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청에서 중청으로 가는 길에 갑자기 손 끝이 아플 정도로 시리다.
장갑을 꼈음에도 한참 동안 손 끝이 강렬하게 아팠다. 오늘 한 낮 기온이 10도 이상이 예상되었지만, 겨울 아침 설악산 정상은 결코 등산객을 그냥 편하게 맞이하지 않는다.
만약 영하의 날씨에 철저한 대비 없이 설악 정상인 대청에 오른다면 추위 지옥을 경험할 것이다.
한국에서 가장 세다는 대청봉의 강력한 바람 앞에서 새해 기원 대청봉 인증숏을 찍으려고 십여 분 등산객들이 늘어선 줄을 서며 기다리다가, 추위가 얼마나 큰 고통을 주는지 뼈저리게 체험했다.
사진 찍을 때 1분 정도 모자를 벗었는데 얼굴 반쪽이 사라져 버린 듯한 느낌이 며칠 지속되었다. 특히 발끝과 손끝이 잘려 나가는 듯한 고통은 설악 대청을 겨울에 함부로 들이댄 대가이다.
하지만 인간은 설악이 명함도 못 내밀 팔천 미터가 넘는 에베레스트를 줄지어 오른다. 경험 많은 등산가는 발가락에도 핫팩을 부치고 보온에 강한 벙어리장갑을 준비하고 추위에 방전되는 배터리에 보호복을 입혀 온다.
하지만 경험 없이 막무가내로 호기만 부리며 올라온 자들은 정상 일출을 기다릴 때 발을 동동거리며 제자리 뛰기를 한다. 또 추위 고통에 몸부림치기도 하고 또 정상에서 인증숏을 하려는 데 배터리가 추위에 방전되어 헛수고를 하기도 하며 강력한 바람에 휴대폰을 바위에 떨어뜨리기도 한다.
출발 전 가이드가 정상에서 인증숏 찍다가 휴대폰이 바람에 날려 바위에 부딪혀 깨지는 경우가 종종 있으니 조심하라고 미리 안내할 정도로 겨울 대청봉 정상은 손 끝 발 끝 추위와 강력한 바람에 대비해야 한다.
오늘은 포근하다. 바람이 없다.
나처럼 자주 산행하는 사람은 등산복의 레이어링 시스템을 잘 안다. 그래서 기온과 바람의 상태에 따라 등산 중 입고 벗기를 수시로 한다.
겨울 등산 시 배낭은 조금 큰 사이즈를 추천한다. 가져온 보온 패딩과 바람막이 고어텍스 잠바를 모두 배낭에 넣고 겨울 대청봉에 올랐다. 바람이 없고 햇빛이 좋으며 하늘에 구름 한 점 없는 맑고 포근한 날이다.
최고로 좋은 날이다.
주로 새벽에 오색에서 대청을 올라 정상에서 바위투성이만 보았지만, 이번에는 햇빛이 가득 찬 상태에서 중청에서 대청을 오르다 보니 대청이 한눈에 보인다.
해는 대청 위에서 빛난다.
마치 하느님이 여기가 천국이니 이곳으로 오라는 듯 대청은 완벽한 삼각형을 띠고 정상을 향하는 길은 천국으로 오르는 길인 듯 삼각의 정중앙을 가른다.
설악의 곳곳이 불규칙적이고 뾰쪽뾰쪽한 바위들이 고딕 양식의 높은 탑처럼 보기만 해도 전율이 일어나게 온갖 재주를 부리고 있지만 대청은 대장답게 완벽하게 균형 잡힌 삼각형을 만들며 정점에 위치한다.
피타고라스가 세상의 이치를 삼각형 함수에서 보여주듯 대장답게 잔머리 굴리지 않고 정면으로 승부를 걸었다.
남한 육지의 대장 산인 지리산 천왕봉도 이와 비슷하다.
지리산은 흙 산으로 대부분 봉우리가 완만하지만 설악산은 봉우리에 뾰쪽한 바위가 많다. 마치 산을 만드는 신이 바위로 산에 추상화를 그린 듯 제멋대로 뿌린 수많은 바위 봉우리가 있다.
대청봉은 큰 바위 없이 일직선에 가까운 거대한 삼각형의 형태를 띠며 진중하고 단순한 모습으로 하늘 정상을 향해 한 점을 이룬다. 이곳이 한국의 올림푸스 산이고 저 꼭대기에 제우스가 번개를 들고 있는 것이다.
그래도 설악산은 바위산이다.
대청이 멀리서 보면 잘 다듬어지고 완만한 흙산처럼 보이는 경사면이라도 가까이 한 발 한 발 오르는 길은 흙이 없는 거친 돌과 바위로 이루어진 험난한 길이다.
바람이 거세서 정상 주변은 눈은 찾아볼 수 없고 응달 지역에 얼어붙은 얼음이 조금 보일 뿐이다.
드디어 정상이다.
넓은 대청봉 정상에 사람이 거의 없다.
사람들은 대부분 어제 첫 해 일출을 보러 왔을 것이고 또 오늘 일출이 이미 끝났기 때문에 썰물처럼 빠져나간 듯하다. 지금 대청 정상에는 두세 명 밖에 없다. 바람 한 점 없고 햇볕이 따뜻해서 5월의 늦봄처럼 포근한 날씨다. 아니 선크림을 가져오지 못한 것을 후회할 정도로 햇빛이 강렬하다.
평온하고 아름다운 기분이 내면에서 일어난다.
사방팔방의 산과 바위 나무 공기가 선연하게 드러나고 그곳 하나하나에 나를 보낸다.
누군가에게 부탁해서 인증숏을 여러 장 찍고 대청의 기운과 온 마음을 실어 카톡으로 몇 곳에 보냈다.
대청 정상은 수많은 작은 바위로 이루어진 반경 십여 제곱미터의 공간이며 바위는 각기 평탄하지 않고 거칠다.
그곳 바위에 걸터앉아 한 시간 정도 시간을 보냈다. 평화와 행복이 가득 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