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뜨자, 어깨가 얼어붙은 듯 굳어 있었다. 4월이 훌쩍 지났지만, 봄은 멀리에 있었다. 일본 고객 전용 콜센터를 도망치듯 그만둔 뒤, 나는 암스테르담 외곽의 오래된 건물로 이사했다. 벌써 여섯 번째 이사였다. 예술대 학생들이 모여 사는 곳으로, 약 스무 명이 부엌과 화장실을 나눠 썼다. 십 대 후반의 조각가부터 이십 대 후반의 공예가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있었다. 무슬림들이 사는 그 조용한 동네에서 밤이 되면 불빛이 새어 나오는 유일한 공간이기도 했다.
그러나 사실 나의 삶은 변한 게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네덜란드에 온 이후엔 늘 가난했기 때문이다. 대형 옥수수 통조림을 사두고, 배가 고플 때마다 조금씩 꺼내 먹었다. 가끔 마요네즈를 섞어 먹었고, 그런대로 충분히 맛있었다.
그때 친구의 소식을 듣게 된 건, 그야말로 우연이었다. 당시 난 하루아침에 학교를 휴학하고 네덜란드로 떠난 뒤, 몇 년 동안 돌아오지 않아 어느새 ‘도시전설’ 같은 존재가 되어 있었다. 그 후 네덜란드에서 살아남는 것 외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았다. 별의별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며, 그저 버티는 데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대학 동기들과 밤새워 소설이나 시를 읽고, 가슴을 쳤던 일들은 까마득히 잊고 있었던 것이다.
친구가 등단했다. 게다가 내가 만약 서울에 남아 계속 대학을 다녔다면, 반드시 지원했을 그 대학원까지 합격했다고 했다.
또 한 가지, 내 비자 만료일마저 가까워지고 있었다. 나는 핸드폰도 들지 않은 채 집을 나섰고, 발길 닿는 대로 걷기 시작했다. 나는 무엇을 해야 할까? 머릿속은 온통 비자 문제로 가득했지만, 사실 내가 사랑했던 건 문학이었다. 나에게도 꿈이 있었던 것이다. 나는 끝없이 앞으로 걸어갔지만, 어쩐지 영영 갇힌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때, 누군가 내 이름을 부르며 다가왔다.
당시 내가 살던 외곽 지역에서 그 공원까지는 걸어서 세 시간이 넘게 걸렸다. 핸드폰이 없어서 그렇게 오래 걸었던 것도 몰랐거니와, 그곳에서 내가 입주 간병인으로 일했던 전신마비 환자 P를 마주치게 될 줄은 더더욱 몰랐다. 그가 나보다 어린 간병인을 구했다며, 그만 두길 부탁한 뒤로 거의 일 년여 만의 일이었다.
그는 이번엔 남미 여성 간병인과 함께였다. 날이 유난히 맑아서였는지, 오랜만에 얼굴을 봐서였는지 몰라도 제법 기분이 좋아 보였다. 마침 나도 머릿속이 복잡하던 참이라, 아는 얼굴을 마주하니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나는 그의 휠체어 옆에서 이야기를 나누며 공원을 함께 돌았다.
난 이제 더 이상 그의 휠체어를 하루 종일 밀 필요도 없었고, 그의 항문에 손가락을 넣어 관장을 해야 할 일도 없었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그는 제법 괜찮은 어른처럼 느껴졌다. 그는 한때 꽤 큰 규모의 부동산 회사를 운영했었고, 돈 많은 유대인 가문 출신이기도 했다.
나는 지금 내 상황에 대해 대충 털어놨다. 비자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네덜란드 사람들, 아니 유럽인들에게 비자 고민을 얘기해 봐야 그들이 이해할 리도 없었고, 더 이상 나 자신을 작게 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러자 그가 뜻밖의 일자리를 제안해 왔다. 그의 친구 중 한 명이 자서전을 쓰려고 하는데 고스트 라이터, 즉 대필 작가를 구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의 집에 들러 이야기를 듣고 글로 옮겨줄 사람을 구하고 있다며, 네가 딱 맞을 것 같다고 했다. 나는 망설임 없이 P의 손을 덥석 잡았다.
그 자서전, 내가 대신 쓸게!
그 노인, W의 집은 암스테르담 동쪽 끝에 있었다. 내가 살던 곳에선 기차를 갈아타야 했고, 도착까지는 거의 30분이 걸렸다. 공항까지도 10분 남짓이면 닿는 암스테르담에서, 그 거리는 꽤 먼 편이었다.
지금껏 해온 아르바이트에 비해 돈이 많은 것도 아니었고, 이동 거리까지 만만치 않았다. 게다가 비자를 갱신하려면 당장이라도 ‘제대로 된’ 일자리를 찾아야 했다. 그럼에도 이 아르바이트를 하기로 마음먹었던 건, 정말로 글을 쓰고 싶었기 때문이다. 내가 진짜로 있고 싶었던 자리, 그 자리를 어떻게든 되찾고 싶었다. 친구에게 축하한다는 말을 전하고 난 후였다. 겨우 이런 일을 하면서 글을 쓴다고 위안을 얻는 것이 우습게 느껴지기도 했다.
인테리어 시공일을 했었다는 W는, 아주 평범한 노인이었다. 오랫동안 현장 일을 해와서인지, 혹은 지병 때문인지, P보다도 훨씬 나이가 들어 보였다. 약간 어두운 그의 집에서는 시골집 특유의 오래된 냄새가 났다.
그때 노인에 대한 편견이 없었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내가 암스테르담에서 만났던 노인들은, P처럼 온갖 이상한 일을 시키거나 원조교제 같은 걸 제안하는 이들뿐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혹시라도 그가 가까이 앉을까봐 의자를 빼서 앉았다.
나는 프리슬란트에서 태어났고,
아버지도 시공일을 하셨었지.
그는 말끝마다 목소리가 떨렸고, 사투리가 섞인 탓인지 유난히 길고 느린 말투를 썼다. 어휘도 달랐다. 정말 알아듣기 힘들었다. 게다가 웬 낯선 곳에서 태어났다는 것으로 시작된 그의 삶은, 너무도 평범했다. 남들이 다 결혼하는 나이에 결혼을 하고, 아이는 낳지 못했고, 일을 열심히 하다가 은퇴했다는 둥의 내용이었다.
나는 그의 말을 이해하려 귀를 기울이면서도, 왜 이런 이야기를 굳이 책으로 남기고 싶은 건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점심을 먹지 않아 졸음이 밀려오지 않는 게,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그는 몇 년 전 아내를 떠나보냈다며, 삶이든 행복이든 너무 짧았다고 말했다. 그의 발음이 잘 들리지 않아 무슨 뜻인지 되물었지만, 두 번째 말도 끝내 알아들을 수 없었다. 나의 비자 갱신일은 코 앞이었고, 남자친구가 감옥에 간 뒤로는 모든 일이 한꺼번에 몰아치면서 모든 것 앞에 서 있었다. 끝나지 않는 시간의 연속이었다. 나는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그의 말을 대충 받아 적었다. 그가 내어준 차는 쓰기만 했다.
그의 이야기가 끝난 건, 저녁 시간쯤이었다. 그는 빈말로라도 저녁을 같이 먹겠느냐는 말은 하지 않았고, 나도 서둘러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나는 최대한 빨리 완성해서 초본을 보내주겠다고, 겉옷을 챙기면서 혹시 마지막으로 꼭 넣고 싶은 말이 있냐고 물었다. 그만큼 쓸 만한 이야기가 많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자 그는 알다시피 자기 이야기는 별 볼 일 없다고 말했다. 자서전이라는 말도 너무 거창하다고. 그럼에도 자신의 이야기를 남기고 싶었던 건, 이유가 있어서였다고 했다. 꼭 내 생각을 들킨 것 같아서 침을 꿀꺽 삼켰다.
난 행복했었거든.
그는 그렇게 말하며 잘 가라고 인사를 건넸다.
밖으로 나오자 해가 지평선 가까이 떨어져, 하늘은 온통 주황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나는 습관처럼 이어폰을 꼈다가 다시 뺐다. 그의 마지막 말이 계속해서 귀에 맴돌았기 때문이다.
먼 길을 되돌아가며 그의 이야기를 녹음한 파일을 다시 들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아무 일도 없는 삶이란, 아무것도 담고 있지 않아서가 아니라, 너무 많은 걸 담고 있어서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는 걸. 집으로 돌아오자 이민청에서 편지가 두 통이나 와있었고, 공용 부엌엔 누군가 먹고 치우지 않아 기름때 낀 프라이팬이 쌓여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날, 평범함이라는 것의 엄청난 무게를 처음으로 알게 됐다.
그의 자서전을 완성하기까지는 생각보다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는 결국 그것을 읽지는 못했지만, 그 이야기를 써주는 동안만큼은, 나도 아주 잠시 어디에 닿아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내년이면 나는 서른이 된다.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던 날들을 지나, 지금은 작가로 일하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무엇을 해야 할지 잘 모르겠고 등단은 하지 못했으며 비자 갱신일이 다가오면 머리가 아프다. 그럼에도, '행복했었다'고 말할 수 있는 삶은 어떤 삶일까?
스물셋. 뭣 모르고 네덜란드에 도착한 이후 수없이 해온 아르바이트들 중에서 그 자서전을 써주던 일이 유독 기억에 남는 건, 어쩌면 그래서일지도 모르겠다.
지금까지 「나의 미친 아르바이트」를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 주에는 외전 '한국편: 아프리카 여캠 방송에서 채팅 치기'가 업로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