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대의 내게 사랑이란
한 여자가 예쁜 실로 꼬은 줄 하나를 들고 서 있다.
어느 날 그 여자를 발견한 한 남자가 다가와 그 줄의 끝자락을 집어든다.
그러면 마침내 두 사람의 줄다리기가 시작된다.
20대의 연애는 참 종잡을 수 없다.
상대방을 경계하고 탐색하고, 주도권을 잡기 위해 밀고 당기기를 한다.
마치 네가 더 좋아해? 내가 더 좋아해? 를 가리는 게임이라도 되는 것 같다.
상대 근처에 다른 이성이라도 기웃거리면, 눈에 불을 켜고 질투를 한다.
그가 보낸 카톡 한통을 주제로 친구들과 온갖 조언과 상담을 주고받는다. 그래서 그때의 우리는 친구들의 연인에 대해 줄줄이 꿰고 있었다.
카톡 답장시간과 빈도로 상대의 마음을 짐작하기도 하고 심지어 밀당의 법칙까지 생겼다.
상대가 건넨 말 한마디는 백 마디의 무게로 내게 돌아와 세상을 핑크빛으로 물들이기도 하고 때로는 거센 폭우를 쏟아붓기도 한다.
이별은 더 가관이다.
그저 상대방의 마음이 다했음을 인정하지도, 믿지도 못한다.
그 애가 나를 얼마나 좋아했는데 한 순간에 그 감정이 변했을 리가.
분명 나를 아직 좋아하지만 어떤 이유가 있을 거야.
그것만 해결되면 마음을 돌릴 수 있을 거야.
우리에겐 너무 예쁜 추억들이 있어. 우리가 끝났을 리 없어.
그러면서 '떠난 사람을 돌아오게 하는 방법', '헤어진 연인에게 연락 오게 하는 법' 같은 제목의 인터넷 게시물을 클릭한다. 정답이 있을 리 없는 문제에 어떻게든 해답을 얻으려고 말이다.
끊임없이 싸우고 헤어지고 다시 만나기를 반복한다.
쟤는 도대체 왜 저럴까?
나를 좋아한다면서 어떻게 저럴 수가 있지? 날 사랑하긴 하는 건가?
상대도 제멋대로고 나도 제멋대로다.
끌리는 마음은 강렬하지만 서로가 양보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는 것, 또는 양보할 생각이 없다는 점을 깨닫지 못한다. 사랑과 현실 간의 괴리를 객관적으로 볼만큼 냉정하지 못하다. 자존심을 한껏 세우기도, 자존심을 밑바닥까지 버리기도 해 본다.
잠수이별.
나의 절절한 사랑이 상대방에게는 어떠한 마무리도 필요하지 않을 만큼 가벼웠다는 사실에 상처받는다.
시간이 지나 이런저런 연애를 겪고 나면 그것을 바라보는 관점이 달라진다.
이제 줄다리기는 상대보다 덜 상처 받기 위한 자기 방어라는 것을 안다. 줄다리기하는 동안 그에게 온전한 나를 보여줄 수 없고, 그것은 오히려 상대 또한 나를 방어적으로 대하게 만든다. 그래서 그것에 열정을 쏟아붓는 것은 더 이상 부질없다고 생각한다.
호감과 끌림에서 시작되는 이 관계가 영원하리란 보장이 없다는 것을, 시간이 지나면 이 격렬한 감정이 호수처럼 잔잔해지리라는 것을 이미 여러 번 경험했다.
사랑의 깊이가, 상대방이 나와 평생 함께할만한 사람이라는 판단을 내릴 잣대가 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사랑은 그가 나와 잘 어울리는 사람인가에 관한 현실과는 엄연히 다른, 감정일 뿐이라는 것을.
시간이 흐르면 사람을 보는 눈이 조금씩 자란다.
나랑 묘하게 안 맞는 사람을 예전보다 더 잘 골라낸다.
아무리 대단한 사랑일지라도 맞지 않는 틀에 끼워 맞추다 보면 깨지고, 닳고, 바래다가 끝끝내 사라져 버린다는 것을 충분히 경험했기에, 그런 사람에게 호감이 가는 것을 애초에 차단한다.
전에는 외모, 성격이 이성에게 매력을 느끼는 큰 요인이었다면 이제는 그 사람의 습관과 인생관을 본다.
뜨거운 사랑의 온도가 서서히 식으면 그보다 더 진득한 감정이 만들어진다.
바로 '정'이다.
함께 하며 삶을 공유하는 시간 동안 그들은 서로의 인생을 응원하고, 위로하고, 의지한다.
그리고 자연스레 삶의 굴곡을 함께 헤쳐나가는 동반자가 된다.
부부는 '전우애'로 산다고 하는 말처럼, 오랜 시간을 함께한 연인은 이성의 감정을 넘어 세상에서 제일 친한 친구가 되며, 한 인간으로서 그의 소중함을 알게 되고 의리를 굳건히 한다.
그런 생각들을 하나하나 되짚다가, 새삼스레 내 옆을 걷는 사람의 눈동자를 가만히 바라본다.
그 선한 눈빛이 그때와 그다지 변하지 않았다는 것, 그리고 앞으로도 변하지 않을 거라는 내 무언의 믿음을 깨닫고는 조금 놀랐다.
나는 예전에 그를 처음 만났을 때, 나를 설레게 했던 그 어린 눈망울을 기억한다.
그땐 그가 누구인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나에 대한 감정이 어떤 것인지 탐색하기 바빴다.
그러나 언제부턴가 그의 검은 눈동자 안에서 '또 다른 나'를 만날 수 있었다.
앞으로 그와의 앞날이 어떻게 흘러갈지 그 누구도 알 수 없다.
특히 남녀관계라는 것은 아직 깨지지 않은 유리잔과 같기에.
하지만 나에게 사랑 이상의 고마운 안정감과 깊은 믿음을 경험하게 해 준 그에게 이 글을 빌려 감사의 말을 전하고 싶다.
색색의 예쁜 실로 엮은 줄의 양 끝을 잡고 열심히 줄다리기하던 남자와 여자는, 이제 그 줄을 살며시 내려놓는다.
그리고 그것을 서로에게 둘러 그들을 하나로 묶는다.
이미 그들은 서로가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존재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것을 나는 사랑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