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다 만 책, 멈춘 운동...왜 자꾸 미완에 머무를까?
끝나지 않은 것들에 대하여
어제 밤, 또다시 스마트폰을 손에 들고 새벽 2시를 넘겨버렸다. 인스타그램 피드를 무한히 스크롤하다가 문득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내가 무엇을 찾고 있었는지조차 기억하지 못했다. 침대 옆 탁자에는 반쯤 읽다 만 책이 여전히 놓여있었다.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였는데, 벌써 몇 달째 같은 페이지에서 멈춰있다.
이런 일이 반복될 때마다 나는 묘한 기시감에 사로잡힌다. 무언가를 끝내지 못하는 패턴이 내 삶 곳곳에 스며들어 있다는 걸 깨달을 때의 그 불편함 말이다. 읽다 만 책들, 시작했다가 중단된 운동, 며칠 쓰다가 포기한 일기, 그리고 끝없이 이어지는 SNS 스크롤링. 마치 내가 의도적으로 무언가를 완결짓는 것을 피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패턴의 발견
몇 주 전, 우연히 읽게 된 심리치료 사례 연구에서 흥미로운 이야기를 접했다. J부인이라는 환자의 사례였는데, 그녀 역시 '끝나지 않은 것들'에 둘러싸여 살고 있었다. 끝나지 않은 책, 끝나지 않은 결혼, 일부만 진행된 치료. 그런데 이 사례를 읽으면서 나는 소름이 돋았다. 마치 거울을 보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 글에서 치료사는 이런 패턴이 단순한 우연이 아니라고 분석했다. "멈추지 않는 어떤 반복 운동이 있는 것처럼, 상실의 패턴은 그녀의 삶의 영역에서 모두 분명하게 나타나고 있다"는 문장이 특히 인상 깊었다. 나 역시 그랬다. 어린 시절부터 시작된 것들을 끝내지 못하는 습관이 성인이 된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더 충격적인 것은 치료사와 환자의 관계에 대한 분석이었다. "치료자는 J부인이 준비도 되기 전에 그녀에게 상실을 안겨줌으로써 그녀의 아버지를 대표하고 있는 것인가?"라는 질문이 마음에 깊이 박혔다.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내가 끝내지 못하는 것들 뒤에는 단순한 게으름이나 의지력 부족이 아니라, 훨씬 깊은 무언가가 숨어있다는 것을.
반복되는 이별의 그림자
대학생 때 시작한 기타를 생각해보면, 처음 몇 주는 열심히 연습했다. 손가락 끝이 아플 정도로 코드를 짚어가며 좋아하는 노래를 연주하고 싶다는 꿈에 부풀어 있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 연습이 귀찮아졌고, 기타는 방 한구석에서 먼지만 쌓이고 있다. 요가 매트도 마찬가지다. 홈트레이닝을 시작하겠다며 의기양양하게 샀지만, 이제는 옷걸이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런데 그 심리치료 사례를 읽고 나서 문득 떠오른 기억이 있다. 초등학교 때 피아노를 배웠는데, 선생님이 갑자기 이사를 가게 되어 레슨이 중단된 적이 있었다. 그때 나는 몇 달 동안 새 선생님을 기다렸지만, 결국 피아노를 그만두게 되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 이후로 나는 무의식적으로 누군가에게 가르침을 받거나 의존하는 상황을 피해왔던 것 같다.
J부인의 사례에서 "아버지/아들 관계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 대칭성을 적용해본다면, 부모/자녀 관계에 대한 연상의 연속으로서 그녀와 아버지의 관계를 생각할 수 있지 않겠는가?"라는 분석을 읽으며, 나 역시 비슷한 패턴을 발견했다. 어린 시절 아버지와의 관계에서 시작된 무언가가 지금도 나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아버지는 항상 바쁜 분이셨다. 약속을 해도 갑작스러운 출장으로 취소되는 일이 많았고, 함께 보내기로 한 주말도 회사 일로 흐지부지되곤 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실망했지만, 아이였던 나는 그 실망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몰랐다. 대신 나는 점점 아버지에게 기대하지 않는 법을 배웠다. 그리고 지금 생각해보니, 그 '기대하지 않기'의 패턴이 내 인생 전반으로 확산된 것 같다.
디지털 시대의 무한 연기
특히 스마트폰과 SNS는 이런 패턴을 더욱 심화시키는 것 같다. 인스타그램 스토리는 24시간 후 사라지고, 틱톡 영상은 끝없이 이어진다. 온라인 쇼핑몰에서는 "추천 상품"이라는 이름으로 무한한 선택지가 펼쳐진다. 모든 것이 끝나지 않는 연속성 속에서 우리는 완결을 경험할 기회를 잃어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지난달에도 그랬다. 새로운 드라마를 보기 시작했는데, 몰아보기를 하다가 마지막 2화를 남겨두고 멈춰버렸다. 왜 그랬을까? 나중에 생각해보니, 끝이 나는 것에 대한 묘한 저항감이 있었던 것 같다. 드라마가 끝나면 다시 빈 시간과 마주해야 하고, 또 다른 무언가를 찾아 헤매야 한다는 불안감 말이다.
쇼핑도 마찬가지다. 온라인 쇼핑몰을 들락거리며 장바구니에 물건을 담아두고 며칠 후 삭제하기를 반복한다. 실제로 구매하는 것보다 "찾아보는" 과정 자체가 주는 미묘한 쾌감에 중독된 것 같다. 마치 영원히 쇼핑할 수 있다는 착각 속에서 살고 있는 것처럼.
그런데 이제 나는 이런 행동들이 단순한 소비욕구가 아니라는 걸 안다. 그 심리치료 사례처럼, 나 역시 무의식적으로 "상실"을 연기하고 있는 것이다. 끝내지 않으면 잃을 것도 없고, 실망할 일도 없다는 어린아이 같은 논리로.
전이의 발견
가장 충격적인 깨달음은 인간관계에서 왔다. 작년에 다니던 직장에서 새로 들어온 팀장과 갈등이 있었던 일이다. 처음에는 그분이 너무 꼼꼼하고 요구사항이 많다고 생각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묘하게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혹시 실망시키면 어떡하지, 혹시 나를 포기하면 어떡하지 하는 걱정이 계속 들었다.
그러다가 어느 날, 그분에게 보고를 하다가 갑자기 어린 시절 아버지 앞에서 느꼈던 그 긴장감이 떠올랐다. '이번에도 실망시키면 어떡하지'라는 불안, '어차피 기대하지 않으시겠지'라는 체념.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내가 팀장에게 느끼는 감정이 사실은 아버지에 대한 감정의 재현이라는 것을.
J부인의 사례에서 언급된 "치료자가 종결을 불가피하게 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은 아닌가?"라는 질문이 갑자기 이해되었다. 나 역시 무의식적으로 모든 관계를 '언젠가는 끝날 것'으로 전제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먼저 거리를 두거나, 깊어지기 전에 관계를 중단시키곤 했다.
대학 시절 사귀던 사람과의 관계도 그랬다. 1년 정도 만나다가 상대방이 진지한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하자, 나는 갑자기 불안해지며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당시에는 '아직 준비가 안 됐다'고 생각했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깊어지는 관계에 대한 두려움이었던 것 같다. 깊어질수록 잃을 것도 많아지니까.
꿈속의 구조자
얼마 전 이상한 꿈을 꾸었다. 깊은 물 속에서 누군가가 도움을 요청하고 있었는데, 나는 물가에서 망설이고만 있었다. 뛰어들어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러다가 결국 잠에서 깼는데, 꿈에서 깬 후에도 한동안 그 답답함이 가시지 않았다.
그 심리치료 사례에서 J부인도 비슷한 꿈을 꾸었다고 했다. "꿈속으로 뛰어들며 J부인은 물에 빠진 소녀를 구하기 위해 물 속으로 뛰어들어가야 했다고 느꼈다. 하지만 이 꿈에 대해 어떤 조치를 취하기 전에 잠에서 깼다." 마치 내 꿈과 정반대였다. 그녀는 뛰어들려고 했지만 꿈에서 깼고, 나는 뛰어들지 못한 채 망설이다가 깼다.
치료사는 이 꿈에 대해 "치료자는 꿈속에서 물에 빠져 죽는 사람을 구조하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사람으로 나타나고 있을 것이다"라고 해석했다. 그렇다면 내 꿈에서 물에 빠진 사람은 누구였을까? 어쩌면 그것은 도움이 필요한 나 자신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물가에서 망설이던 나는 그런 나를 구해줄 수 있을 거라고 기대했다가 실망했던 모든 사람들의 투영이었을지도.
작은 변화의 시작
이런 깨달음 이후, 나는 작은 실험을 시작했다. 일단 침실에서 스마트폰을 치웠다. 대신 침대 옆에 가벼운 단편소설집을 두었다. 처음에는 익숙하지 않아서 자꾸 스마트폰을 찾게 되었지만, 며칠 지나니 잠들기 전 몇 페이지씩 읽는 습관이 생겼다.
그리고 의도적으로 "끝내기"를 연습하기 시작했다. 작은 것부터. 예를 들어, 냉장고에 남은 요거트를 며칠에 걸쳐 조금씩 먹지 말고 한 번에 다 먹어치우기. 드라마를 시작하면 반드시 마지막 회까지 보기. 책을 읽기 시작하면 얇은 책이라도 끝까지 읽기.
처음에는 어색했다. 뭔가 급하게 끝내버리는 기분이 들어서 찜찜했다. 하지만 조금씩 '완결'의 맛을 알아가고 있다. 책 한 권을 다 읽고 덮을 때의 뿌듯함, 드라마가 끝났을 때의 여운, 그 모든 것이 새로운 경험이었다.
더 중요한 변화는 퇴직 후 혼자만의 시간이 생기면서 일어났다. 팀장과의 관계에서 내가 무의식적으로 아버지를 투영하고 있었다는 걸 깨달은 것은, 비록 뒤늦었지만 큰 수확이었다. 지금은 새로운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그때의 교훈을 떠올린다. 상대방의 말이나 행동을 과거의 상처 때문에 왜곡해서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퇴직이라는 선택 자체도 내 회피 패턴의 일부였을 수 있지만, 그 덕분에 나 자신을 돌아볼 시간을 갖게 된 것만은 분명하다.
프루스트와 함께 걷는 길
며칠 전, 드디어 침대 옆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다시 펼쳤다. 그 유명한 마들렌 쿠키 장면을 읽으며, 문득 그 심리치료 사례에서 언급된 "잃어버린 시간"이 떠올랐다. "J부인이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떠올릴 때, 그것은 분명히 잃어버린 시간을 암시하고 있다. 잃어버린 시간이 가장 분명하게 가리키고 있는 것은 짧게 끝나버린 결혼생활이지만, 이것은 우리에게 이제 단기간에 종결하려고 하는 치료를 상기시킨다."
나에게 잃어버린 시간은 무엇일까? 아버지와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누지 못한 어린 시절? 두려움 때문에 깊어지지 못한 관계들? 끝내지 못한 채로 방치된 모든 것들? 프루스트에게 잃어버린 시간은 회복해야 할 소중한 기억들이었다. 그렇다면 내가 끝내지 못한 것들도, 사실은 언젠가 다시 찾아야 할 시간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도 그녀는 자신이 겪었던 고통스러운 경험을 나눌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을 갖지 못했을 것이다"라는 문장이 특히 마음에 와닿았다. 나 역시 내 안의 상처와 두려움을 제대로 들여다볼 충분한 시간을 갖지 못했던 것 같다. 항상 바쁘다는 핑계로, 귀찮다는 이유로, 그 모든 것을 회피해왔었다.
현재진행형의 성찰
지금도 나는 완벽하지 않다. 어제도 유튜브 쇼츠를 한 시간 넘게 보다가 정신을 차렸고, 온라인 쇼핑몰에서 필요 없는 물건을 구경하다가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예전과 다른 점이 있다면, 이제는 이런 행동을 하는 나 자신을 관찰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아, 또 회피하고 있구나"라고 스스로에게 말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작은 질문을 던진다. "지금 내가 정말로 원하는 건 뭐지?" "내가 무엇을 피하려고 하고 있지?" 때로는 정말로 쉬고 싶어서 SNS를 보는 거였고, 때로는 어떤 불안감에서 도망치려고 하는 것이었다.
며칠 전에는 방에서 기타를 다시 꺼내봤다. 몇 달 만에 만지는 기타는 줄이 늘어져 있었지만, 조율을 하고 간단한 코드를 짚어보니 여전히 소리가 났다. 완전히 포기했다고 생각했던 것도, 사실은 끝나지 않은 채로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 심리치료 사례에서 "예정된 치료를 조기에 종결하는 문제는 정말로 막을 수 없는가?"라고 묻던 치료사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나 역시 스스로에게 묻는다. 내가 끝내지 못한 것들, 중간에 포기한 것들이 정말로 돌이킬 수 없는 것일까? 아니면 내가 스스로 그렇게 단정지어버린 것일까?
요즘 나는 "끝나지 않은 것들"을 다르게 바라보려고 노력한다. 실패나 포기의 증거가 아니라, 언젠가 다시 돌아갈 수 있는 가능성으로. 그리고 때로는 정말로 끝내야 할 것들과 계속 이어갈 것들을 구분하려고 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 선택을 의식적으로 하는 것이다. 무의식적인 회피가 아니라.
이 글조차도 어떻게 끝낼지 확신이 서지 않는다. 하지만 그것도 괜찮다. 인생 자체가 끝나지 않은 이야기이고, 우리는 모두 그 중간 지점 어딘가에서 살아가고 있으니까. 중요한 건 그 미완성의 상태를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그 안에서 의미를 찾아가는 것일 테다.
오늘 밤도 나는 침대 옆의 프루스트를 조금 더 읽어볼 생각이다. 끝까지 읽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오늘 몇 페이지는 넘겨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만으로도, 지금은 충분하다. 더 이상 누군가를 실망시킬 까봐, 혹은 누군가에게 버림받을까봐 미리 포기하지 않겠다. 끝나지 않은 이야기도 여전히 이야기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