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치고는 바람이 별로 없고 기온도 낮지 않다.
어쩌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니 별들이 가득 차 있다. 2년 전 지리산 세석산장에서 천왕봉을 오를 때처럼 무수한 별이 하늘을 가득 채우고 있다.
우주에 약 2 조개의 은하가 있고 그 각각의 은하에 수천억 개의 별이 있으며 그 별 중에 중간 크기의 태양이 있다. 그리거 우리는 태양의 여러 행성 중 하나인 지구에 살고 있다는 사실이 생각난다.
하지만 밤하늘을 온통 차지하고 있는 무수한 별들은 서정적 아름다움을 준다. 수많은 전설의 별이 눈부시게 하늘을 가득 채우고 내 가슴에 들어와 앉는다.
한참 동안 별을 바라보며 나를 잊었다.
나를 잊으면 남는 건 별이다. 그러면, 나는 곧 별이 된다.
내 고향이 시리우스 별이니 나는 죽으면 시리우스로 되돌아갈 것이라고 농담 삼아 말했던 적이 있다.
과학적으로 보면 우리가 빛이다.
궁극적으로 생명이 빛을 먹고살고 있으니 별과 우리는 한 몸인 것이다. 그래서 밤하늘에 가득 찬 별을 보면 가슴이 뭉클해지는 걸까?
가끔씩 한 두 개의 랜턴과 스틱이 나를 앞선다. 한 일행은 세 명의 친구가 같이 온 듯하다. 그러고 보면 설악산에 자주 오르는 사람들에 비하면 난 초보로 등산 속도가 빠르지 않다. 출발할 때 뒤쫓기로 한 사람은 아예 그림자조차 없다.
혼자 산행하는 사람이 그룹으로 가는 일행과 같이 가기는 어렵다. 이상할 수 있지만 보이지 않는 그들 만의 친숙한 울타리가 있다. 그들은 그 울타리에서 아늑함을 느끼려 하기 때문에 낯선 이를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다.
나도 그들 만의 친숙함에 접근해서 세월과 감정의 역사를 무시할 정도로 넉살이 좋은 것도 아니다.
단지 처음 가는 길이라 그들이 가는 길을 뒤따라 가서 안전을 확보하고 싶을 뿐이다.
하지만 그것도 조금 따라가 보면 다시 혼자되고 싶어 진다. 스틱 소리, 랜턴 불빛, 허덕거리는 숨소리, 배낭에서 나는 소리 등의 온갖 소음과 거추장스러운 것들이 내 영혼의 평온함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혼자 가는 사람도 대부분도 그냥 스쳐간다.
그래서 가끔 홀로 오는 여성은 이성의 관심으로 대화를 건네기도 한다. 하지만, 혼자 산행할 때 깊은 내면의 사유와 힘들어하는 육체를 온전히 느낄 수 있는 기회를 잃게 된다.
사람 일이라 긴 패딩을 입었던 나이 든 여성이 걱정되고, 날렵한 체격의 중년 여성의 랜턴이 오지 않나 하는 생각이 한두 번 들어 고개가 저절로 뒤로 돌아간다.
아침 7시가 되자 날이 밝아진다. 이젠 저 멀리 산들이 보인다.
산들이 파도처럼 굽이치며 정말로 세상을 점령하고 있는 듯 온통 산들의 세상이다.
장엄하고 아련하다.
청계산, 관악산 등 서울 인근의 산 정상에서 바라본 것과 가장 차이 나는 것은 끝없이 펼쳐지는 높은 산들의 광활함이다.
이젠 나무도 줄기의 색과 형체를 고스란히 드러낸다.
눈 덮인 경사면에는 쓰러진 나무가 곳곳에 있고, 죽었지만 아직 살아 있는 듯한 고사목이 짧고 가늘게 붙어 있는 수십 개의 팔을 꼼짝 하지 않고 세월을 잡고 있다,
아름드리나무들은 산행 초에 어둠 속에서 줄기만 보여줬다.
지금 해발 1400미터 고지에는 천년을 산다는 주목과 작은 활엽수가 대부분이다. 마치 산 정상에는 머리를 조아려야 하는 것처럼 모두가 낮은 것뿐이다.
나도 스틱을 한 손으로 잡고 한 손으로 바위를 부여잡으며 낮은 포복자세로 오른다.
설악산에는 남쪽의 높은 산에 많이 있는 조리대는 거의 없고 이름을 알 수 없는 작은 활엽수들이 많아 겨울에 산 정상 부근은 온통 낮게 자란 나무 가지만 보이는 회색세계다.
저 멀리 외설악의 공룡능선은 바위 능선으로 마치 호랑이나 공룡의 살점이 완전히 뜯겨 나가 골조가 그대로 드러나고, 사이사이에 흰 눈이 쌓여 있어 멀리서 보면 거대한 백호가 달려가는 느낌이다.
산 너머 저 편에 여명의 붉은색 띠가 서서히 나타난다.
여명의 붉은 구름 층은 감정의 소용돌이를 일으켜 우리 몸에 기운을 준다.
날다람쥐처럼 빠르게 걷지 않으면 나같이 평범한 등산객이 한계령에서 대청봉까지 올라가서 정상에서 일출을 보기는 매우 어렵다는 것을 경험했다.
대청봉이 높다랗게 동쪽을 온통 가로막고 있으니 뒤쪽에 볕이 든 이후에 해가 떴다는 것을 알 수 있어 일출을 볼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대청봉 정상까지 시간 내에 가야 한다.
그래서 보통사람이 일출을 보려면 오색에서 출발해야 한다. 속도가 느려 설령 정상에 못 미치더라도 정상으로 가는 중에도 동쪽이 막혀 있지 않기 때문에 일출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오늘 나는 당초 계획했던 대청봉 일출도 공룡능선도 포기할 수밖에 없다.
공룡능선도 능선의 출발점인 희운각 대피소까지 아침 8시 30분 이내에 도착해야 한다. 공룡능선을 타고 버스 출발 시간 전에 산행을 끝낼 수 있기 때문이다. 가이드가 신신당부한 말이다.
끝청머리 바위에 걸터앉아 가져온 컵라면에 식어서 미지근한 온수를 부어서, 덜 끓여진 컵라면을 맛있게 먹고 고단하게 걸어온 서북능선과 저 멀리 귀때기청봉과 백두대간 산들의 위용을 감상했다.
벼르고 벼렸던 공룡능선은 또 다음번으로 미루니 마음에 여유가 생겼고 걸음이 느려졌다. 역시 나는 느림의 미학에 한 표 던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