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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새벽 산행 1

by 신피질

깜깜한 어둠 속에서 계곡 물소리가 굵고 깊게 들린다.

마치 한여름에 시원스럽게 내리는 우렁찬 소낙비 소리다.


밤이 깜깜해서 계곡은 보이지 않고, 물소리만 밤의 어둠을 타고 공중에서 스테레오처럼 나를 휘감은 후 심장을 통해 뱃속 깊숙이 파고든다.


계곡의 물소리는 태고의 울림이고 나를 구성하고 있는 동종 물질의 반향이다.

인간의 몸이 70%가 물이니, 사실 나는 물이다.


남한 최고 산인 지리산의 때 묻지 않은 원초적 물의 거대한 외침에 내 몸의 작은 물들이 격하게 반응하며 그동안 잊고 있던 어머니 품 같은 포근함을 느끼고 어린아이의 순진한 세계로 들어선다.


계곡물은 시끄럽지만 시끄럽지 않다.


그것은 우리 몸의 주파수에 서로 잘 호응하는 소리이다. 듣기 좋은 클래식 음악처럼 잘 흡수된다.


돌과 바위와 그리고 거품과 물의 수많은 입자들이 서로 부딪쳐 다양한 합창 소리를 내어, 마치 지구의 표면을 어루만지는 지구 여신 가이아의 사랑스러운 노랫소리처럼 들린다.




고통이 시작되었다.

남한 육지의 최고봉인 지리산을 그것도 한 겨울에 함부로 발을 들여놓은 어리석음에 대한 반격이 시작되었다.


등산객들은 고지를 점령하려는 듯, 등산 스틱을 총처럼 무장하고, 거침없이 올라간다. 계곡물과 달리 인간의 스틱 소리는 거친 경고음이다.


뒤쳐지면 죽는다. 멈추지 말고 전진하라는 전쟁 중 지휘관의 비장한 소리다.


빨간 레깅스를 입은 젊은 여성이 굵은 허벅지를 힘차게 가동하며 나를 추월하고 빠르게 적진을 향해 돌격한다. 그녀는 마치 신과의 전투에서 맨 앞장을 서는 인간 여 전사 같기도 하다.


나는 벌써 허벅지가 서서히 아파온다. 처음 칼바위까지 어렵지 않지만 차츰 어려워져서 법계사 이후부터 난코스라고 가이드가 설명했는데 처음 시작부터 쉽지가 않다.


머리 위 바람이 거칠다.

얼마 만에 들어본 거센 바람소리인가?


하늘이 울부짖는 소리. 마치 지리산을 깎아버리겠다는 듯이 무시무시하게 바람이 분다. 날기예보에는 기온이 높다고 했는데 지리산은 날기 예보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태풍이 몰아치듯 기관차가 폭주하듯 함부로 지리산에 말을 들여놓은 인간들을 모조리 쓸어버리겠다는 듯이 경고를 하는 것 같다.


다행스럽게 직접 바람을 맞지 않았다.

키 큰 나무와 바위가 방어막을 치고 있는 것이다. 아니 그건 바람이 우는 소리가 아니라 나무들이 거센 바람에 비명을 지르는 소리이거나 지리산이 겨울을 나는 신음소리이다.


나무는 우리에게 산소를 주고, 또 수만 년 동안 인간의 바람막이를 해주고 있다.


서서히 사람들이 지쳐간다.

지리산의 철통 같은 방어막에 적진을 향해 돌격하는 우렁찬 기세가 꺾이고 차츰 힘을 잃는다.

숨소리가 거칠어지고 등산로 옆쪽으로 비켜서 당을 흡수하며 체력 보충을 하는 사람이 자주 보인다.


베테랑같이 보이는 젊은 남자가 더 젊은 여자에게 하는 말이 들린다. 지리산 등산은 “자신과의 싸움이다.

매주 한 번씩 지리산에 오르는데 지난주는 2번 올랐다”. 놀래는 여자에게 “자기는 별거 아니고, 조금 후에 지팡이 하나 집고 2천 번을 오른 사람도 있다고.”



고수들이 많다.

나는 한 번도 고수가 되어 본 적이 없다. 인생의 삼등칸 뒤에 매달려 발버둥 치며 간신히 낙오하지 않고 버티고 산다.


뭐 하나 파고들어 전문가 반열에 오른 적이 없다. 심지어 그런 고수들을 직접 만나서 삶의 지혜를 달라고 요청한 적도 없다. 언제나 맨 끝에서 고수들을 경외하면서 허우적댄다.


맨날 막차만 딴다.

체력도 머리도 노력도 언제나 맨 끝이다.


하지만 삶은 포기할 수 없다. 빨리 가던 천천히 가든 끝까지 가야 하는 경기다.


요즘에는 천천히 가려고 한다. 아니 멈춘다. 멈춰서 세상과 나를 보려고 한다. 멈추니 세상이 아름답다.


오늘은 지리산이 고통을 가르친다.

‘고통은 책 한 권을 채울 수 있는 분량이다고.’


허벅지가 몸부림치며 운다. 오르막은 가파르고, 돌은 거칠다. 돌과 돌의 높이가 왜 이렇게 높은가? 허벅지가 비틀어지고 관절이 한계를 넘었다고 비명을 지르며 그만 멈추라고 계속 경고를 하며 무장해제 하려 한다.


고통이 도대체 어디에서 오는지 허벅지를 세밀하게 들여다보지만 소용이 없다. 전 주 설악산 보다 두 배는 힘든 것 같다. 마음이 요동 질 친다.


내가 뭐 미쳤다고 잠 안 자고 이 짖을 해야 하지? 체력도 약한데 적당히 하면 되지 않을까?


하지만, 내려가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모두가 멈출지 언정, 포기하지 않는다.

새벽어둠을 가르며 산에 발을 들여놓은 사람들은 이미 그렇게 정해져 있다.

새벽에 일찍 일어나 일터에 나온 사람들은 삶에서 커다란 승리를 하지 못해도 결코 패배하며 물러서지 않는다.


육체와 정신을 분리하고, 고통을 지켜보고 통제하며 지리산 새벽의 침묵을 깊게 들여 보려 했지만, 고통으로 몸부림치며 한 걸음 한 걸음 간신히 올라가는 것 외에는 아무 생각도 들지 않는다.


하늘을 쳐다보니, 별이 한 두 개 희미하게 보일 뿐이다. 태풍 같은 거센 바람이 별들마저 마구 쓰러 버렸다. 바람이 죽일 듯이 부는 데도 등산로가 어찌나 가파르던지 바람막이 겉옷을 벗었다.


법계사 앞 작은 쉼터에는 몇몇 사람이 자리를 틀고 간식을 먹고 있다. 나도 잠시 당을 보충하고 다시 올랐다.


삼분의 이 지점에서 쉬고 있는 빨간 레깅스 여성을 지나간다. 천천히 가도 쉬지 않고 가면, 빨리 올라가며 자주 쉬어 가는 사람보다 빠르게 올라간다.


오늘 일출이 7시 11분이라고 가이드가 말했다. 그러니 일출을 보려면 3시간 30분 동안 올라야 한다. 내 허벅지가 서서히 적응을 한 것 같다. 아니 더 이상을 말을 듣지 않는 주인에게 복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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