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제성숙 패키지 - 회사 편
어느새 다시 다가 온 가은이의 6번째 항암, 이제 병원이 꽤 친숙하다. 의사 선생님, 간호 선생님, 그리고 보호자 및 환아 친구들. 익숙하게 짐을 정리하고 12층을 한 바퀴 돌며, 치료받고 있는 친구들에게 우리가 왔음을 알리며 인사한다.
짐 풀기 - 입원복 환복 - 채혈 및 엑스레이
소변검사 - 수혈 - 강제 소등 및 취침
항암 1일차 - 항암 2일차 - 항암 3일차
채혈 및 부작용 체크 - 퇴원
우리 가족도 이제는 꽤 능숙하다. 그렇게 가은이를 재우고 탕비실에 물을 받으러 갔다, 다른 환아의 아버지를 만나 이런저런 이야기로 긴장을 풀며 서로 위로를 했다. 그런데 대화중 묘한 여운을 일으키는 주제가 있었는데, 그건 바로 '휴직에 따른 고용 안정성' 얘기였다.
충청도에 사는 이 아버지는 지방에서 서울까지 치료받으러 와야 했고, 치료 또한 기간이 장기화되고 있어 어쩔 수 없이 휴직을 했다고 한다. 근데, 요즘 회사에서 계속 휴직기간에 대한 압박을 주고 있고, 결국 할 수 없이 이직도 고려하고 있다고 한다.
경제적인 부분과 가정의 안정성을 위해 엄청난 무게감을 느끼고 있을 한 아버지를 보며, 아주 묘한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그날 밤 나는, 가은이 옆에서 곰곰이 지난 14년의 회사 생활과 의미를 생각해 보게 되었다.
누구나 가슴속 주머니에 사직서를 품고 산다는 웃픈 대한민국 직장인의 현실. 솔직히, 대학교 졸업 후 이 이야기가 나에게는 전혀 와닿지 않았었다. 그저 내가 규정한 신입사원으로서의 패기와 자세를 가지고 열정적으로 일하고 싶었기에, 월요일이면 항상 인상 쓰고 출근하는 회사 동료 선배들을 보며 오히려 난 웃으면서 내 책상으로 향했다.
넌 뭐가 그렇게 좋아 웃고 있노?
라는 선배들의 질문에 ‘출근길에 햇살 좋던데요, 빗소리가 로맨틱하던데요’라며 내가 하는 일과 내가 향하고 있는 사무실이 좋았던 나. 하지만 나도 피해가 수 없는 현실이 있었다.
[ 대한민국 직장인 생존의 3·6·9 법칙 ]
-3년 차: 살아남는 자가 웃는다
맡은 일에 익숙해지는 찰나 ‘넌 이쯤 됐으면 알아서 해야지?’라는 눈빛이 쏟아진다.
-6년 차: 일 잘하는 사람의 비극
‘네가 제일 잘 아니까’란 말이 칭찬 같지만, 언제부턴가 일이 내 이름으로만 몰린다.
-9년 차: 나, 계속 이렇게 살아도 되는 걸까?
회사에서 내 직급은 과장. 근데 대체 내 인생은 어디 있나. 커리어냐? 이직이냐? 일단 모르겠고 그저 쉬고만 싶다.
나에겐 6년차 이야기가 딱 들어맞았다. 대리 진급 후 가장 많이 들었던 얘기는 “이제 대리를 달았으니, 과장처럼 일해야지?”였고 나는 누구든 맡기 꺼려하던 업무들이 생기면, 내게 Burn Out이 온지도 모르며 하나씩 계속 떠안았다.
매일 아침, 두통엔 타이레놀로
충혈된 눈에는 인공눈물로
모닝커피는 여유가 아닌 생존의 생명수로 겨우 날 지탱해 줬다
하지만, 나의 호의를 권리로 아는 팀원들이 싫어 팀을 바꾸고 난 후에는
새로운 업무에 속도가 나지 않는 나를 보는 게 가장 고통스러웠고, 그 어떤 것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나름 에이스로 불렸었는데, 예전에 나는 어디 간 거지? 후배들에게 물어가며 겨우 업무를 연결시키는 나 자신의 모습이 너무 초라하게 느껴졌다. 화가 나 견딜 수가 없었고 결국 팀장님 책상 위에 사직서를 올려놓고 터벅터벅 집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다음날 팀장님은 담담히 웃으며 말했었다.
야, 내가 새 팀에 온 너한테 고과 뭐 줬는지 알아? A야. 새 팀 와서 충분히 잘하고 있구먼 뭘
그 말에 마음이 바로 흔들렸고, 나는 웃으며 책상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며칠 후, 난 미리 보고하지 못했다는 납득하기 힘든 이유로 회의실에서 상무님께 미친 듯이 깨졌다.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이렇게 욕을 먹어야 하는지
이제 더는 미련이 없었다. 그날 바로 두 번째 사직서를 제출했다. 근데 엄청나게 깨던 그가 인간적으로 “어디 갈 곳은 있냐”며 걱정해 주자 난 또 흔들렸고, 결국 죄송하다는 손 편지와 함께 다시 책상으로 복귀했다.
하지만, 한번 온 Burn Out은 쉽게 회복되지 않았고, 팀을 바꾼 지 1년이 되어도 여전히 부족한 나 자신을 발견하고는 더 이상은 그 모습을 용납할 수 없었다.
그 순간 주르륵 흐르는 눈물이 느껴졌고,
바로 빈 회의실로 도망갔다
미친 듯이 쏟아지는 눈물에 난 흐느껴 울었고, 이내 주먹을 입에 물며 소리 내지 않으려 노력했다. 나의 이 치욕스러운 눈물을 아무에게도 보여주기 싫었고 그냥 조용히 이 조직에서 사라지고 싶었다. 그렇게 3번째 사직서가 팀장님께 제출되었고, 다음날에도 답이 없자 4번째 사직서를 곧장 실장에게 제출하며 얘기했다.
회사에 기여하지 못하는 임직원은 회사를 다닐 자격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 산업을 거시적으로 보고 싶지만, 제게는 그럴 능력이 없는 것 같아 이제 그만하고 싶습니다.
좌절한 듯 위축된 목소리였지만, 내 진심이 전달된 걸까? 그때 상무님이 내게 어깨를 두드리며 조용히 얘기해 줬다.
회사에서 하고 싶은 거 다 해보고, 그래도 별거 없으면 그때 퇴사해도 안 늦어!
잘 되면 고향에 동상도 하나 새울 수 있는 능력이구먼 뭘!
'잘한다 잘한다'는 칭찬이 독이 되어, 어느새 내게 생긴 완벽주의에 마구 무너져 버린 2017년. 근데 그때 그 따듯한 한마디가, 얼어붙은 내 마음에 온기를 마구 불어넣었다. 정말 따듯했던 그래서 더 감사했던 그날의 기억이 오늘따라 선명하게 떠 오른다.
훗날 내 지인들에게 이 스토리를 알려주면 다들 반문한다. 사표를 4번이나 냈는데 사기업에서 품어준다고? 인마 이거 완전 불사조네! 그렇게 우수개 소리로 사표 4번의 전설과 추억이 만들어진 해. 2017년과 2018년은 내 인생에서 정말 쓰라렸던 시기지만, 나만의 열정을 Refresh 하고 다시 불태울 수 있도록 기회를 받은 해이기도 하다.
돌이켜보니, 아마 회사를 진심으로 사랑했기에 그렇게 속상했었나 보다. 근데, 과연 회사가 나를 좌절시켰던 걸까? 만약 그때 퇴사했더라면 하는 가정을 해보니, 가은이가 아픈 지금 상황에서는 상상만으로도 정말 끔찍하다.
4차례나 사직서를 제출한 직원을 품어줬고
계속 안정적인 환경에서 일할 수 있게 해 줬고
따듯한 선후배를 만나 아름다운 추억들도 만들어 줬다.
그리고 가은이가 아프고 병간호를 할 수 있게 도와주었고
지난 14년간 내가 이 사회에서 당당하게 살 수 있게 돈과 지위도 부여했다.
결국 이제 와서 보니 회사가 너무 고맙다. 아니, 너무 감사하다. 솔직히 회사 안에 있을 때는 회사가 내 삶을 갉아먹고 있다고 생각했다. 내 내면에는 ‘사기업이니 언제 자를 줄 몰라’라는 두려움에 항상 긴장되어 있었고, 쳇바퀴처럼 나를 굴리고 있다며 오히려 회사를 원망했다. 회사는 묵묵히 사조직의 특성대로 이윤을 추구하며 존재할 뿐인데, 내가 가진 피해의식이 이 회사를 차갑게 만들어 버린 것이었다.
그리고 회사 밖에 있어보니.. 이곳은 사회의 구성원이자 한 개인이, 삶의 기반을 닦으며 자아실현도 할 수 있게 도와주는 곳이라는 것도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가은이가 잘 치료받고 때가 되어 복직하게 되면, 이제는 아무 생각 없이 앞만 보며 달리고 싶다. 잡념 없이 오직 하루하루 최선을 다하며, 웃으며 일하고 즐겁게 다니는 회사. 상상만으로도 이젠 일터가 즐겁다.
내일 아침 일어나면, 혹은 복직하고 나면 내 감정이 어떨지 모르겠지만
오늘따라 회사가 유난히 고맙다.
그것도 많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