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번 버스를 타고 1코스 시작점인 시흥리에 도착했다.
1코스는 버스정류장에서 50미터 지점에서 시작했다. 현무암 돌담이 가지런히 옆으로 길을 호위했다. 날씨는 흐렸지만 기온은 따뜻해서 걷기가 편했다.
신발을 벗고 맨발로 걸었다. 아니 다시 신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둘레길 시작은 작은 자갈과 시멘트가 함께 섞여서 굳어진 딱딱한 길이다. 시멘트와 딱딱한 돌 때문에 내 발이 벌써 힘들어한다.
바로 앞에 경사가 급격한 바위가 있는 오름(제주에서 화산 활동으로 형성된 산)이 보이고, 검은흙 밭, 검은 용암으로 만들어진 구불구불한 돌담, 다양한 풀과 꽃이 어우러져, 신선한 이국적 풍경을 만들고 평화와 기쁨을 준다.
검은흙과 검은 돌담은 제주에서 만 볼 수 있어 갑자기 감각 세계가 활발하게 움직인다.
말미오름
1코스 조금 지나면 오름이 나온다. 평생 처음으로 제조 오름에 오른다.
오름에는 윤기 있는 건강한 소나무로 가득하다. 솔 꽃이 위로 자라 크리스마스트리를 장식한 듯하다. 오름 정상에 오르니 저 멀리 성산 일출봉이 보이고 제주 서남쪽이 넓은 치마폭처럼 짙은 녹음을 펼치고, 그 위로 오름이 불쑥불쑥 쏟아 있다.
말미 오름을 내려오니 억새가 파도처럼 물결친다.
하늘에는 종달새가 노래하고 들판에는 노란 유채꽃이 피어 있다. 산과 들판의 길 위에 있는 흙과 풀을 맨 발로 밟으니 대지의 정령이 발바닥 세포 사이로 스며드는 듯하다.
제주의 젊고 발랄한 봄의 정령이 발바닥을 통해서 심장으로 올라온다.
자연이 온몸에 가득 차니 사랑과 평화의 기운이 내 전신을 휘감는다. 친구의 글처럼 모처럼 사랑만 안고 걸어가는 기분이 든다.
동백꽃이 즐비한 돌담길을 지나고, 예쁘게 꾸며 놓은 작은 카페가 나타나고, 연이어 사철나무 우거진 작은 숲길을 걷는다.
마을 사거리를 지나는데 유리 파편이 있다. 맨발에 유리 파편은 지뢰밭을 가는 것과 같다. 징검다리 건너듯 조심스럽게 한 발 한 발 서서히 딛고 그곳을 빠져나온다.
아스팔트길과 울퉁불퉁한 시멘트 길을 한참이나 걸어서 발바닥에 불이 난 것처럼 따끔거리지만, 맨발로 걷겠다고 각오를 했으니, 힘들지만 참고 천천히 걷는다.
종달리 마을
종달리 마을 정자에서 잠시 쉰다.
조선 선조 때 육지에 가서 소금 생산하는 법을 배워서 이곳에서 소금을 생산했다고 한다. 종달리 해안도로를 따라 성산 일출봉 근처까지 아스팔트 시멘트 길을 두 시간 맨발로 걸었다.
제주의 바다는 보기만 해도 가슴이 열린다.
앞쪽에 성산 일출봉을 마주 보고, 왼쪽으로는 넓은 바다와 그 끝에 있는 우도를 바라보며 종달리 해안도로를 터벅터벅 생각 없이 걷는다.
우도는 마치 거대한 검은 고래가 태평양을 향하여 헤엄을 치는 듯한 모습이다.
해안도로는 변화가 적고 눈앞에 걸리는 것이 없어 산길이나 마을길에 비해 다소 지루하다. 가끔씩 나타나는 해녀상과 해풍에 건조되는 오징어를 보며, 단조로운 지루함을 달랜다. 오징어가 침샘을 자극한 듯, 갑자기 허기가 인다.
한참을 걷다 보니 발바닥 상태가 이상하다. 바늘로 찌르는 듯 아파서 자세히 보니 물집 조짐이 보인다. 약간 딱딱한 바닥을 밟아도 아프다.
아픔을 참아가며 성산 일출봉을 올랐다. 이곳 바닥은 현무암을 정밀하게 다듬어서 덜 아프다. 딱딱한 시멘트길의 고통에서 잠시 해방되었지만, 물집 잡힌 발바닥 통증은 그래도 참아야 한다.
이곳은 관광객이 항상 붐빈다. 1코스 내내 혼자 걸었는데 드디어 사람들 틈에서 걷는다.
아침 내내 사람이 전혀 없는 고독한 길을 걷다가, 밝은 차림의 옷들을 입은 사람들이 가득한 이곳에 오니, 생기가 일어난다.
배고픔과 발바닥 아픔 속에 잘 정돈된 현무암 길, 부드러운 해안선과 푸른 초원이 기운을 북돋는다.
해는 높이 떠있고 바람이 많지 않아 몸에 열기가 후끈거린다.
성산일출봉
성산은 장엄하다. 온몸이 공중에서 낙하한 듯 저 멀리 아득하게 분화구가 보인다. 사람들 틈에서 사진을 찍었다.
성산 일출봉은 육지 끝에서 몸부림을 치며 높게 솟구쳐 기개를 뽐낸다.
성산 일출봉을 내려와 발을 질질 끌고 식당에 들어가 순두부를 시켰다. 지금까지 맞 본 순두부 중 최고로 맛있다.
역시 배고픔과 갈증은 최고의 음식을 만든다.
일출봉을 내려와서 주차장을 지나서 광치기 해안을 찾아가는 길은 올레길 리본 표시를 잘 찾아봐야 한다. 마치 숨은 길 찾기 하듯 자주 멈춰 찾았다.
광치기 해안
광치기 해변은 성산 일출봉 서쪽에 있다. 27년 전 신혼여행 때 그곳 해안에서 작은 돌게와 조개 등 갯벌에 있는 해산물을 잡으려고 했던 기억이 있다.
광치기 해안에서 삶의 현장을 목격했다. 수십 명 남녀 인부들이 바다 갯벌 안쪽에서 바다 톱을 딴 후 길가 트럭이 있는 곳까지 계속 옮기고 있었다. 마치 소금 자루를 옮기듯이 등 허리에 포대를 매고 바위 길 갯벌을 한참 걸어서 옮긴다.
해변을 서서히 걸어 1코스 종점에 도착했다. 근처 좌판에서 귤을 사서 먹었다. 양이 많아 절반은 먹고 절반은 좌판 할머니께 다시 갔다 드렸다.
신발을 다시 신었다. 발바닥 통증이 사라질 때까지 아스팔트는 신발을 신어야겠다.
지난 1년간 집 근처 구룡산에서 매일 2시간 맨발로 걸어 발바닥이 충분히 단련되었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이 아니었다. 오늘 아스팔트 도로 및 시멘트 길을 겨우 다섯 시간 걷고 발바닥에 물집이 잡혔다.
자연이 아닌 인간이 만든 인공의 길은 쉽게 적응할 수 없나 보다.
성산으로 다시 돌아와 근처 게스트 하우스에서 잠을 잤다. 게스트 하우스는 깨끗했다. 게스트 하우스 사장은 젊은 여성이다. 제주도가 좋아 이곳에 왔고, 게스트 하우스를 운영한다고 한다.
내 생각으로는 성산 일출 봉 만으로 이곳이 관광지로 크게 성장하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성산 일출봉 관광은 왕복 두 시간이면 충분하다. 그곳에 오래 머무르게 할 수 있는 뭔가 복합단지나 관광객을 유인할 수 있는 문화 콘텐츠가 필요할 듯싶다.
하루 종일 걸어 힘든 육체의 회복을 위해서 잠을 충분히 잤다.
잠결에 발바닥이 불나는 것을 느꼈지만 깊게 잠을 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