 그리고 35명의 학생들. 찰나의 순간 총 70개의 눈만 보였고, 자연스레 우리 가은이 눈이 떠올라 자신도 모르게 비교하고 있는 본인을 발견했다고 한다.
나도 지하철에서 엄마와 손잡고 가는 아이를 보며, 그 아이의 눈을 자세히 들여다본 적이 있기에 대충 무슨 느낌인지 안다. 하지만, 70개의 눈알이라니.. 얼마나 죄책감에 휩싸였으면 그랬을까? 멍하니 교단 위에 서서 순간 넋이 나갔을, 그리고 얼른 정신 차리려고 애썼을 와이프를 상상하니 너무 가슴이 아프다. 얼마나 속상했을까?
내가 휴직하기까지 2개월 동안, 엄마는 암병동-집에서 가은이를 돌보느라 모든 에너지를 다 썼다. 그리고 마음속에 일어나는 자책의 감정들은 너무 아파 차마 다 말하지 못했던 것 같다. 사실 나도 아빠의 유전자 문제가 아닌가 하며, 많은 자책들을 하곤 했다. 하지만, 10개월 동안 아이의 성장과정을 몸소 느꼈던 엄마의 책임감과 죄책감 정도는 아닌 것 같다.
그녀가 너무 아파하기에, 가은이가 자고 나면 항상 그녀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들었다. 눈물이 흐를 때면 위로의 포옹으로 함께 했지만 안타깝게도 그녀의 슬픔이 줄어드는 것 같지는 않았다. 가은이 대신에 엄마가 아파주고 싶은 것처럼, 와이프 대신에 내가 자책의 고통을 대신해 주고 싶었다.
하지만, 우리의 인생은 그렇게 설계되어 있지 않다. 우리 각자는 다 각자의 삶의 무게를 짊어지게 되어 있다. 그 무게를 만드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자기 자신이기에 내가 아무리 그녀를 위로하고 설득해도 내 와이프의 생각을 바꿔줄 수는 없다. 계란의 바위 치기처럼 수없이 많이 시도했지만, 그건 내가 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님을 이제는 나도 인정해야 할 것 같다.
결국 단기간에 그녀가 빠져있는 슬픔의 늪에서 빠져나오게 할 순 없을 것 같았다. 휴직을 시작하며 답답할 때면 하늘을 자주 보았는데, 어느 날 석양을 보면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사람은 누구나 아픈 순간이 온다
그리고 각자 그 아픔을 이겨내는 속도와 방식은 다르다
그렇다! 내가 그녀를 위해 할 수 있는 건, 가은이 엄마도 언젠가는 이 상황을 '감사하며 긍정적'으로 해석할 것이란 믿음으로 함께 해 주는 것. 그 중심을 남편인 내가 든든하게 잡아주면, 그녀도 힘들 때 남편의 나무아래 쉬어가며 힘낼 수 있지 않을까?
결국 우리는 가은이 엄마 & 아빠니까 서로 믿고 버텨가며, 앞으로 최대한 많이 웃으면서 가은이를 안아주면 될 것 같다. 아직은 부족한 남편이지만.. 앞으로 가은이 엄마의 든든한 나무가 되어주면, 결국 믿음이라는 열매가 맺혀 곧 그녀답게 일어날 것임을 나는 누구보다 잘 안다.
내가 당신을 더 믿고,
옆에서 함께 있어줄게 여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