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출근이 다가올수록, 그야말로 도망치고만 싶었다. 일본어를 못하는 네덜란드인 면접관 덕분에 합격하긴 했지만, 일본어를 못하는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기초 일본어 회화 영상과 블로그 글을 며칠 내내 돌려봤다. 일본어 책이라도 사고 싶었지만, 그럴 여유는 없었다. 오른 월세를 내고 나니, 첫 월급이 들어올 때까지는 감자만 먹으며 버텨야 하는 수준이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틈만 나면 구직 사이트를 들여다봤다. 하지만 연락이 오는 곳은 없었다. 그쯤 되자,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됐다. 네덜란드에 살고 있는 나 자신에 대해 말이다.
이때만 해도 내가 아시안이라는 이유로 취직하거나, 돈을 번다는 게 무척 자존심 상하게 느껴졌다. 네덜란드에 끝내 동화되지 못한다는 뜻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일자리마저도 일본어를 잘한다는 거짓말로 얻어낸 자리였다. 나는 출근 이틀 전이 돼서야 겨우 가타가나를 외웠다.
출근 첫날은 의외로 간단하게 지나갔다. 일주일 동안은 교육 기간이라고 했다. 교육장에는 나 외에도 베트남이나 필리핀 신입 직원들이 몇 명 더 있었다. 인원이 부족해서 아직 채용을 다 채우지 못한 상태였다고 한다. 그들 대부분은 일본어를 거의 하지 못했다. 일본어보다 영어와 네덜란드어를 더 우선시해서 뽑았다고 했다. 그래서 오히려 일본인 면접자들이 떨어졌다는 말도, 누군가 귀띔해 주었다.
제발 일본인이 없게 해달라고 빌었던, 말도 안 되는 기도가 이루어진 것 같았다. 다만 혹시 내가 일본인인가 해서, 신입 직원 몇 명이 말을 걸어왔다. 거짓말은 절대 한 번으로는 끝나지 않는다는 사실은 이때 배웠다. 교육관 중 한 명이, 일본에서 살다 온 사람이라며 나를 추켜세웠기 때문이다. 교재 첫 장에는 일본 문화나 고객 특성에 대한 말이 적혀 있었는데, 그리운 척을 하며 읽는 시늉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긴장의 끈은 놓을 수 없었다. 화장실을 가거나 자판기 쪽으로 갈 때마다, 혹시라도 진짜 일본인이 있진 않을까 회사 안을 넌지시 살펴보곤 했다. 직원들과 눈이 마주치면 다들 웃어 주었다. 회사가 궁금한 신입 직원처럼 보이는 모양이었다. 여기 있는 모두가 영어는 물론 다른 언어까지 유창했다. 나는 곧 단 한 문장도 제대로 말할 수 없는 언어들로 고객을 응대해야 했다.
콜센터엔 전화만 해보았지, 내가 일하게 될 거라고는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회사의 연혁, 서비스 정신에 대한 것을 배우고 나자 본격적인 교육이 시작되었다. 전화가 걸려오는 프로그램 사용법과 주로 어떤 상황에 고객들이 문의를 하는지에 관한 내용이었다.
불행 중 다행으로, 발음이 적힌 대본이 제공되었다. 적힌 것과 다른 방식으로 응대를 하면 평가에서 감점을 받을 수 있다고 했다. 그러니까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조심하는 게 좋다며 교육관이 말했다. 어차피 내가 일본어로 할 수 있는 말은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괜히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옆자리에 앉은 베트남 출신 직원은, 남자친구가 일본인이라고 했다. 그녀는 일본어는 어린이 애니메이션이나 겨우 보는 수준이라며, 긴장된다고 말했다. 남자친구는 아주 천천히 말해주는데, 고객들이 너무 빠르게 말하면 분명 못 알아들을 거라는 것이었다.
빨리 월세를 내야 한다는 생각에, 사실 거기까진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이메일이나 채팅 상담을 주로 하게 될 거라고 막연히 상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때부터, 과연 어떻게 하면 이 일을 자연스럽게 그만둘 수 있을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단기 일자리다 보니, 운이 좋으면 별 업무 없이 끝날 것 같기도 했다.
대충 눈치로 외국어를 알아들은 척하는 법은 다음과 같다. 일단, 상대방은 어떤지 되묻는다. 그때 상대방은 자신의 경우는 이렇다며 답변을 해주는데, 그걸 듣고 어떤 얘기였는지 유추하는 것이다. 그것마저도 안될 때는 무조건 정말이냐고 물어보면 된다. 상대방이 그렇다며, 다시 한번 이야기를 꺼낼 때 과연 이게 무슨 뜻이었는지 생각할 시간을 벌 수 있다.
이건 내가 영어도, 네덜란드어도 제대로 못할 때 배운 방법이다. 발음만 조금 신경 쓰고, 고개만 적당히 끄덕여주면 말 한마디 제대로 못해도 대화에 껴있는 것처럼 보인다.
문제는 이게 전화 통화에도 통할까 하는 거였다. 실제 고객 응대 예시를 들려줄 때조차 나는 계속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말인지 몰라도, 안다는 듯한 표정. 그런데 생각해 보면 이건 전화다. 상대방은 내 고개를 못 본다. 어쨌든 교육관에게만은 내가 일본어를 할 수 있다는 인상을 줄 수 있었다. 그렇게 믿었다. 어떻게든 교육비를 받을 때까지만 버텨보기로 했다.
교육이 거의 끝나갈 무렵, 교육생마다 사수가 배정됐다. 내 사수는 R이라는 여성이었는데, 브라질에서 온 일본계 2세라고 했다. 어릴 때 일본어를 썼지만 지금은 유창하진 않다고 했다. 대부분 간단한 질문이니까 걱정 말라는 말에, 나는 또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한국인 동료는 처음이라고, 연락처를 줄 수 있냐고까지 물었다.
R의 옆자리에 앉은 채로 통화가 시작되었다. 나는 한마디도 못 알아들으면서도, 메모하는 시늉을 했다. 영어로 적으면 티가 날까 봐 한글로 아무 말이나 썼다. 가끔 통화 도중에 R이 나를 쳐다보며 어깨를 으쓱일 때는, 똑같이 따라 했다. R은 정말 차분하고, 심지어 약간 지루해 보일 정도로 능숙했다. 전화가 끊기면 지금 건은 되게 쉬운 편이었다며 웃으며 말하기도 했다.
프로그램과 상담 내용을 적는 건 영어로 돼있었기에, 어떤 뜻인지는 전화가 끊긴 후에야 알 수 있었다. 대부분 간단한 예약 내용을 묻거나, 취소 위약금에 대해 따지는 고객들이었다. 고객들과 언성이 높아지면, 대부분 고객 관리 전용 부서로 전화를 넘겼다.
그렇게 하루 종일 R이 통화하는 걸 지켜보며, 오늘은 이렇게 무사히 끝나겠구나, 속으로 안도하고 있었다. 그런데 마지막에 갑자기, 나더러 한 통화를 받아보라고 했다.
순간 화장실에 가는 척하고 도망칠까 진지하게 고민했다. 하지만 이렇게 중간에 도망치면, 그동안 교육받은 돈을 받을 수 없을 것 같았다. R은 그냥 대본만 읽으면 된다고 하면서, 마이크가 달린 헤드폰을 건네줬다.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운이 좋으면, 정말 대본만 읽으면 되지 않을까? 전화가 걸려오기를 기다리면서, 대본에 적힌 것만 끊임없이 되뇌었다.
그리고 마침내, 첫 전화가 걸려왔다. 나는 숨을 들이쉬고 일본어로 안녕하세요. 라고 말했다. 중년 여성 분의 목소리로 여보세요? 가 들려왔다. 그다음 말은, 하나도 못 알아들었다. 정말, 한 마디도. 내가 조금이라도 일본어를 알아들을 수 있었다면, 긴장되거나 무서웠을지 모른다. 하지만 들리는 말이 하나도 없었다. 그러자 오히려 더 평안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사실 무슨 생각으로 그런 말을 했는지, 지금도 이해되지는 않지만 난 말했다.
고멘네사이. 잠깐만요. 마이크가…
아무 일도 없었지만, 마이크가 고장 난 척했다. 몇 번이나 “죄송합니다, 다시 말씀해 주시겠어요?”를 반복했다. R이 얼른 자기 헤드셋을 넘겨주었지만, 결국 고객은 전화를 끊은 뒤였다. R이 급하게 의자를 끌고 와 물었다. 괜찮아? 정말 소리가 안 들렸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다고 말하려 했지만,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그날 저녁, 집에 돌아와 그만두겠다는 메일을 썼다. 그리고 R에게도 메시지를 보냈다. 그만두기로 했어요. 죄송합니다. 그게, 내가 일본어로 쓴 유일한 문장이었다. 답장은 오지 않았다.
얼마 후, 교육비가 입금되었다. 덕분에 밀려 있던 장을 몰아서 봤다. 하지만 한동안 그 회사 앞으로는 지나다닐 수 없었다. 진짜 일본어를 잘하는 누군가, 원래 있었어야 할 자리에 있기를 바라면서. 나는 한참을 돌아, 자전거를 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