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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설악산 야간 등산 (2) 얼음 덮힌 한계령

by 신피질

한계령에서 중청으로 이어지는 서북 능선은 한계령 해발 1,000미터 고지에서 중청 해발 1, 700미터까지로 고도차가 약 700미터가 되지 않고 거리상으로 약 8 키로 정도 된다.


그래서 대청봉에서 바라보거나 산악 지도에서 보면 평지에 가까운 능선길처럼 보여 마치 평지인 양재천에서 산책하는 것처럼 아주 쉽게 생각을 했다.


나무가 있는 푸른 능선길이 완만하게 이어지고 흙길이나 오솔길처럼 쉬운 산책 길처럼 여겨져 빠르게 걸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한계령 코스.png



오색에서 대청봉까지 오 킬로를 숨을 헐떡거리며 지속적으로 가파르게 네 시간을 오르는 길에 비하면 마치 명상을 하듯 호흡을 통제하며 차분하게 화두를 생각할 정도로 가벼운 산행이 아닐까 생각했다.


하지만, 직접 경험하지 않으면 천 미터가 넘는 산이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것을 모른다.


가끔 들었던 양희은의 한계령 노래에서 나오는 부드러운 서정의 한계령이 아니라 인간의 한계를 시험하는 한계령 코스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끝없이 오르막이 있는 돌계단과 인공 계단 그리고 내리막 길의 반복이다.


오색 능선 오르막의 고단하기는 같은데 길이가 훨씬 더 긴 코스다. 수학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는다. 자주 가는 관악산과 청계산도 약 600 미터 높이이니 고도차로 보면 약 100 미터 차이 밖에 나지 않는데 열 배나 더 힘들다.


산악회 버스에서 거의 잠을 자지 못해서 더 피곤한지 모르겠다.


유명한 뇌과학자가 잠을 적게 자면 뇌졸중에 걸릴 확률이 높고, 깊은 수면이 우리 생체 리듬에 필수 불가결하다는 말을 들어서인지 무척 피곤한 느낌이다.

한 발 한 발 내딛는 것이 참아야 할 정도로 힘든 정도가 강하다.


관악산을 오를 때는 싱그러운 소나무, 멋지게 다듬어진 바위, 겨울의 온건한 햇빛에 대기의 정령이 춤을 추듯 맑고 청량한 기운을 주어 허벅지 압박감마저 쾌감이다.


하지만, 이곳 설악산 서북능선길은 정신을 온통 집중시키며 위험천만하게, 생긴 뾰쪽뾰쪽한 돌계단을 희미한 랜턴 빛에 의존해서 안간힘을 써서 올라서야 하는 고통의 시간이다.


고통과 행복은 반비례가 아닌 정비례한다고 누군가에게 떠들었던 내가 무색할 뿐이다.

이 고통이 행복인가?


그러다 힘에 부쳐 가끔 양 옆과 조금 앞 쪽을 쳐다보면 랜턴 불 빛에 하얗게 비친 기괴한 나무가 유령처럼 나를 덮치듯 다가온다.


조금 더 가니 바닥은 눈과 얼음으로 꽁꽁 얼어붙어 미끄럽다.


며칠 전 꽃노래를 부르며 햇빛에 부드럽게 데워진 바위에서 맨발산행을 하며 기분 좋은 감촉을 느꼈던 관악산에 비하면 이곳은 눈 덮인 북극이다.


관악은 산기슭 저편 응달 진 곳에 겨울을 아쉬워한 듯 덜 녹은 눈이 흔적처럼 조금 남아 있지만, 이곳은 온통 눈으로 덮여 있다. 비록 나뭇가지에 눈은 남아 있지 않은 듯 하지만 등산로와 랜턴 불빛에 비추는 등산로 옆 산기슭은 눈이 아직 많이 쌓여 있다.


결국 아이젠을 했다.


사람들이 밟고 굳어진 등산로 길은 흔적이 남아 있다.


눈이 쌓이지 않고 흔적을 드러낸 바위들도 등산화에 자주 밟혀 서 피부가 벗겨져 하얗게 표식이 있다. 길을 잘 못 들면 본능적으로 인간의 흔적이 없음을 알게 된다.



밤중에 홀로 깊은 산 길을 잘 못 갈 경우 발생할 수 있는 온갖 두려움으로 신경이 곤두서서 등산 전 전두엽에 올려놓은 나도 없고 세상도 없다는 화두를 생각조차 하지 못한다.


서너 번 길을 잘못 들기도 했지만 금방 돌아와서 인간의 흔적을 찾기 위해 고개를 숙여 랜턴 빛을 등산로에 비추고 탐색해서 길을 찾는다.


세상은 동영상이 아닌 정지 화상이고 한 화면 화면이 완벽하니 순간을 완성으로 보자고 생각했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순간순간이 결승점이고 이미 완성된 상태이니 더 이상 무언가를 이루겠다고 하는 것이 어리석은 인간의 착각이라고 단정하며 다르게 실천하기로 했다.


그래서 더 이상 삶에서 요구하지 않고 희망하지 않겠다고 자주 결심한다. 하지만 매번 망각하고 다시 원점으로 회귀했다.


남들이 만든 성공 기준이 아닌 나만의 성공 기준을 만들었다고 스스로에게 떠 벌렸다.


내가 나에게 준 성공의 관점을 보면 대청봉을 정복하고 공룡능선을 정복하는 것이 성공이 아닌 지금 현재 등산을 하고 있는 이 순간이 성공이다.


한 발 한 발이 정상이니 한 발 한 발로 이미 최고의 정점에 도달했으니 지금 이 순간 존재의 완성, 세상의 완성을 느껴야 한다고 내면으로 소리쳤다.


하지만 내 육체는 힘들어한다. 육체가 고단하니 생각이 마음을 통제하지 못한다. 각오와는 달리 어둡고 험난한 길을, 끝없이 펼쳐지는 고통의 길을 인내하며 목적지를 향해 가는 것이다. 그 목적의 끝이 결국 죽음이지만 말이다.


달려가면 결국 죽는데 달려갈 수밖에 없는 죽음의 기차처럼 내 몸의 시스템이 습관처럼 작동하는 것이다.


지난 사오 년을 새벽마다 명상하고 끝없이 호흡을 관찰해도 순간순간 완성을 온몸으로 체험하는 프로는커녕, 미숙한 아마추어 나부랭이고 노인의 문턱에 들어선, 육신이 허약하고 정신이 나약한 초보 등산가일 뿐이다.


휴게소에서 만났던 그 날렵하게 보이는 젊은이는 정지 화상이니 명상이니 잘 몰라도, 죽자 살자 서북능선을 넘지 않고, 바람처럼 대청봉을 올라가고, 어렵다는 공룡능선을 오늘 완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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