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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 완치자들의 모임

세상에서 제일 강한 사람

by 가은이 아빠

이번 입원동안, 병원 보드판에 걸린 한 공지글에 계속 눈에 들어왔다.


소아암 완치자와의 만남


가은이가 항암 중이라 면역력이 제로인데 과연 가도 될까?아님 부모 중 한 명이라도 한번 찾아가 볼까?라는 고민 끝에 무작정 신청해 놓은 모임. 관련해서 아는 게 하나도 없지만, 그냥 가은이를 위해서 무언가 정보를 얻고 싶었다.


그렇게 신청한 모임의 당일이 되니, 장소 때문에 너무 혼란스러웠다. ‘대통령 탄핵’ 관련 찬반 집회 때문에 난리난 광화문. 대중교통으로 가자니 너무 많은 사람들을 마주하며 혹시 모를 바이러스가 가은이한테 갈까 두려웠고, 차로 가도 차량통제로 결국 집회를 뚫고 지나가야 하기에 수많은 집회인원 속 바이러스를 피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가은이를 두고 혼자 갈까도 했지만, 왠지 모르게 가은이가 좋은 기운을 받을 수도 있다는 희망 때문에 포기하기도 쉽지 않았다. 같은 방식의 지속된 고민은 답이 없는 법. 다음 주 항암치료를 앞두고 가은이 컨디션이 조금 올라왔기에, 결국 우리는 위험을 무릅쓰고 가는 것으로 결정하였다.


막상 광화문에 도착해 보니, 역시나 팻말과 고성이 뒤섞인 집회는 정말 혼잡스러웠다. 항암치료 중인 1살 아이를 안고 수많은 인파를 보니, 그냥 집회 나온 수많은 사람들이 미워졌다. 그들의 집회권리에 우리 가족이 피해본 것 같은 느낌이었는데, 다행히 그 감정은 곧 소멸되어 버렸다. 왜냐면 그날 참석해서 뵌 완치자분과의 만남이 너무나 가치 있었기 때문이다!




식당에 도착하여 안내받은 방에 들어섰을 때 깜짝 놀랐다. 가은이 나이대에 소아암을 겪고 막 치료 된 유치원 혹은 초등학생 아이들이 있을 줄 알았는데, 90프로 이상은 사회생활하는 20~30대 성인이 대부분이었다. 20년쯤 전에는 소아암과 열심히 싸우던 아이였지만, 어느덧 멋진 성인이 되어 당당한 한 명의 사회 구성원으로 살아가는 이들. 밝은 얼굴에 서로 안부를 전하는 친숙한 모습과 묘한 당당함 앞에, 암이라는 단어는 전혀 친숙해 보이지 않았다.


소아암은 백혈병, 뇌종양, 림프종, 연부 조직 육종, 골육종 등 소아에서 발생하는 모든 악성 종양을 의미하는 질병인데 그날 나는 정말 다양한 병과, 다양한 삶의 이야기를 들었다.


대학생이 되어 즐겁게 연애하는 훈남

이제 막 입사한 신입사원이 상사가 너무 짜증 난다며 웃으며 토로하는 푸념

암치료 후유증으로 최근 기면증(기절)이 심해져 걱정된다는 한 20대 여성

어느새 심리치료사가 되어 소아암 어린이 심리상담을 해준다는 한 전문가

이번 가을에 결혼한다는 커플 이야기까지


사실 이분들을 뵙기 전까지는, 암이라는 너무나 큰 질병과 싸웠기에 '후유증 혹은 정서적 소외'가 함께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분들의 생동감, 열정, 자신감을 보고 나니 내가 무슨 생각을 한 건가 싶었다.


이분들은, 진짜 강한 사람들이시구나


난 흔히 강한 사람을 떠올리면 근육으로 다져진 마초남 혹은 카리스마형 리더가 떠 오른다. 근데 그날 난, 전혀 다른 유형의 진짜 강한 사람들을 처음으로 만난 것 같았다. 본인들 신체의 특징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이 사회에 맞게 적응하여 발전해 온 삶. 숭고하다는 단어는 이럴 때 쓸 수 있는 말일까?


그리고 그날 소중한 정보를 하나 얻었다. 3살 전 치료받은 사람들의 경험에 따르면 치료받던 고통은 대부분 나지 않지만, 가끔씩 어렴풋이 기억이 날 때도 있다고 한다. 그리고 이때 부모들의 역할이 굉장히 중요하다는 걸 알게 되었다.


아이에게 고통이 될까 봐 없던 일처럼 대화를 돌리지 말고

그 기억에 대해 있는 그대로 함께 대화해 주는 것이 아이의 안정적인 정서발달에 엄청 중요하다고 한다


그 기억은 소멸되어야 할 이유도 없고, 소멸되지도 않는다고 한다. 무의식 속에 살고 있는 그 무엇인가가 꿈틀거리며 나올 때, 그것은 존중받아 마땅한 자산이라는 것이다. 제대로 존중받지 못하면 그것은 억압이 되고 어린아이의 공포와 고통은 다시 세상 밖으로 나오지 못해, 결국 아이 정서 발달에 엄청난 후유증을 남긴다는 말이 무엇보다 기억에 남는다.




그렇게 값진 2시간의 시간이 지나고, 마지막으로 평소 다소 차갑게 느껴졌던 주치의 선생님께서 클로우징 멘트를 하셨다. 자기가 이 자리의 주인공이 아니라며 쑥스러워하며 짧게 남긴 코멘트에 내 마음은 또 감동받았다.


“오늘 이 자리에 오신 환자 여러분들은, 앞으로 올 여러분의 미래를 보신 겁니다”


내 몸 전체에 전율이 돌았고, 그 한마디에 그분의 진짜 모습이 보였다. 생명의 무게와 책임을 감당하고 불확실한 미래를 헤쳐나가기 위해 본인도 얼마나 아팠을까? 아이 한 명 한 명의 미래를 위해 이렇게 싸워주시는구나.


최전선에서 싸워주시는 의료진이 계셔서, 우리 가은이가 이렇게 건강을 찾고 치료받을 수 있는 거구나. 한 사람 한 사람의 생명을 살리기 위해 싸워주시는, 진짜 의사 선생님과 세브란스 의료진들께 이 자리를 빌려 다시 한번 감사의 말씀을 드리고 싶다.


그날 소아암 완치자들을 보고 난 우리 가은이의 희망을 보았다. 그리고 이제 가은이의 미소를 볼 때마다, 난 확신을 가지고 더 나아갈 수 있다. 아기 가은이가 어느덧 성인이 되어, 어린 친구들을 위로하며 희망을 주는 모습을 그날 내 마음속 스케치북에 그렸다.


우리 가은이도.. 나도.. 우리 자신에게 주어진 것 자체를 감사히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할 수 있는 것에 의미를 부여하며 그저 행복하게 살면 될 것 같다. 조금씩 깨달아 가는 게 있어서 그런 걸까, 오늘 같은 날은 불확실한 미래에도 자신감이 넘쳐난다. 다시 두려운 순간이 오더라도, 오늘을 기억하면 될 것 같다!



[P.S]

암 완치자 모임에서 와이프가 환아 부모로서 한마디를 하는 와중에, 갑자기 자기 자신의 아픔과 고통을 토로했다. 본래 부정적인 것들에 대한 속 얘기를 안 하는 사람인데, 그날은 정말 용기를 내서 자기 자신을 짓눌렀던 내면의 감정들을 공유해 버렸다. 그것도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Damm! 우리 마누라 정말 멋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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