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일이든 단순히 좋다 나쁘다로 나눌 수는 없다. 코로나로 인해 직장을 잃은 내가, 코로나 때문에 텅 비어버린 방을 값싸게 구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월세 1,200만 원 집에서 나온 뒤, 난 다행히 암스테르담 중앙역 근처에 있는 스튜디오에 들어가게 되었다. 원래는 관광객용 에어비앤비였던 그 집은, 1층에는 주인이 살고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철거해 스튜디오로 개조한 공간이었다.
현관문은 주인집과 함께 써야 했고, 매번 그를 마주칠 때마다 어색한 인사를 주고받았다. 다소 급하게 이사를 온 데다, 관광객도 직장인도 아닌 내 모습이 민망하게 느껴졌다. 나는 그가 묻지도 않았는데, 살던 집이 공사 중이라는 거짓말을 했다.
2층까지 올라가는 복도 벽에는 암스테르담 주요 관광지 지도가 붙어 있었고, 밤이면 집주인이 친구들과 축구 경기를 보며 웃는 소리가 계단이 있던 공간을 타고 올라왔다. 히터는 작동하지 않았다. 암스테르담의 관광 성수기는 주로 봄철이기 때문이다. 나는 몸을 데우기 위해 뜨거운 물을 마시는 습관이 생겼다.
그래도 그곳은, 정말 오랜만에 생긴 ‘내 공간’이었다. 갑자기 열리는 현관문도, 점심시간만 되면 나가자고 조르는 전신마비 환자 고용주도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월세까지 꽤 저렴한 편이었다. 암스테르담 중앙역 근처에서 이 가격에 스튜디오를 구하는 건 거의 기적 같은 일이었다. 그 집으로 이사 간 다음 날, 시내에 나가 촛대 장식품을 하나 사 왔다. 창틀에 둔 촛대는 트램이 지나갈 때마다 덜컹거리며 흔들리곤 했다.
이 집에 살면서 가장 좋았던 점 중 하나는, 사람을 많이 만날 수 있었다는 거였다. 월세가 저렴하니 형편이 여유로워졌고, 형편에 여유가 생기니 마음에도 여유가 생겼다. 암스테르담 중심에 살다 보니
사람들을 만나기도 훨씬 편했다.
팬데믹 때문에 영국으로 돌아간 남자친구는 일주일에도 몇 번씩 헤어지자고 말했다. 고향 친구들과 어울려 파티를 즐기다 보니, 외국에 있는 여자친구가 점점 거슬리기 시작한 것이다. 어느 순간부터는 그가 내 남자친구가 맞는지도 헷갈렸다. 그런 상황에서, 연애보다 친구를 사귀고 싶어진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고 그때 우연히 간 파티에서, 나는 J를 만나게 된다.
J는 동남아 출신으로 어마어마한 부잣집 딸이었다. 그녀의 연인이자, 개발자로 일하는 네덜란드인 R은 말했다. 그녀의 가족을 만나러 갔을 때, 아무리 차를 타고 들어가도 정원이 끝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녀의 가족들은 거대한 부지에 각각 집을 한 채씩 지어놓고 살았다. 그녀와 R이 약혼했을 때, 그녀의 부모님은 약혼 선물로 호텔방 하나를 선물로 줬다.
그녀는 네덜란드 비자를 얻기 위해 가게를 하나 차렸다고 했다. 혹시 날 고용해 줄 수 있을지 물어보고 싶었지만, 오랜만에 사귄 친구와 어색해지고 싶지 않은 마음이 더 컸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는 거의 매일 나를 초대해서 친구들을 소개해줬다. 대부분 그녀와 마찬가지로 동남아에서 온 친구들이었다. 그들과 함께 샴페인이나, J가 요리사를 불러 만든 동남아 전통 요리들을 먹으며 놀았다.
그때는 나도 정말로 이 나라의 사람들, 그러니까 저녁이 되면 친구들과 어울리고, 상사나 세금에 대해 불평하는 그런 평범한 사람이 된 것만 같았다. 가스가 끊겨 파스타를 물에 불려 먹거나, 집에서 쫓겨날까 봐 걱정하던 날들은 떠오르지도 않았다.
그렇게 한 달 정도 흘렀을 때, J가 넌지시 귀띔을 해주었다. 사실 그녀의 집에서 함께 어울리는 사람들의 대부분이 비자가 없는 사람들, 즉 불법체류자들이라는 것이었다.
우린 불법체류자라는 말은 쓰지 않아.
그냥 서류가 없는 사람들이라고 하지.
그들은 '불법체류자'라는 말이 주는 이미지와는 많이 달랐다. 누군가는 식당에서 일했고, 누군가는 미용실에서 일했다. 대부분은 나보다도 훨씬 오래, 네덜란드에 살고 있었다.
이곳에서 결혼해 가정을 꾸린 부부도 있었다. 그들은 암스테르담에서도 소위 '부자 동네'라 불리는 곳에 살았는데, 집 명의나 은행 계좌는 아는 사람에게 매달 일정 금액을 주고 빌려서 사용한다고 했다. 네덜란드어도 능숙했고, 걱정 없어 보일 만큼 풍요로워서 그들이 서류 없이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은 전혀 짐작할 수 없었다.
그중에서도 나와 특히 가까웠던 C는, 본국에서 대학원까지 나온 엘리트였다. 유쾌한 성격의 그는 내 고민을 들어주거나, 조언을 해주곤 했다. 처음엔 자신을 바리스타라고 소개했었지만, 사실은 청소 일을 하고 있다고 털어놓았다. 지금도 우리는 일주일에 몇 번씩 연락을 주고받는 사이지만, 그때도, 지금도 왜 그가 그런 선택을 했는지는 물어볼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J가 물었다. 분기마다 암스테르담에 사는 고향 사람들끼리 모여서 연회를 하는데, 혹시 아르바이트를 할 생각이 없냐는 거였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외부인을 들이기는 어렵다고 했다. 그녀의 친구들에 대한 사실을 듣고 난 후, 나도 어느 정도 내려놓고 내 이야기를 털어놓은 후였다. J는 어차피 친구들도 나에 대해 알고 있으니 일은 힘들 게 없을 거라고 말했다.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연회는 암스테르담 외곽에 있는 연수원에서 열렸다. 나는 한 시간 정도 일찍 도착했는데, 영어로 쓰인 현수막과 함께 포토월, 무대까지 마련되어 있었다. J는 이 파티의 비공식적인 스폰서쯤 된다고 했다. 그녀가 부른 요리사들이 만든 기본적인 뷔페 음식들이 차려져 있었다. 빈 냄비에는 파티에 오는 사람들이 만든 음식으로 채워질 거라고 했다. 나는 이때까진 동남아에 가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새로운 음식들을 먹어볼 생각에 설렜다.
시간이 되자 사람들이 도착하기 시작했다. 그들에게는 이 파티가 일종의 명절 같은 것이었다. 다들 설레는 얼굴에 말끔하게 차려입었고, 손에는 음식들이 가득했다. 나도 오랜만에 아시아 사람들과 함께 있다 보니 마음이 편했다. 그들은 익숙한 듯이 각자 준비해 온 음식을 냄비에 담았다.
서빙 아르바이트라고 해도, 내가 할 일은 거의 없었다. 그들은 그저 내가 J가 새로 사귄 한국인 친구이고, 암스테르담에서 일하고 있다는 것에 더 관심을 보였다. 한국에서는 어떤 스킨케어 제품을 쓰는지 묻거나, 오래전 서울에 여행을 가본 적이 있다고 말했다. 나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들은, 내 손을 잡으며 다 잘될 거라고 이야기하기도 했다. 나는 그제야 이 아르바이트 제안이 그저 J가 나를 돕기 위해 마련한 자리라는 것을 눈치챘다.
나는 J에게 넌지시 고맙다고 말했다. 그녀는 친구끼리 고맙다는 말은 하는 게 아니라며, 파티를 즐기라고 등을 떠밀었다.
수년 째 정기적으로 열리고 있다는 파티는 나름 체계적으로 짜여 있었다. 초반엔 각자 자유롭게 음식을 덜어 먹으며 이야기를 나눴다. 다들 어떻게 살고 있는지, 최근에 새로 시작한 일은 어떤지 묻는 식이었다. 여느 파티와 다를 바가 없었다.
시간이 좀 지나자 무대 위로 진행자가 올라왔다. 그들 사이에서 말주변이 좋고 웃긴 걸로 유명하다는 20대 초반 쯤 되는 남자였다. 나비넥타이에 양복을 차려입은 그는, 다들 올 한 해도 수고 많았다며 인사를 건넸다. 옆에서 J가 그가 하는 말들을 조용히 통역해 주었다.
이윽고 밴드 공연까지 시작되었다. 유난히 화려한 옷을 입고 있던 남자 서너 명이 있었는데, 그들이 밴드 멤버인 것 같았다. 연회장의 불을 끄고 조명을 켜자 꽤 화려한 분위기가 연출되었다. 대부분 처음 들어보는 노래들이었지만, 호응에 맞춰 다 같이 따라 부르는 사람들을 보는 것만으로 즐거웠다. 네덜란드가 아니라, 동남아 어딘가 와있는 듯한 기분이 들 정도였다.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때의 난 그 이유를 알지 못했다.
공연과 함께 경품 추첨이 열렸다. 대부분 J가 후원하거나, 사람들이 가져온 선물이었다 명품 지갑부터 동남아 요리에 쓰는 양념, 반찬통까지 다양한 물건들이 나왔다.
파티는 밤 9시쯤 끝이 났다.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나서서 연회장을 정리했다. 내가 보기엔 좀 과하다 싶을 정도로 깨끗하게 청소했는데, 혹시 문제가 생겨서 경찰과 엮이게 될까 봐 그런다고 했다. 나는 그제서야 다시 한번 깨달았다. 이 파티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서류가 없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집으로 돌아가는 길, J는 선물이라며 에르메스 슬리퍼를 선물로 줬다. A급 가품이라, 비싸게 주고 산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이걸 신고 좋은 곳에 취업하라고 했다. 모든 사람들이 부럽다는 듯 쳐다보고 있었다. 그들의 눈빛은 정말 그랬다. 난 같은 나라 사람들끼리 이렇게 어울릴 수 있다는 것, 그리고 네덜란드어를 잘하는 것이 더 부럽다고 말했다. 그들은 원래 우리는 이렇게 지낸다며 미소를 지었다. 그 말은 하지 말았어야 했다는 건 아주 나중에야 깨달았다.
J가 준 슬리퍼는 내 발엔 맞지 않아 결국 한 번도 신지 못했다. J는 몇 년 전 R과 결혼했고, 지금은 네덜란드 시민이 되었다.
그날 집으로 돌아가면서 난 생각했다. 어쩌면 그 파티는, 내게도 잠시 동안 ‘속해 있는 척할 수 있는 자리’였다고. 그리고 그건 그 시절의 나에게 아주 귀한 일이었다.
얼마 후, 코로나가 어느 정도 가라앉으며, 멈춰 있던 것들이 서서히 깨어나기 시작했다. 비록 밤 12시까지만 영업할 수 있었지만, 술집들이 다시 문을 열었고, 회사로 출근하는 사람들도 하나둘 늘어났다. 그와 함께, 저렴하던 내 방의 월세도 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무렵, 나는 일생일대의 거짓말을 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