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십 대의 나는 병적으로 충동적이었다. 정신과 검사에서 했던 충동성 점수가 거의 100점에 가까웠다. 의사가 이런 점수는 처음 본다며 몇 번이나 고개를 저었던 게 떠오른다.
그러니 한국에서의 삶을 정리하고 네덜란드로 떠나겠다고 마음먹은 것도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그 여름 아침, 난 영어 수업에 앉아 있었다. 졸업 요건을 채우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듣는 과목이었다. 강의실 창문으로 햇빛이 쏟아지고, 다들 반쯤 졸고 있었다. 원어민 교수님이 틀어주던 제이슨 므라즈 가사를 받아 적던 공책에 지루함만 쌓여갔다.
그때 문득 생각했다. “남자친구가 있는 네덜란드에 가면 같이 살 수 있는데, 왜 여기서 영어를 배우고 있지?”
그 단순하고 철없는 생각 하나로, 나는 그날 수업이 끝나자마자 휴학을 했다.
당시 내가 만나던 남자친구는 네덜란드의 한 다큐멘터리에 출연해 유명세를 얻은 사람이었다. 잘생긴 외모 덕분에 사람들 입에 오르내렸고, 그걸 계기로 지역 사회에서 강의를 하며 지내고 있었다.
그는 나보다 열두 살이나 많았지만, 실상은 나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돈도, 기반도, 안정도 없는 남자였다. 지금 돌아보면 한없이 위태롭고 위험한 사람이었는데. 그땐 왜 그렇게 멋져 보였을까. 아마도 내 마음이 더 불안정했기 때문이겠지. 그의 폭력적인 집착과 사랑, 불안정한 삶이 마치 거울을 보는 듯 익숙하고 편했다.
당시엔 한국 국적을 포기하겠다거나, 대학은 어떻게 할 것인지 등 거창한 계획 같은 건 없었다. 단지 그와 같은 곳에서 살고 싶었다.
그래서 휴학한 그날 바로 일을 시작했다. 미군부대 근처의 식당이었는데, 하루 종일 통나무로 고기를 훈연하는 곳이었다. 낮에는 그 고깃집에서 일하고, 밤에는 바텐더로 일하며 네덜란드로 갈 비행기 값을 모았다. 그렇게 일하다 보니 어느 순간 네덜란드로 가는 게 내 삶의 유일한 목표가 돼 있었다. 한국에서의 삶은 점점 의미를 잃어갔다.
고깃집에서 하루 열 시간을 일했지만, 떠오르는 기억은 많지 않다. 그 시절 내 모든 집념은 그가 있는 네덜란드로 가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데 쏠려 있었다. 나의 정신적인 고통도, 그의 불같은 성미도, 우리가 네덜란드에서 함께 살게 되면 마법처럼 나아질 것 같았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불안정한 목표가 당시 나의 비틀린 삶을 버티게 해주는 유일한 힘이었다.
그리고 드디어 목표했던 돈을 모은 뒤 네덜란드로 향했다. 떠나기 전 나는 가지고 있던 모든 걸 나눠주거나 헐값에 팔았다. 아무 미련도 없었다. 다시는 한국에 돌아오지 않게 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그런데 비행기를 타기 직전, 갑자기 남자친구와 연락이 끊겼다. 모든 메신저가 로그아웃됐고, 전화를 걸어도 받지 않았다. 불길한 마음은 커졌지만, 일단 비행기에 올랐다. 불안한 남자였으니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지금 돌아보면 그런 사람에게 미래를 걸려고 했다는 게 이해되지 않는다. 그때 나는 그냥 내 미래를 던져버리고 싶었던 것 같다.
스키폴 공항에 도착했을 때, 휴대폰엔 메시지가 수십 통 쌓여 있었다. 전부 그의 친구들이었다.
A가 감옥에 갔어.
스물셋. 가진 건 돈 오백만 원과 짐 가방 1개, 3개월짜리 체류허가, 그리고 담배 한 갑.
이건 내가 어떻게 네덜란드에서 살아남았는지에 대한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