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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존재하는 '이 세상의 건너편'

암과 투병하는 고독한 세상

by 가은이 아빠

다음 날, 나는 가은이의 주치의를 바로 만났다. 앞으로의 치료 계획과 방향을 듣는 자리였지만, 그 설명은 내 마음에 파도를 던지는 브리핑이었다. “우구구” 가은이가 병원을 무서워할까 봐 다정하게 안아주는 의사의 모습이 참 고마웠다. 하지만 그 따뜻함은, 보호자인 나에게 곧 차갑고도 충격적인 현실로 바뀌었다.


“암 치료는 장기 전입니다. 치료가 잘될 경우엔 9개월 정도 예상하시고요. 길면 2~3년까지 걸릴 수 있어요. 그리고 재발 가능성도 항상 염두에 두셔야 하고, 최악의 경우는 안구 적출도 고려하게 됩니다.” 단순히 데이터를 설명한 말이었지만, 나는 그 자리에서 멍해졌다.


그리고 이어진 결정타. “이 병은 종양이 시신경을 통해 뇌로 전이되면 바로 사망할 수도 있는 위험한 병이에요. 현재 가은이 종양의 경우, 많이 진행이 된 E등급이기에 빨리 상태를 확인해야 합니다”


<망막포 세포종 등급 기준>


카메라 플래시나 빛이 반사되지 않으면 아무도 식별할 수도 없는데, 가장 많이 진행된 E군이라는 판정이 너무나도 기가 막힌다. 하지만, 무엇보다 충격적인 건 ‘적출’과 ‘사망’이란 단어다. 내 인생에서 이 용어들이 이렇게 무서운지 그날 처음 알았다. 순간순간, 모든 소리가 멎는 것 같았지만 나는 가은이 아빠다. 더 이상 겁먹을 시간은 사치였기에, 이제 정말 정신 차려야 했다.




앞으로 우리가 치료받으며 머물게 될 곳은 세브란스 암병원 12층. 그곳은 가은이처럼 소아암과 싸우는 아이들로 가득한 곳이었다. 갓난아이, 유아, 초등학생, 중학생, 고등학생까지.


그리고 서울, 대전, 부산, 진주, 제주도... 전국 각지에서 모인 아이들이 각자의 사연과 병을 안고 버티고 있었다. 앞으로 병원에서 보내게 될 시간들. 그 당시, 내가 그곳을 너무 차갑게 느껴서였을까?


아이들에겐 이름보다 먼저 ‘진단명’이 붙는 것 같았다. 생일보다는 투병일이 먼저였고, 웃음보다도 백혈구 수치가 더 중요해 보였다.


그리고 밤마다 울려 퍼지는 경고음.

“코드 블루, 코드 블루!”

심정지 혹은 생명이 위태로운 상황을 알리는 신호. 누군가는 오늘, 이 병동을 떠날 수도 있다는 이야기가 내 공포를 더 자극했다.


이 세상에 엄연히 존재하고 있었지만 내가 몰랐던, 혹은 애써 외면했던 세계. 하루하루 버티는 게 낯설고 버거울 것 같아, 이대로 도망치고 싶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도망칠 수 없다.


진짜 힘든 건.. 이 작은 몸으로 낯선 세상과 싸울 우리 딸이니까.


그리고 좋든 싫든 우리 가족은 이미 ‘이 세상의 건너편'에 넘어와 있었다. 냉엄한 현실이지만, 어떻게든 이 위기를 극복할 방법을 난 찾아야만 했다. 나는 가은이 아빠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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