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들이 엄마와 진실을 말하려는 순간들

by 홍종민

문제 인식: 상담실에서 반복되는 패턴


상담실에서 일하면서 가장 자주 마주치는 장면 중 하나가 있다. 서른, 마흔이 된 여성 내담자들이 "이제는 엄마와 진정한 대화를 해야겠어요"라고 말하는 순간이다. 그들의 눈에는 결의가 가득하다. 그동안 쌓여온 오해를 풀고, 자신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솔직하게 말해서 관계를 회복하겠다는 의지로 가득 차 있다.

지난주에도 한 내담자가 이런 말을 했다. "선생님, 저는 이제 엄마에게 진실을 말할 준비가 됐어요. 아버지가 폭력적이고 외도를 일삼았는데도 엄마는 저에게만 의존했거든요. 그때 제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이제는 말해야겠어요."

이런 상황에서 나는 대개 말리는 편이다. 그들의 진심을 의심해서가 아니다. 오히려 그 진심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너무 잘 알기 때문이다.


원인 발견: 마테 블랑코와 변지영의 통찰


몇 년 전 변지영의 『순간이 빛일지라도 우리는 무한』을 읽으면서 내가 경험적으로 알고 있던 것이 명확한 언어로 설명되는 경험을 했다. 저자는 마테 블랑코의 이론을 인용하며 이렇게 말한다.

"소화되지 않는 감정을 생각으로 쪼개어 억지로 소화하려고 시도할 때, 우리는 순간에서 이탈한다. 신경증, 정신증 증상을 갖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생각이 매우 많은데, 어쩌면 소화되지 않는 경험들을 쪼개기 위한 필사적인 노력 때문일지 모른다."

내담자들을 관찰해보면 정확히 이런 패턴을 보인다. 어린 시절의 상처받은 경험들이 소화되지 않은 채 가슴 어디엔가 걸려 있다. 그들은 그것을 생각으로 분석하고, 이해하고, 설명하려고 끊임없이 노력한다. 하지만 "나눌 수 없는 것을 나누려다 보니 늘 생각에 빠지게 되고 '지금, 여기'에서 멀어지게 된다."


깨달음: 내적 대상과 현실의 구분


변지영은 책에서 더 중요한 통찰을 제공한다. "내가 경험한 '엄마'는 실제 엄마의 백분의 일도 되지 않는다. 그 사람의 전부가 아니다. 우리는 어느 누구도 전부를 경험할 수 없고 전체를 알 수가 없다."

이 대목을 읽으면서 나는 무릎을 쳤다. 내담자들이 말하는 '엄마'는 현실의 엄마가 아니다. 자신의 감정, 경험, 기억으로 일부 왜곡된, 자신의 내적 세계 속 '엄마'일 뿐이다. 마테 블랑코의 표현을 빌리면, "우리가 기억하는 누군가는 그 누군가가 아니다. 내 안에서 경험하고 이해하고 소화하고 대사한 결과물, 즉 다른 무엇이다."

상담실에서 내담자들이 엄마에 대해 "어떠어떠하다"고 아무리 구체적으로 정확히 이야기해도, 그것은 결국 자신에 대한 이야기가 된다. 이미 자아의 일부로 합성된 것을 의식하고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마음속 엄마와의 이별


이런 이해를 바탕으로 나는 내담자들에게 근본적으로 다른 방식을 제안하기 시작했다. "엄마를 괴롭히지 말라"고 직설적으로 말하기도 한다.

한 내담자는 처음에 당황했다. "그럼 제 감정은 어떻게 해야 하나요? 이 답답함은 어떻게 풀어야 하나요?"

"관계의 회복도 그 사람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안의 '그 사람'과 연결되는 일입니다." 변지영의 말을 빌어 설명했다. "당신이 믿는 '엄마'는 현실의 엄마가 아니라 당신의 감정, 경험, 기억으로 일부 왜곡된, 당신의 내적 세계일 뿐입니다."


우리는 모두 마음속에 '엄마'를 하나씩 키우고 산다. 어린 시절부터 쌓인 기억들, 받았던 사랑과 상처, 엄마의 표정과 말투가 뒤섞여 만들어진 존재다.

대상관계이론에 의하면 이를 '내적 대상'이라고 부른다. 우리가 중요한 사람들과 맺는 관계 경험이 마음속에 내재화되어, 하나의 살아있는 존재처럼 작동한다는 것이다. 문제는 이 마음속 엄마가 현실의 엄마보다 훨씬 더 생생하고 강력하다는 점이다.

실제 엄마는 늙어가고 있지만, 마음속 엄마는 여전히 서른 년 전 그 모습 그대로다. 실제 엄마는 지금 외롭고 쓸쓸할 수도 있지만, 마음속 엄마는 여전히 나를 통제하려 들고 간섭하려 한다. 우리가 화내는 상대는 대부분 이 마음속 엄마다.


어릴 때 미완성으로 남은 숙제


아이가 엄마로부터 분리되어 개별적인 존재로 자라나는 과정을 마가렛 말러는 '분리-개별화'라고 명명했다. 하지만 많은 딸들에게 이 과정은 제대로 완성되지 않는다.

정상적인 발달에서는 엄마의 '좋은 면'과 '싫은 면'을 하나로 통합해야 한다. 하지만 이 과정이 미완성으로 남으면, 마음속에서는 여전히 "완벽한 엄마" 또는 "나쁜 엄마"로 분열되어 있다. 대상관계이론에서는 이를 '부분 대상'이라고 부른다.

그래서 현실의 엄마가 조금만 실망스러워도 "역시 엄마는 이래"라며 전면 부정하거나, 반대로 죄책감에 시달리며 끝없이 맞춰주려 든다.

더 문제가 되는 것은 '투사적 동일시'라는 현상이다. 자신의 감정이나 생각을 타인의 것으로 착각하거나, 반대로 타인의 것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마음속 엄마의 목소리가 마치 내 목소리인 것처럼 들린다. "네가 성공해야 엄마가 행복해"라는 마음속 엄마의 말을 내 욕망으로 착각하고 살아간다.

라캉이 말한 "타자의 욕망"을 내 것으로 받아들이는 셈이다. 이런 혼란이 생기는 이유는 자아 경계가 명확하게 형성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실제로 딸들이 서른, 마흔이 되어 엄마와 진짜 대화를 하겠다고 하는 순간, 그간 있었던 느슨한 관계마저도 끊어지기 쉽다는 것을 여러 사례를 통해 확인했다. 딸이 진실을 얘기하겠다며 엄마에게 마음을 여는 순간, 엄마는 자기 인생을 통째로 부정당하는 억울함과 분노, 서운함이 밀려온다.

이는 당연한 결과다. 딸이 대면하려는 '엄마'는 자신의 마음속 엄마이지, 현실의 어머니가 아니기 때문이다. 마치 삼십 년 묵은 계산서를 지금의 엄마에게 들이미는 격이다.

반대로 엄마 역시 자신만의 마음속 '딸'을 품고 있다. "내가 이렇게 키웠는데"라는 그 '딸'과 실제 앞에 앉아 있는 딸이 다를 때, 엄마도 당황하고 화가 난다.


진짜 이별이 필요한 곳


그렇다면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마음속 엄마와의 이별이다. 내가 품고 있는 '엄마'라는 상(像)이 얼마나 왜곡되어 있는지, 그 왜곡된 이미지가 내 삶을 얼마나 지배하고 있는지 들여다보는 일이다.

내가 무의식중에 따르고 있는 목소리가 정말 내 것인지, 아니면 마음속 엄마의 것인지 구별해내는 것. 내가 엄마를 '구원'하거나 '만족'시키려는 욕구가 진짜 사랑인지, 아니면 어릴 때부터 내재화된 역할인지 돌아보는 것.

이런 작업을 통해 마음속의 분열된 엄마상들—완벽한 엄마와 나쁜 엄마—을 현실적이고 복합적인 하나의 존재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대상관계이론에서는 이를 '온전한 대상'으로 받아들이는 과정이라 말한다. 그때서야 현실의 엄마를 있는 그대로 볼 수 있게 되고, 엄마 역시 실제 딸의 모습을 받아들일 여유가 생긴다.

진정한 모녀관계의 회복은 서로에게 진실을 털어놓는 것에서 시작되지 않는다. 각자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변화에서 시작된다. 딸이 마음속 엄마와 새로운 관계를 맺을 때, 어머니도 마음속 딸을 현실적으로 받아들일 때, 비로소 두 개별적 존재로서 만날 수 있게 된다.

이는 분리가 아니라 진정한 만남을 위한 전제 조건이다. 마음속 환상을 걷어내고 현실을 마주할 때, 우리는 비로소 서로를 사랑할 수 있게 된다.


더 깊은 성찰: 나르시시즘의 그림자


변지영은 과거를 정리하고 정정하고 싶어 하는 욕망 밑에 거대한 나르시시즘이 들어 있다고 지적한다. "'그런 부모와, 그런 여건에서 자라지 않았더라면 자신은 지금보다 훨씬 더 좋은 사람이 되었고, 더 성공하고 더 나은 삶을 누렸을 것'이라고 착각하는 과대 자기이자 자기기만일 수 있다."

이 대목에서 나는 상담 과정에서 놓치고 있던 부분을 발견했다. 내담자들의 '진실을 말하고 싶다'는 욕구 뒤에 숨겨진 다른 동기들 말이다. "진실을 얘기해서 관계를 푸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그 악조건 속에서도 나는 살아남았고 엄마는 내가 얼마나 힘들었는지를 알아야 한다"며 복수하고 처벌하려는 것은 아닌지 살펴봐야 했다.


현실적 대안: 양육자의 자원 이해하기


"양육자가 자신을 힘들게 했다면, 그건 그만큼 그 사람의 자원이 없었다는 것을 뜻한다. 가지지 않은 것을 어떻게 줄 수 있겠는가." 변지영의 이 말은 내담자들에게 새로운 관점을 제공한다.

한 내담자는 이 말을 듣고 한참을 침묵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그럼 제 엄마도 그냥... 그날 버틸 수밖에 없었던 거네요."

"그렇습니다. 죽음을 향해 가는 노인들은 누구나 자신의 인생도 그럭저럭 괜찮았다고 믿고 싶어 합니다. 파헤치고 뒤집어 다시 들여다볼 힘이 없어요.

"

관계의 본질에 대한 새로운 이해


변지영은 질베르 시몽동의 관계 존재론을 소개하며 관계의 본질에 대해 설명한다. "관계는 두 사람 사이에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두 사람을 아무리 정확하게 분석하고 이해한다고 해도 파악할 수 없다. 두 개의 세계가 얽히어 상호작용하면서 각자의 존재를 만들어 가는 끝없는 생성의 과정이 관계인 셈이다."

이 관점은 내 상담 접근법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관계 문제를 개별 개체들의 문제로 접근하는 것이 아니라, 두 세계가 만들어내는 역동적 과정으로 이해하게 되었다.


현재 진행형 성찰: 순간의 진실


마테 블랑코는 무한을 맞닥뜨린 인간의 운명을 나르키소스에 비유한다. "물에 비친 대상은 너무도 생생해서 금방 만날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어떤 방법으로도 닿을 수 없다. 눈앞에 어른거리는 형상을 잡으려고 물에 손을 넣는 순간 일렁이며 흩어져 버린다."

내담자들이 엄마와의 진실한 만남을 갈망하는 모습이 바로 이와 같다. 그들은 나르키소스처럼 물가를 떠나지 못하고 서서히 말라 죽어 간다.

하지만 윌프레드 비온의 말처럼 "순간의 진실은 오직 될 수 있을 뿐, 알아낼 수는 없다." 진실은 스스로 드러나는 것이지 우리가 생각해서 알아내는 게 아니다.

요즘 상담실에서 나는 내담자들과 함께 이런 순간들을 기다린다. 설명할 수 없는 '있음'을 함께 경험하는 순간들을. 내담자가 침묵 속에서 눈물을 흘릴 때,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 옆에 앉아 있을 때, 그 공간은 이미 설명할 수 없는 '있음'으로 가득 차 있다.

바로 그때, 상담실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은 전혀 다르게 느껴진다. 시계 초침 소리, 창밖의 바람, 책상 위 연필 한 자루마저도 새로운 빛을 띤다. 마테 블랑코가 말한 '무한의 접촉'이 그렇게 일어난다. 아니, '일어난다'기보다는 '있다'고 말해야 옳다.


노력하는 현재


완벽한 해답을 찾은 것은 아니다. 여전히 많은 딸들이 엄마와의 진실한 대화를 갈망하며 내 상담실을 찾는다. 나는 여전히 그들을 말리면서도, 동시에 그들의 갈망을 이해한다.

변지영의 『순간이 빛일지라도 우리는 무한』을 읽으며 깨달은 것은,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은 '일어남'이 아니라 '있음'이라는 것이다. 연결은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있다. 순간의 진실도 마찬가지다.

오늘도 나는 내담자들과 함께 그런 순간들을 기다리고 있다. 생각으로 쪼갤 수 없는, 나눌 수 없는 전체의 순간을. 그 순간에는 딸도 엄마도 없다. 오직 '있음'만이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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