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동이 튼다.
동쪽 하늘이 서서히 양탄자처럼 주황색을 띠우고 황제가 출현할 것이니 미리 준비하라고 신호를 보낸다.
나도 천왕봉에서 황제를 알현하기 위해 허벅지에게 강하게 명령한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정상에서 찬란한 일출을 내 품에 품어야 한다.
중산리 법계사 코스에서 천왕봉에 이르는 마지막 인공 계단은 매우 가파르다. 천왕봉이 하늘의 성처럼 눈앞에 수직으로 솟아 있다.
하늘을 향해 올라가는 사다리처럼 가파른 계단 난간을 손으로 붙잡고 히말라야를 오르듯 산소를 끌어 모아 간신히 오른다.
몇 발자국 오르고 산소가 떨어지면 다시 산소를 모아서 일출을 보겠다는 일념으로 난간도 잡지 않고 거침없이 오른다.
멀리 가려면 함께 가라고 아프리카인들이 말했다고 하지만, 천왕을 보려고 혼자서 쉬지 않고 정상에 올랐다.
천왕봉 정상에는 사람들이 아직 몇 명 보이지 않는다.
새해 태양을 맞이할 마음의 준비를 충분히 확보할 정도로 빨리 올라온 셈이다.
고통은 고통이고 의무는 의무이다.
나무가 없는 산 정상은 바람의 세상이다.
정상석 근처에서 땅 위에 확고하게 발을 지지하지 않고 엉성하게 서서 사진을 찍다가 잘못하면 바람에 몸이 날려 사고를 당할 수 있다.
스마트폰만 아니라 사람도 날릴 정도로 강렬한 바람이 분다.
바람을 피해 정상 바로 밑에 내려와 평평한 바위에 자리를 틀었다.
날기 예보와는 달리 추위는 매섭다.
정상에서 일 분도 버티지 못하고 바람이 불지 않는 아래 바위로 내려와 앉았지만, 심장으로 스며드는 추위가 너무 심해서 패딩을 꺼내서 입었다.
손가락은 벌써 마비상태다. 인체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고, 혈관이 가늘어 따뜻한 피가 전달이 잘 안 되는 그곳이 맨 먼저 언다. 따라서 겨울에는 손가락 발가락 보호가 필수다.
그렇지 않으면 매서운 추위에 혹독한 고통을 당한다. 손을 따뜻하게 할 수 있는 핫팩을 가져오지 못한 것이 아쉽다.
드디어 그분이 나타났다고 모두가 소리친다.
저분이 그리스도라고, 아니 부처가 출현했다고… 매일 나타나는 기적을 오늘 처음 보듯이 경외감으로 바라본다. 모두가 자리를 잡고 그분을 카메라에 담는다.
나도 정지화상과 동영상을 번갈아 가며 스마트폰으로 위대한 출현을 담았다.
스마트폰을 멈추고 직접 눈으로 명상하듯 바라보기를 반복했다.
고개를 돌려 다른 등산객들을 보니, 모두가 이미 넋이 나갔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거대한 기적에 모두가 얼어붙어 정신 줄을 놓아 버린 것 같다.
그분은 우아하고 완벽하게 출현했다.
삼대가 덕을 쌓아야 볼 수 있다는 데, 조상님께 감사해야 한다.
빛의 속도로 8분이나 달려야 하는, 인간의 거리로 상상할 수 없는 먼 거리에 떨어져 있는데, 이상하게도 바로 앞에서 심장과 장속으로 깊게 파고 들어왔다.
내가 황제를 알현한 것이 아니고, 황제가 갑자기 품속으로 아리듯이 파고 들어왔고 속절없이 나를 내놓을 수밖에 없었다.
바람이 거세게 부는 정상에 서서 삼십 분이상을 반복적으로 무슨 말을 계속하는 사람이 있다.
국립공원 관리하는 사십 대 정도의 머리가 크고 뼈가 굵어 보이는 사람이다.
스마트폰 거치대를 들고 정상석을 지속 적으로 찍으면서 말을 한다. 장관님과 관장님이 이곳 천왕봉에서 일출을 보시기를 꼭 요청합니다 라는 내용의 메시지를 반복적으로 한다.
그이는 모자도 쓰지 않고, 손에 장갑도 켜지 않았다. 바람도 피하지 않고 정성에서 계속 똑같은 소리를 하며 정상석에서 기념 촬영하는 사람들 사이사이 같은 촬영을 계속한다.
나도 그이에게 촬영을 부탁했다. 그는 싫은 내색 없이 맨손으로 촬영을 한다. 나는 뼈가 가늘고 손과 발이 약해서 추위가 오면 특히 손이 쉽게 차지고 굳어진다.
장갑을 켜도 너무 손가락이 떨어질 정도 아픈데, 장갑을 켜지 않고서 정상에서 계속 있는 데 북극의 야생 인간처럼 느껴진다.
수십 년 지리산 혹한에서 단련한 고수 같다.
아니면 가족의 생계 앞에서 강인해지는 가장의 책임감인지 모른다.
추워도 너무 춥다.
콧등 부위에 생채기가 생겨 피가 조금 묻었다. 너무 추운 나머지 안경을 쓰다 긁힌 것 같은데, 언제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자신을 망각하고 겨울 지리산을 얕잡아본 대가를 혹독하게 치렀다.
정상에서 사진 찍느라 조금 서 있는데 온몸이 굳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