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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 제일 불편한 돈, 암 보험금

강제성숙 패키지 - 돈 편

by 가은이 아빠

경제학과를 졸업하며, M 증권사 면접자리에서 극찬을 받은 경험이 있다. '돈이란 무엇인가?'라는 정의 및 가치에 대해 우연히 나온 내 생각이었는데, 기 살려주는 멘트인 줄도 모르고 홀딱 빠져버린 그 대학생은 그냥 주체적으로 돈에 대한 정의를 내린 날로 규정하기로 했다.


돈이란 자본이 가지는 기회비용과 위험에 대한 가치제공 수단이자 상품 교환의 매개

돈의 가치는 상대적, 절대적 기준에 따라 2가지 분류

절대적 가치는 사회라는 큰 틀에서 화폐수단으로 통용되며, 구매할 수 있는 절대량에 기초

상대적 가치는 사회에서 측정된 절대적인 돈의 가치에, 개인 가치관에 따라 추가된 주관적 가치의 합


나름 대학교 때 비운 기초 개념들을 해석해서 이렇게 돈을 정의해 놓았기에, 13년간의 회사생활동안 월급이 들어와 잔고가 늘어날 때마다 좋았다. 나의 가치관에 부합하는 곳에 최대한 가치 있게 돈을 쓸 기회가 늘어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나에게 '돈이란 진짜 대체 뭐지?'를 생각하게 되는 충격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그건 바로 가은이 암 확진을 통한, 보험금이 입금되었을 때다.


태아보험이 어린이보험으로 전환된다는 H 보험사 전면 광고가

보장되는 범위가 '정신질환과 암까지' 된다는 보험사 직원의 지속되는 어필을 들을 때면


난 비웃었다. 왜냐면, 내 딸은 감기정도 말고는 걸릴 병이 없을 테니까. 하지만, 내 예상을 비웃으며 보장금액이 가장 큰, 암에 대한 보험금이 우리에게 지급되었다.




치료비가 걱정되는 우리였기, 숨을 돌릴 수 있는 돈이 들어온 건 사실이다. 그런데 왜 나는 기분이 이렇게 무겁고 불편할까. 굳이 비유하자면, 이전까지 내가 번 돈은 따듯하게 느껴졌고 암보험금은 너무나 차갑게 느껴졌다. 너무 차가워서 건들고 싶지도, 쳐다보고 싶지도 않았다. 마치 가은이의 고통을 담보로 지급된 하늘의 장난 같다는 느낌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 복잡한 세상에서 돈에 대해 그렇게 간단하게 얘기할 수 있을까? 치료기간과 치료비가 불확실한 상황에서 암 보험금은 가뭄의 단비 같은 역할을 한다. 사실, 내가 와이프에게 태아보험 이후에 매월 3만 5천원을 아끼자고 해지하자고 했었다. 근데 그때 진짜 해지했더라면 지금 우리는 어땠을까?


우선 나는 어리석음으로 가득 찬 나를 자책하고, 와이프는 어쩔 수 없이 나의 선택을 원망하는 날이 올 것이고

치료비를 결제할 때마다 부담되는 심리에, 놓친 보험금은 더 눈에 아른거릴 것이고

이는 결국 가은이를 볼 때마다 못해준 게 생각나서 계속 미안해질 것이다.


근데 여기서 정말 크나큰 딜레마가 있다. 그럼 내가 지금 이 상황을 과연 감사해야 하는 걸까? 솔직히 난 절대 지금의 상황을 감사할 수는 없다. 이 돈을 차라리 안 받고 말지! 근데 이 감정들이 부모에게 일어날 수 있는 감정이라고 인정해 주더라고, 과연 이게 진짜 성숙한 어른의 태도일까?


이미 일어난 일이니, 보험금을 받지 않은 상황보다는 훨씬 나은 게 당연하고

그리고 그 돈은 가치 있게 가은이를 위해 써주면 되는 것이다.

혹시나 모를 미래 리스크에 대비하려고, 우리가 보험을 들어 놓는 거 아닌가?

또한, 부모가 안정적으로 투자까지 해 줄 수 있다면 성인이 된 가은이에게 정말 가치 있는 돈이 되지 않을까?


하지만, 난 아직도 성숙한 어른은 되지는 못했나 보다. 그냥 보험금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그 돈이 그저 미워진다. 우리 가족을 도와주는 돈인데도 난 아직도 이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 같다. 주위 사람들이 가끔씩 물어보곤 한다.


"보험은 잘 들어 놓은 거지?"


그럴 때마다, 난 얼른 대화 주제를 바꾼다. 보험금의 수치가 마치 우리 가은이의 가치인 것처럼 느껴질까 봐 너무 불편하다. 하지만, 그래도 이제 머리로는 안다. 그 돈이 고마운 돈이라는 것을!


가은 엄마와 상의하여, 보험금은 적금 통장에 묶어 가은이가 성인이 되면 전달해 주기로 결정했다. 치료비는 우리가 이제까지 모아둔 돈으로 어떻게든 충당해서 버텨보고, 앞으로 더 아끼며 살아가면 되지 않을까? 정말, 그 돈 1원도 쓰고 싶지 않다. 하지만 이제부터라도 차갑고 매정한 돈이라고, 내 안에 가든찬 분노를 이 돈에 투영할 필요는 없는 것 같다.


시간이 많이 필요하겠지만.. 아빠가 조금씩이라도 성숙해질 수는 있을 것 같다.


그리고 이로 인해 얻어질 여유가, 우리 가은이를 조금이라도 편안하게 만들어주길 기도해 본다.


하지만 아빠는 이 돈이 밉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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