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 관계는 나를 소모시키는 것이 아니라, 나를 순환시키는 힘이다.
퇴사 후 혼자 일하기 시작했을 때,
가장 먼저 사라진 건 사람의 소음이었다.
회의실의 긴장감, 커피머신 옆의 잡담,
눈치를 읽으며 이어가던 대화들.
돌이켜보면 그건 대화라기보다 연극에 가까웠다.
직장은 무대였고 우리는 배역에 맞춰 움직이는 배우였다.
감정이 아니라 역할로 묶인 관계였다.
그래서 회사를 떠나는 순간,
그 관계들은 자연스럽게 흐릿해진다.
연락하기도, 받기도 애매해진다.
배역이 끝나면, 극도 끝나기 때문이다.
나는 그 안에서 ‘잘 지내는 법’은 익숙했지만
그 안에서 자라나는 법은 알지 못했다.
직장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대부분 같은 구조에서 비슷한 시야로 세상을 본다.
그 울타리를 벗어난 사고를 하기는 쉽지 않다.
그래서 그들이 건네는 조언도, 시선도
늘 그 세계의 결 안에서 움직였다.
회사를 떠나고 보니, 진짜 문제는 ‘사람’이 아니라
내 안에 남아 있던 구조였다.
스스로 판단해야 하는 순간이 와도
오랫동안 길들여진 회사식 사고 프레임은 쉽게 벗겨지지 않았다.
내가 만나던 사람들, 듣던 관점도
결국 그 세계에서 흘러나온 것들이었다.
그때 깨달았다.
사람은 결국 관계라는 울타리 안에서 사고한다.
그리고 그 울타리의 크기가
내가 볼 수 있는 세상의 폭을 결정한다.
관계의 우물이 곧 나의 시야였다.
전략적으로 보면 관계는 ‘좋다/싫다’의 문제가 아니다.
사람 사이에 오가는 정보·자극·기준·관점의 흐름이다.
누구와 이야기하느냐에 따라
내 사고의 방향과 깊이가 달라진다.
때론 데이터보다
한 사람의 시각이
내 인생의 궤도를 바꿔놓기도 한다.
직장 관계가 고단했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 흐름은 한쪽으로만 향했다.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기준
비슷한 사고방식의 집합
선택할 수 없는 관계
의견은 위로 가지 않고,
감정만 아래로 떨어졌다.
퇴사 후 나는
관계를 설계하는 게 결국 삶을 설계하는 일이라는 걸 알게 됐다.
전략은 데이터에서 나오지만
사람의 대부분의 판단은 관계에서 나온다.
늘 같은 배경의 사람들과만 대화하면
확증편향은 자연스럽게 자란다.
반대로 전혀 다른 세계를 살아온 사람과 만나는 순간
내 사고는 다시 살아난다.
구조는 사고를 만들고, 사고는 판단을 만든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믿는다.
관계의 폭이 곧 시야의 폭이다.
관점이 늘어나면
판단은 깊어지고 선택은 유연해진다.
가끔은 누군가의 한 문장이
내 사고의 방향을 바꿔놓기도 한다.
내게 남아 있는 것도 결국 그런 순간들이었다.
한 네트워크에 오래 머무르면
기준이 틀어지기 쉽다.
사고가 한 방향으로 굳어지기 때문이다.
반대로 다른 결의 사람들과 연결되면
생각은 다시 흐르기 시작한다.
관계의 다양성은 사고의 보험이다.
하지만 관점의 수가 늘어나는 것이
곧 사고 확장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확장을 돕는 말도 있고,
그저 피로만 쌓이게 하는 말도 있다.
그래서 중요한 건 하나다.
다양한 시각을 들이되,
어디에 초점을 둘진 내가 선택해야 한다.
모든 사람과 깊게 엮일 필요는 없다.
관계는 인맥 관리가 아니라 포트폴리오 배치에 가깝다.
나는 내 관계를 두 구역으로 나눈다.
1. Execution Zone — 실행의 관계
: 신뢰와 반복을 통해 생산성을 높여주는 사람들
2. Exploration Zone — 탐색의 관계
: 나를 불편하게 만들지만 사고를 확장시켜 주는 사람들
탐색의 관계는 편하지 않다.
하지만 성장하는 사람들은
이 불편함을 회피하지 않고 활용한다.
두 영역이 균형을 잡는 순간
사람의 성장 속도는 가속된다.
관계의 균형은 일종의 사람 간 Load Balancing이다.
관계는
‘누가 주고 누가 받는가’의 문제가 아니다.
에너지가 오가는 구조다.
한쪽으로만 흐르면 고갈된다.
적절히 주고받을 때 시스템은 살아난다.
거리도 마찬가지다.
너무 가까우면 시야가 좁아지고,
너무 멀면 연결이 끊긴다.
건강한 관계는
적당한 거리, 적당한 흐름, 적당한 순환 속에서 유지된다.
관계를 정원에 비유하는 이유는
그 안에 관리·선택·제거·회복이 모두 있기 때문이다.
정원에는 세 부류가 있다.
거름이 되는 사람 — 나를 자극하고 확장시키는 관계
그늘이 되어주는 사람 — 나를 버티게 해주는 관계
잡초 같은 사람 — 에너지를 갉아먹지만, 제거해야 토양이 건강해진다
중요한 건
잡초도, 상처도, 불편함도
결국은 토양을 다시 섞는 힘이 된다.
하지만 모든 관계가 건강한 토양을 만들지는 않는다.
부정적인 언어와 시야에 오래 노출되면
내 사고의 색깔까지 흐려진다.
그래서 나는 관계를
‘좋고 나쁜 사람’으로 나누지 않는다.
환경 설계의 문제로 본다.
먼저 바뀌어야 할 건 언제나 나 자신이다.
내 시야가 바뀌면
내 옆에 남는 사람의 결도 자연스럽게 바뀐다.
퇴사 후 혼자가 되어 알았다.
관계는 나를 묶는 것이 아니라
다음 스테이지로 옮겨주는 통로다.
지금 나는 내 정원을 다시 설계하는 중이다.
물 주고, 가지치기하고, 뽑아낼 건 뽑아내고.
언젠가 이 정원에서 피어난 관계들이
나를 또 다른 무대로 옮겨줄 것이다.
성장은 혼자 이뤄지는 듯하지만,
실제로는 사람들 사이의 틈에서 자란다.
결국 나를 키우는 건,
사람 자체가 아니라 관계라는 생태계다.
생태계를 설계하는 순간,
인생은 다시 순환을 시작한다.
당신의 정원은 지금 어떤가.
잡초는 뽑았는가?
물은 주고 있는가?
꽃은 가꾸는 사람의 정원에서만 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