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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다리에서 무대로: 커리어를 다시 정의하는 법

5-7. 커리어는 오르는 것이 아니라, 무대를 옮기는 일이다

by 일이사구

사회 초년생 시절, 친구들과의 대화는 늘 비슷했다.


“어디 다녀?”, “연봉은 얼마야?”, “복지는 어때?”


나이가 들면서 질문은 조금 달라졌지만, 결국 묻는 본질은 같았다.


“요즘 회사는 어때?”, “언제까지 버틸 수 있겠어?”,

“노후는?”, “집은?”, “투자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속으론 늘 피로했다.


근황 토크가 끝나면 이어지는 이야기는

옛 직장 이야기, 오래된 추억 이야기뿐이었다.


그마저도 어느 순간, 나를 더는 붙잡아두지 못했다.

흥미도, 의미도 사라졌다.


대화의 끝엔 늘 보이지 않는 경쟁이 있었다.


누가 더 오래 버티는가.

누가 더 위에 있는가.


우리는 모두 사다리를 오르고 있었다.

마치 항아리 속에서 서로를 밟고 올라가려는 게들처럼.


경쟁은 이 세계의 기본값이다.

직장은 늘 비교 위에 돌아간다.


다음 승진, 더 큰 프로젝트, 더 높은 연봉.

나는 그게 커리어라 믿었다.


공부하고, 맞추고, 내 시간을 갈아 넣으며 버텼다.

약을 털어 넣으며 버틴 날도 많았다.


그러다 어느 순간, 질문이 떠올랐다.


“이 사다리의 꼭대기에는 뭐가 있을까?”


임원이 되거나, 아니면 기다리는 건 임금피크제와 정년퇴직.


여러 회사를 다녔지만

정년퇴직을 ‘끝까지 해낸 사람’을 본 건 딱 두 번 뿐이었다.


강당 한가득 박수가 터지던 그 순간.

나도 모르게 감탄이 나왔다.


“아… 이게 정말 가능한 일이구나.”


하지만 돌아서면,

끝까지 버틴 사람이 이렇게도 드물다는 현실이 남았다.


그래서 더 씁쓸했다.


“난 버틸 수 있을까?

아니… 이게 정말 내가 바라던 삶이었나?”


배부른 소리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때 처음으로,


‘오른다’는 말의 무게가 버거워졌다.


그건 성장이라기보다 소모에 더 가까웠다.


직장 밖의 세계는 더 넓지만, 더 치열하다.

그 경쟁은 다른 얼굴로 되돌아온다. 생계라는 이름으로.


쉬어도 급여가 들어오던 시절이

얼마나 귀한 안정이었는지,


대부분은 회사를 떠난 뒤에야 알게 된다.


그러나, 우리는 결국 모두

회사 밖으로 나갈 수밖에 없다.


정년까지 완주하는 사람은 드물고,

대부분은 어느 지점에서 내려오게 된다.


그래서 결국 바뀌어야 하는 건

커리어를 바라보는 각도다.


더 늦기 전에.


각도를 바꾸지 않으면

언젠가 마주할 절벽 앞에서야

비로소 알게 된다.


그리고 그 각도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바꾼다.


사다리에서 무대로

회사의 성공 방식은 늘 같았다.

‘누가 더 빨리 올라가느냐.’


요즘은 승진을 거부하고 그 자리에 머무르는 사람도 많다.

적당한 평가, 적당한 급여, 적당한 위치.


그 선택엔 이유가 있다.

관리와 책임의 부담을 피하고 싶다는 마음.


어떤 면에서는 현명해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수직 구조에서


“그 자리에 머문다”는 건 룰 밖의 언어다.


누군가의 머무름은

누군가의 기회를 막고, 승진의 흐름을 늦추고,

조직의 흐름을 미묘하게 뒤틀기도 한다.


머무르는 선택이

때론 누군가에게는 오히려 부담이 되기도 한다.


게다가 지금 같은 불안한 경제,

AI라는 거대한 전환의 시기에는 이야기가 더 달라진다.


어중간함은 가장 먼저 흔들린다.


정답은 없다.

어느 쪽이 맞고 틀린 것도 아니다.

다만 방향이 다를 뿐이다.


나 역시 한동안 사다리 위에 오래 머물렀다.

성과가 정체성이 되고, 직함이 자존심이던 시절.


그러다 문득, 다른 생각이 들었다.


세상의 무대는 하나가 아니다.


커리어는 위로 오르는 일이 아니라,

무대를 옮기는 일이다.


높이가 아니라 방향의 문제.

사다리는 올라가거나 떨어지는 것뿐이지만,

무대는 내가 만들고, 내가 설 수 있는 공간이다.


회사 안에서는 회사가 연출가였고 나는 배우였다.

이제는 내가 연출가이자 배우가 되어, 새로운 무대를 만든다.


커리어는

내가 선택한 무대에서, 나를 표현하는 일이다.


관객을 바꾸는 일

무대를 바꾸면 관객도 바뀐다.


회사에서는 상사와 조직이 관객이었다면,

이제는 독자, 고객, 그리고 나 자신이 관객이다.


예전에는 회사의 이름과 직함으로 설득했다면,

지금은 문장과 나만의 방식으로 사람을 움직인다.


IT에서 경험한 비즈니스 사이클,

경영학과 인문학, 컨설팅에서 익힌 사고법은

지금의 나에게서 글·강의·자문이라는 형태로 다시 살아난다.


수주를 위한 프레젠테이션은

이젠 다른 시각을 전하는 문장으로 바뀌었다.


도구는 바뀌었지만 본질은 같다.

세상을 설득하는 일.


단지, 방향이 달라졌을 뿐이다.


무대의 전환, 시야의 확장

사다리형 커리어의 문제는

올라갈수록 세상이 좁아진다는 것이다.


하지만 무대형 커리어는 다르다.

옮길수록 시야가 넓어진다.


나는 수직의 경쟁 대신

수평의 확장을 선택했다.


그 선택이 나를 지금의 무대로 이끌었다.


커리어는 승진이 아니라

이동의 예술이다.


익숙한 영역을 벗어나 새 공간으로 나아갈 때,

사람은 비로소 자신의 언어를 찾는다.


무대를 옮기는 순간,

시야뿐 아니라 내가 맡는 역할도 달라진다.



퇴사는 끝이 아니라 확장의 선언이다.

그건 높이의 싸움이 아니라,

각도의 실험에 더 가깝다.


나는 여전히 일하고 있다.

다만, 그 일의 무대가 달라졌을 뿐이다.


조직의 조명 아래가 아닌,

내가 켜는 빛 아래에서.


커리어는 계단이 아니라, 스포트라이트다.

위로 오를수록 밝아지는 게 아니라,

어디를 비추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세계가 열린다.


나는 그 빛의 각도를 조정하며

조금씩 나만의 길을 밝히고 있다.


우리는 누구나 언젠가

사다리의 끝을 마주하게 된다.


중요한 건

얼마나 올라갔느냐가 아니라,


내가 서고 싶은 무대를

스스로 선택했느냐의 문제다.


당신은 지금, 어떤 무대에 서고 싶은가.


그리고 그 무대는 결국,

당신이 켜는 빛 위에서만

진짜로 완성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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