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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악산 산책 - 암석, 삶과 죽음

by 신피질

아침 8시까지 늦잠을 자고, 게으름을 피우다,
10시를 조금 넘겨 과천시청 공용주차장에 루틴처럼 차를 대고, 이곳 관악산 능선길을 오른다.


습기가 많지만, 바람이 서늘하게 불어와 덥지 않다.
발바닥에 느껴지는 폭신폭신한 낙엽의 사체가 부드럽다.

지난겨울과 봄을 지나며 눈과 얼음, 햇빛, 바람, 흙, 먼지… 수많은 작용으로 땅에 동화되어 가는 부드러움에 발바닥이 환호한다.


산 초입에는 생활의 찌꺼기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내 감정의 골에서 작은 악취들이 피어난다.

아직도 뭔가를 일으키려는 삶의 기대와 하찮은 욕망이 저 밑바닥에서 꽈리를 틀고 도사리고 있다가 머리를 들어 밀며, 뭔가 제대로 실천하지 못한 두려움과 나약한 나의 태도를 질책한다.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어야 할 연륜과 경험이 무색할 만큼, 아직도 지인들이나, 혹은 먼발치에서 한두 번 마주친 인연에게조차 구조해 주길 바라는 기대심리가 일어난다.

자꾸 사람들과 연락을 미루고, 새로운 만남을 주저하며 망설이는 나약한 근성에 대한 자책도 포함된다.


완벽한 평화와 자유는 영원히 얻을 수 없는 것인가?


이곳 과천 관악산 능선길은 바닥이 깨끗하다.

관악산 기반이 화강암이다 보니, 수천 년 동안 풍화작용으로 암석이 잘게 부서져 모래가 되고, 다시 흙이 된다. 그래서 바닥은 작은 자갈과 암석, 입자가 고운 모래 같은 흙이 많아 정갈하다.

화강암 바위를 자세히 보면, 마치 지구상의 모든 색이 다 들어 있는 듯 색의 스펙트럼이 넓다.
바위 표면에 무정형의 무늬들이 밤하늘의 별처럼 다양하다.


관악산1.png


정밀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면 어떨까 싶을 만큼, 그 추상의 세계는 깊고도 깊다.


나는 암석에 대해 잘 모르지만,
암석에는 세월의 무게와 지구 생성의 근원이 담겨 있는 듯하다.

지구의 핵을 구성하는 철의 성분과 니켈의 희고 단단한 색, 지구 멘틀의 불덩어리와 마그마 분출의 흔적까지 모두 품고 있을 것이다.


사실 지구는 거대한 불덩어리다.

그 대부분은 45억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식지 않았고,
우주의 차가운 온도에 겉표면인 지각만이 식어버린 상태다.


그리고 불덩어리가 식은 얇은 지각 위에 운 좋게 생명이 살고 있다.

생각해 보면 우리는 불덩어리의 후예다.

지각은 식은 불덩어리고, 그 지각의 일부 세포가 진화해서 지금 우리로 이어졌으니 말이다.


모든 죽은 이파리는 갈색을 띤다.
쇠도 녹이 슬면 갈색이고, 철 성분을 머금은 화강암도 일부분은 갈색을 띤다.

갈색은 죽음의 색일까? 하지만, 갈색은 진짜 죽음의 색은 아닌 듯하다.

갈색은 새로운 생명을 잉태하기 위한 준비 과정처럼 느껴진다.


맨발 걷기에 좋은 흙, 황토도 갈색이다.
황토는 낙엽이 썩어 우러난 비옥한 땅이다.

그곳에서는 언제든 새로운 생명이 탄생할 것만 같다.


지난 늦가을, 때아닌 폭설로 전국의 소나무들이 수없이 쓰러졌다.
습기를 머금은 눈송이들이 늦가을에도 여전하게 푸른 소나무 잎에 쌓이며 계속 무게를 더했고,
결국 그 무게를 견디지 못한 수많은 나무들이 쓰러져 죽었다.

살아남은 나무들도 여전히 부러진 가지와, 죽은 갈색 솔잎을 매달고 있다.


능선 아래를 내려다보니, 군데군데 하늘의 눈폭격을 맞은 나무들이 쓰러져 있고, 신경이 끊어진 가지들이 대롱대롱 매달린 채 갈색 이파리를 떨구지 못하고 있다.

가지가 무성해, 이파리가 많은 나무일수록 피해가 컸다.

전쟁터에서도 건장하고 패기 있는 젊은 병사들이 가장 먼저 적의 포격에 쓰러지듯.

관악산2.png


하늘의 일은 도무지 사람이 알 수가 없다.

가장 건강해 백 년은 거뜬할 것 같았던 선배, 동기, 후배가 암으로, 폐혈관 문제로 쓰러져간다.


진짜 죽음의 색은 검은색이다.
이 글씨체도 검은색이다.

검은색은 삶의 휴식이다. 밤의 색이다.
깜깜한 밤이 없는 삶은, 평온이 없는 지옥 같은 삶일 것이다.

그래도 검정은 암흑의 색이고, 빛이 사라진 세계이며, 생명이 꺼진 죽음의 세계다.


그렇다면 생명은 축복일까, 고통일까?
축복이라면 죽음은 재앙이고, 고통이라면 죽음은 평온이다.

검은색은 죽음과 두려움의 세계를 표현하지만, 동시에 고통이 사라진 평온의 세계이기도 하다.
어둠은 두렵지만, 그 너머엔 휴식과 평화의 세계가 숨어 있다.

두려움이 환상이고, 본질이 평화라면—우리는 환상인 죽음을 오히려 환영해야 하는 것 아닐까?


관악산 연주대 근처, 윤기 나는 짙은 검은색의 나선형 구조를 뽐내며 까마귀 한 마리가 짙은 공기를 날카롭게 가르며 활공한다.


나는 관악산 정상 바위 위에 앉아 있다.

사방팔방 수증기가 가득 차 있어 저 멀리 북한산은 보이지 않고, 남산만이 희미하게 보인다.
하늘도, 구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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