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적이 없습니다" - 템플스테이 참가자의 고백
유튜브를 보다가 우연히 BBS에서 올린 "새로운 시작 출가 편"이라는 템플스테이 다큐멘터리를 보게 되었다. 화면 속 한 참가자가 스님의 처소 앞에서 서성이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내레이션은 "여행자 한 명이 스님의 처소 앞에서 서성입니다.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모양입니다"라고 설명했다.
그 참가자의 말이 내 가슴을 쳤다. "행복해질려면 어떻게 해야 되는 방법을 찾는데 딱 여기 불교가 보이더라구요. 그래서 여기가 답인거 같아서 찾아 보게 되었어요." PD가 "행복하지 않으셨어요?"라고 묻자, 그는 담담하게 답했다. "행복한 적이 없었어요. 그래서 뭔가 좀 부족한 거 같아서 찾아 보다 보니까 여기가 딱 답이더라구요."
그날 밤, 나는 노트북을 덮고 한참을 생각에 잠겼다. 상담실에서 만나는 수많은 내담자들도 비슷한 말을 한다. '행복한 적이 없다'는 그 무거운 고백 속에서 나는 현대인의 보편적 결핍을 보았다. 문득 자크 라캉의 『에크리』에서 읽었던 구절이 떠올랐다. 라캉은 인간의 욕망이 타자의 욕망이며, 우리가 추구하는 행복 역시 대타자가 규정한 이상적 이미지를 쫓는 것일 뿐이라고 했다.
그 참가자가 "뭔가 좀 부족한 거 같아서"라고 표현한 그 결핍감. 이것이 바로 라캉이 말한 '근본적 결여(manque)'가 아닐까.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무언가 잃어버린 것처럼 느끼며, 그 빈 곳을 채우기 위해 끊임없이 무언가를 찾아 헤맨다. 그는 불교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을 거라 믿고 템플스테이까지 갔지만, 사실 그가 찾는 것은 어쩌면 존재하지 않는 '대상 a(objet petit a)'일지도 모른다.
라캉의 '대상 a'는 우리가 끊임없이 추구하지만 결코 얻을 수 없는 욕망의 원인이자 대상이다. 마치 어린 시절 잃어버린 완벽한 만족의 기억처럼, 실제로는 존재한 적 없지만 우리는 그것을 되찾으려 평생을 헤맨다. 코카콜라 광고가 약속하는 '완벽한 상쾌함'처럼, 우리는 그것을 향해 달려가지만 막상 손에 넣으면 그것은 더 이상 우리가 원했던 그것이 아니다. 그 참가자에게 불교는 또 하나의 '대상 a'였을 것이다.
다음 날 상담실에서 한 내담자를 만났다. 그녀는 SNS에서 보이는 다른 사람들의 행복한 일상을 보며 자신만 뒤처진 것 같다고 했다. "왜 나만 행복하지 않을까요?"라는 그녀의 질문에 나는 전날 본 영상 속 참가자가 떠올랐다. 나는 브루스 핑크의 『라캉의 정신분석 임상』에서 읽었던 내용을 떠올리며 말했다. "우리가 추구하는 행복은 실재(the Real)가 아니라 상상계(the Imaginary)의 환상일 수 있어요. 타인의 행복해 보이는 모습은 우리가 욕망하도록 만드는 이미지일 뿐이죠."
라캉의 세 가지 정신 영역 - 상상계, 상징계, 실재계를 설명하며 나는 이어갔다. "상상계는 이미지와 환상의 세계예요. 거울을 보며 '저게 나'라고 착각하는 아기처럼, 우리도 SNS의 완벽한 이미지를 진짜라고 믿죠. 상징계는 언어와 법의 세계예요. '성공하려면 이래야 한다'는 사회적 규범들이 바로 상징계의 질서죠. 그리고 실재계는 언어로도, 이미지로도 포착할 수 없는 날것의 현실이에요. 트라우마처럼 말로 설명할 수 없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그 무언가죠."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여전히 의구심 가득한 표정이었다. 나는 상담을 이어가면서도 계속 그 템플스테이 참가자를 생각했다. 그가 불교에서 찾으려 했던 '답'은 무엇이었을까. 어쩌면 그는 상징계(the Symbolic)의 언어로는 설명할 수 없는, 실재의 영역에 닿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슬라보예 지젝의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에서 읽었던 구절이 생각났다. 지젝은 우리가 무언가를 욕망할 때, 실제로는 그 대상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둘러싼 환상을 욕망한다고 했다. 그 참가자가 불교에서 찾으려 한 행복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는 불교라는 상징적 체계가 제공할 '완전한 답'을 기대했지만, 진정한 깨달음은 오히려 그런 완벽한 답이 존재하지 않음을 받아들이는 데서 시작된다.
몇 주 후, 나는 상담 슈퍼비전에서 이 사례를 언급했다. "우리는 내담자들에게 행복의 방법을 가르치려 하지만, 사실 우리도 그 답을 모르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동료 상담사가 물었다. "맞아요. 라캉이 말했듯이 분석가는 '알고 있다고 가정된 주체(sujet supposé savoir)'일 뿐이죠. 우리도 똑같이 결여를 안고 있어요."
라캉은 정신분석 과정에서 내담자가 분석가를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존재'로 상정한다고 했다. 마치 어린아이가 부모를 전지전능한 존재로 보듯이 말이다. 하지만 실제로 분석가는 아무것도 모른다. 단지 내담자가 자신의 무의식을 탐색할 수 있도록 거울 역할을 할 뿐이다. 이것이 바로 전이(transference)의 핵심이다.
그 후로 나는 상담 접근을 조금씩 바꾸기 시작했다. 내담자들에게 행복의 방법을 제시하려 하기보다는, 그들이 자신의 결여와 욕망의 구조를 이해하도록 돕는 데 집중했다. 디디에 앙지외의 『정신분석의 기법들』에서 읽었던 대로, 치료의 목표는 증상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주체가 자신의 욕망과 새로운 관계를 맺도록 하는 것이다.
최근 만난 한 대학생이 떠오른다. "취업만 하면 행복할 줄 알았는데, 막상 취업하니 또 다른 불안이 생겨요"라고 그는 말했다. 나는 라캉의 욕망 이론을 떠올리며 설명했다. "욕망은 본질적으로 메토니미적이에요. 하나를 얻으면 또 다른 것으로 미끄러져 가죠. 마치 도미노처럼 끝없이 이어져요. 왜냐하면 우리가 진짜 원하는 것은 그 대상이 아니라 '원함' 자체, 즉 욕망하는 상태 그 자체이기 때문이에요."
어제도 한 내담자가 물었다. "선생님, 저는 언제쯤 행복해질 수 있을까요?" 나는 잠시 침묵한 후 답했다. "완벽한 행복을 찾기보다는, 불완전한 일상과 친구가 되는 것은 어떨까요? 우리 삶에는 늘 아쉬움과 부족함이 있기 마련이에요. 그것을 없애려고 애쓰기보다 그것과 함께 평화롭게 지내는 법을 배우는 거죠. 완벽한 충만함은 환상일 수 있지만, 그 결여를 인정할 때 오히려 자유로워질 수 있어요."
라캉은 정신분석의 목표를 '환상 가로지르기(traversée du fantasme)'라고 표현했다. 우리가 평생 쫓아온 환상, 즉 '언젠가는 완벽하게 행복해질 수 있다'는 믿음을 관통하여 그것이 환상임을 깨닫는 것. 그리고 그 환상 너머에서 자신의 진정한 욕망과 마주하는 것. 이것이 정신분석이 추구하는 치유의 과정이다.
지금도 가끔 그 BBS 영상을 다시 본다. "행복한 적이 없습니다"라고 말하던 그 참가자의 표정을. 그는 지금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여전히 답을 찾아 헤매고 있을까, 아니면 질문 자체를 바꾸었을까. 나 역시 아직 답을 찾지 못했다. 다만 이제는 그 '답 없음'이 오히려 진실에 가까울 수 있다는 것을 조금씩 받아들이고 있다.
상담실 창밖으로 저녁 노을이 진다. 오늘도 행복을 찾아 이곳을 찾은 내담자들과 함께 우리는 각자의 결여를 마주한다. 완벽한 해답은 없지만, 그 불완전함 속에서 살아가는 법을 함께 배워간다. 라캉이 말했듯이, 정신분석의 끝은 주체가 자신의 환상을 가로지르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그 여정 중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