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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맨발 걷다. 2코스, 다양한 모습

by 신피질

2코스 시작점인 광치기 해변에 다시 왔다.


제주는 다양하다. 코스별 다양함이 마치 귀를 보고 다음에 눈을 보고 다시 입을 보는 것 같다.

우도가 굴곡진 귀라면, 2코스 초입은 검은 눈을 보는 것 같다.


호수처럼 작은 바다 사이에 있는 제방을 따라 걷는다. 양쪽에 바다를 두고 그 사이 가운데 솟아 있는 제방을 따라 걸어가면 기분이 우쭐해진다.


아무도 없는 제방 둑을 혼자 걸으면 마치 연극 무대의 주인공처럼 도도한 기분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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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방둑길


하루 한 코스만 걷자고 생각했지만 우도에서 나오니 오후 세시 밖에 지나지 않아, 숙소에 들어가기 너무 일렀다. 결국 계획을 바꾸어, 결국 2코스로 접어들었다.


2코스 초입은 색다른 변화가 있다. 성산일출봉을 뒤로하고 길은 계속 지그재그 움직인다. 바닥을 나무 계단으로 만든 작은 숲길이 나오고 작은 잔디가 가득 자란 길도 나온다.



삼십 분 정도 걷자 올레 리본은 작은 오름으로 안내한다. 저녁 시간까지 아직 여유가 있는데 행여 깊은 산속으로 계속 들어가서 숙소를 찾지 못할까 걱정이 된다. 걱정 때문에 몸도 피로를 조금씩 느끼기 시작하는 듯 다리가 무겁다.


이번 여행은 피로보다 즐거움을 우선하자고 했건만, 벌써 그 다짐이 흐려지고, 육체가 피곤을 느끼기 시작한다.

한편으로 생각하면, 아직 건강한 체격인데, 지나치게 걱정을 하지 않나 하는 생각도 일어난다.


70세 나이에 전국 해안가 삼천 킬로를 도보로 완주한 여행가 황안나 씨는 숙소를 찾지 못하면 밤새 걸었다고 했다.

아직은 그렇게 늙지 않은 이 나이에 너무 걱정이 앞서는 건 아닐까, 스스로에게 묻는다.



일단 산으로 들어갔다. 심성산이다. 올라간 지 몇 분도 지나지 않아 최고의 숲에 왔다고 몸이 반응한다.

숲의 청량함에 스웨터를 입었고, 숲과 하나가 되려고 발바닥 물집 때문에 신었던 신발을 벗고 맨발이 되었다. 아니 숲이 그렇게 유혹했다. 내 숲은 맨발로 느껴야만 한다고.


드디어 발이 해방되었다. 발바닥에 약간의 통증은 있지만 가득히 쌓인 솔잎과 활엽수 낙엽, 빨간 동백꽃 잎이 쌓인 숲길은 치유의 감각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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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은 밀림의 원시림 같이 깊고 그윽했다.


높게 자란 소나무와 비엔나 숲에서 봤던 키 큰 활엽수들이 어울려 피톤치드를 최대 용량으로 뿜어낸다.


식산봉은 높이가 40 미터의 낮은 오름이지만 염습지 식물인 황초의 최대 군락지이고 성산 10대 경관 중 하나라고 한다.




어젯밤 오조리 홍 할머니 댁에서 민박을 했다.


할머니는 귀가 잘 들리지 않아 여러 번 크게 말해야 겨우 알아듣는다. 방은 깔끔했다. 할머니는 TV를 크게 켜 놓고 주무신다. 적적함 때문에 TV에 의존하고 귀가 잘 들리지 않으니 소리를 크게 틀었다.

TV 소리에 잠을 잘 수 없어 주무시는 할머니 방에 들어가서 TV를 끄고 잠을 잤다.



오조리 마을 입구에는 용천수 족지물이라는 곳이 있다.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 작은 우물과 같은 노천 목욕탕 인 데, 절반을 나누어, 위쪽은 여자 탕, 아래쪽은 남자 탕으로 사용했다고 한다.


족지물 위에는 동백나무가 군락을 이루고 있고, 붉은 동백꽃이 가득 피어 있어 핑크 빛 장관을 이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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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천수 족지물 노촌 목욕탕


남녀가 같이 어울릴 수 있는 곳이니 과거 수많은 동네 처녀 총각이 사랑을 나누었을 듯싶다. 사랑이 자연스레 싹트기에 충분한 무대처럼 느껴진다.


동네 마을 회관 근처에 식물원 같은 아담한 집이 있다. 마치 하늘의 천사가 내려와 작은 집을 짓고 정원을 가꾼 듯이 두 칸 자리 집 마당에 잘 가꾼 나무와 꽃이 가득했다. 집 입구는 두 그루의 수령이 오래된 느티나무가 입구를 양쪽으로 호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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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과 정원수가 많은 아담한 집


아침 7시에 숙소를 나섰다.


오조리 마을을 벗어나서 잡목과 야생지가 있는 호젓한 길을 걷는다.

이른 아침 대지는 아직 잠을 깨지 않았다.

길옆에서 갑자기 후드득 새가 놀래며 날아간다.


꿩이다. 저도 놀래고 나도 놀랜다. 저 새는 항상 놀래며 난다. 다시 신발을 벗었다.

대지의 풀은 온통 이슬을 품고 있어 웅덩이를 걷는 것처럼 발을 흠뻑 적신다.


올레 2코스는 호수를 끼고 계속 돈다.

호수 사이사이 현무암 암반을 징검다리 삼아 걷는 재미가 있고 해오라기와 작은 야생 오리 떼가 호수를 가로지르며 날아가는 그림 같은 풍광에 감탄한다.


저 멀리 성산 일출봉에는 해가 이미 떠올라 호수를 비췄고 호수에는 또 다른 해가 찬연히 빛난다.

그 햇빛이 더 빛나서 호수에 금빛 무늬가 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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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에 비치는 햇빛, 뒤편의 성산 일출봉


호수가 끝나고 고성리를 지났다. 고성리는 매우 큰 시가지를 형성하고 있다.


인간의 걱정은 십중팔구 기우이다. 우리의 DNA는 위험을 피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그래서 DNA 지시를 따르면 인생은 권태다.


행여 산속을 오늘 중으로 벗어나지 못할까 걱정되어 어제 작은 마을에 숙소를 잡았는데 채 반 시간도 지나지 않아 벌써 작은 도시가 있다.


이른 아침 시가지는 조용하다.

아침 새소리는 더욱 요란하게 들린다. 아침은 새들의 세상이다.


도시 외곽에 집집마다 작은 귤 텃밭이 보인다.

텃밭 옆 작은 무인 가판대에서 한라봉을 사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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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코스 막바지인 대수산봉 오름에 올랐다.

오름은 경사가 심하다. 정상이 100여 미터로 높지 않지만 경사가 심해 숨 가쁘게 올랐다. 자연은 노력한 만큼 보상한다.


대수산봉 정상은 인근에서 가장 높이 솟아 있다.

정상에 오르면 사방 전망이 눈앞에 펼쳐진다.


정상에서 한 바퀴를 천천히 돌면 앞쪽 성산 일출봉, 우측 낚시 바늘 모양의 섭지코지, 왼쪽 태평양을 횡단하려는 듯 거칠게 헤엄치는 고래 모습의 우도,

뒤쪽에 코끼리를 삼키고 긴 꼬리를 펼친 보아 뱀 모습의 한라산이 눈에 가득히 들어온다.


한라산과 내 발 사이에는 밭, 나무, 마을, 오름이 초록의 싱싱함으로 가득한 중간지대가 펼쳐진다.


두 팔을 번쩍 들고 온몸의 공간을 최대한 늘리자 제주의 신선한 공기와 온화한 햇살이 내 몸을 통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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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수산봉 정상에서 본 한라산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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