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제성숙 패키지 - 부부 편
3번째 항암치료가 잘 끝나니, 우리 부부의 날 선 긴장감도 같이 해제된다. 약물이 안구에만 집중되어 투여되었기에, 다 빠져버렸던 머리카락이 조금씩 솜털의 형태로 머리에서 일어난다. 퇴원 후 가은이가 웃는 횟수가 늘며 함께 웃는 시간도 늘어나고, 우리 부부도 조금은 지난 4개월을 돌아볼 시간이 주어졌다.
차마 할 수 없었던 마음속 사각지대를 공유하며, 우리 부부가 서로에게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를 다시 한번 깨닫게 되었다. 사실 우리 부부도 여느 부부처럼 참 갈등이 많았다. 흔히 서로 안 맞다는 추상적인 표현처럼 수많은 갈등을 가졌고, 서로를 인정하지 못했다. 그래서 어느 이혼 전문 변호사가 한 해석이 난 참 와닿는다. 부부를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돈, 노동력, 시간을 공유하는 관계
부부사이에 이 3가지는 정말 첨예한 이해관계를 만든다. 그리고 이 핵심요소들을 둘러싼 이해와 해석은 각자의 삶을 살아온 환경과 가치관에 따라 수십, 수백, 수만 가지로 해석되기에 서로가 온전히 이해할 수 없는 상대방과 끊임없이 조율해야 하는 게 어쩌면 부부의 숙명인 것 같다.
결혼 전에는 각자의 결혼식을 완성해 가는 방식과 방향이 너무 달라 놀라고
결혼 후에는 같이 살아가며 느끼는 따듯함의 온도는 망각한 채 이질감의 온도만 기억하고
출산 준비 과정 중 처음 경험하는 예비 엄마, 아빠의 서투름을 서로가 다독여 주기보단 불만이 앞서고
새로운 생명이 우리 곁에 오면, 부족한 잠에 치여 결국 '시간, 노동력, 돈'을 둘러싼 전투를 시작하고
결국 부부만이 누릴 수 있는 온전한 행복의 기회를 알아보지 못한 채 오만가지 감정으로 뒤죽박죽 살게 되는 것 같다.
가은이의 경우 결혼식을 올리고 2주 만에 우리에게 임신 소식을 알려주었기에, 신혼기간이 꽤 정말 짧았다. 당연히 임신과 출산이라는 축복에 감사하고 만끽했지만, 한편으로는 우리 부부에게 부모가 될 준비시간이 충분치 않았던 것 같다. 사랑의 크기와는 별개로 서로가 가진 색깔을 탐구할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하였고, 이는 곧 상대방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게 되어 결국 시비를 가리며 서로를 비난하는 갈등의 형태로 반복되었다.
분유를 타며 옥신각신하다 열탕하던 젖병이 날아다녔고
싸우다 답이 없어 출근해야 한다며 자러 간 남편을 새벽에 깨워 분노의 2차전을 하고
부부싸움 때문에는 절대 안 간다는 친정에 결국 가은이와 엄마만 가 있는 일도 있었고
결국 그 어두운 기운들이 시댁 & 친정으로 뻗혀가고, 가은이 돌을 앞두고는 갈등이 눈덩이처럼 더 커져갔다.
결국 나는 매일 집에 들어가기 싫었고, 잠시라도 숨이 트이는 회사가 피난처가 됐다. 하지만 그녀는 육아의 피로, 관계의 지침 속에서 점점 더 지쳐갔고 결국 일상 그 자체가 감당하기 어려운 악순환에 점점 피폐해져 갔다. (갈등이 없어도 산후 우울증이 생긴다는데 오죽했을까)
그러다 또다시 분노에 휩싸여 서로에게 폭언과 고함으로 가득 찬 어느 날. 집에 있기가 싫어 밖에 나갔다 왔는데 평소와는 다른 이상한 그녀의 행동을 목격했다. 와이프가 갑자기 가은이 방에 들어가더니, 마치 작별인사 하듯이 가은이 얼굴을 보고 자정에 그대로 밖으로 나가버린 것이다.
나는 이 장면을 홈캠으로 봤는데, 가은이가 잠들면 평소 방에 들어가지 않는 패턴과 가은이와 떨어지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는 그녀의 성향을 감안해 볼 때 그날의 행동은 정말 이상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특히 당시 그녀가 좋은 아내, 좋은 엄마가 되지 못한다고 너무나 자책하던 시기였기에, 불현듯 정신과 나종호 교수가 말했던 장면이 떠올랐다.
사람이 우울해지기 시작하면 “내가 다른 사람에게 짐이 된다고 생각한다는 것”
그리고 자살 충동과 실행까지의 평균 시간 10분이라는 말
갑자기 떠오른 불안에 휩싸여 나는 미친 속도로 그녀를 찾아 나섰지만, 그녀는 이미 차를 끌고 나가고 없었다. 전화를 걸었지만 받지 않았고, 끝내 휴대폰을 꺼버렸다. 그러자 온갖 생각이 더 떠올랐다.
"설마 차 타고 집 근처 호수로 돌진하는 건 아니겠지? 아님 달려오는 트럭으로 직진?"
끔찍한 상상이 내 머릿속을 점령해 버렸고, 결국 나는 떨리는 손으로 112를 눌렀다.
“와이프가 자살 징후를 남기고 사라졌어요. 제발 찾아주세요.”
경찰에게 나는 전화기를 붙잡고 울부짖었다. 연락두절의 그녀를 걱정하며 방 모서리에 쭈그려 앉아, 경찰관에게 몇 번을 전화했는지 모르겠다. 독촉에 독촉, 기다리라는 경찰의 답변 끝에, 마침내 고속도로 CCTV를 통해 그녀를 발견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그녀는 남편의 실종신고에 따른 귀가 명령으로 씩씩거리며 3시간 만에 집으로 돌아왔다.
근데 이 사건은 단지 하룻밤의 해프닝이었을까? 아마도 아닐 것이다. 그날은 우리 부부가 정신적으로 얼마나 피폐해져 있었는지, 그리고 진짜 이혼 위기 직전이라는 Sign이었다고 생각한다. 나름 산전수전의 경험으로 성장한 나는, 쉽게 평정심을 잃는 사람은 아니다. 그런데 결혼은 정말 장난이 아니었고, 갈등을 해결하려 하면 할수록 더 쓰라린 갈등 끝에 우린 정말 피크를 찍었던 것 같다.
그때 우리 부부는 대체 무엇을 위해 그렇게 싸웠던 걸까?
정말 의미 있는 것을 위해 가진 갈등이었을까?
서로가 다른 걸 인정하기보다, 내가 맞다는 걸 증명하고 싶었던 걸까?
사회생활 잘한다는 두 사람이 만나, 한 아이의 부모라는 사람들이 이것밖에 안 되는 걸까?
가은이가 아프고 나니, 이 사건이 너무나도 하찮게 느껴졌다. 다시는 112를 누르고 싶지도,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지도 않다. 하지만, 그래도 잘한 거를 하나 찾으려면 우리는 절대 가은이 앞에서는 싸우지 않았다. 그리고, 감사하게도 싸움으로 피폐해진 엄마는 그 불같은 감정들을 절대 가은에게 전달하지 않았다.
항상 그 감정은 마음속 구석에 가둬 두고 가은이와 함께 눈을 맞추며 웃어 준 엄마의 헌신덕에, 다행히 가은이는 병원치료를 시작하면서도 미소를 잃지 않고 하루하루 버텨갈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그 시기를 견뎌준 아내에게 더 감사한 요즘이다.
물론 요즘도 가끔씩 부부갈등이 생긴다. 하지만, 우리는 예전보다는 훨씬 온화하고 그리고 서로를 아껴주는 마음이 더 강하다. 가은이의 치료 과정 속에 각자가 짊어지는 무게가 얼마나 무거워졌는지 알기에, 그리고 이제는 생명 앞에 하찮은 일상의 갈등이 그리 중요해 보이지 않는다.
앞으로 크고 작은 마찰이 생기겠지만, 우린 가은이의 투병 앞에 한층 성숙해지고 끈끈해졌다. 우리 가족에게 다가온 큰 위기에서 끈끈하게 뭉칠 수 있었다면, 우린 이미 최고의 전우가 아닐까? 최고의 동반자가 있기에, 앞으로의 상황이 걱정스러울 때도 있지만 두렵지만은 않다.
부부란 참 묘하다!
그리고 인생도 참 묘하다!
그래서 돌아보면
결국 인생은 재미있나 보다!
[P.S]
참고로 112 신고 당시 그녀는, 처가댁 근처 편의점에서 소시지를 먹고 있었다고 한다. 소시지를 한입밖에 못 먹었는데 갑자기 경찰관이 그녀에게 왔다고 궁시렁되는 그녀의 모습을 보니, 그 기억하고 싶지 않은 시기도 결국 지난 추억이 되어 옅어지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