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히 만난 후배가 내게 물었다. 회사를 옮긴 지 6개월이 됐는데, 이상하게 전 직장 상사 생각이 자꾸 난다는 것이다. 그 상사는 특별히 잘해준 것도 없었고, 오히려 일을 많이 시켰다. 그런데 중요한 결정을 할 때마다 "그분이라면 뭐라고 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이런 경우는 어떤 상황인 거예요? 그냥 의존적인 성격으로 봐야 할까요?"
그때 동네 세탁소 사장님이 떠올랐다. 그는 40년째 같은 자리에서 세탁소를 운영한다. 손님들은 그에게 옷만 맡기는 게 아니라 고민도 털어놓는다. "사장님이라면 어떻게 하실 것 같아요?" 그러면 그는 특별한 조언을 하지 않는다. 그냥 "그래도 잘될 거야" 한마디만 건넨다. 그런데 이상한 건, 그 한마디를 듣고 나면 사람들이 결정을 내린다는 것이다.
조용헌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인간계의 존재가 진정한 프로페셔널이 되기 위해서는 조상의 영(靈)과 후손이 서로 통해야 한다고 생각한다"(조용헌, 2025: 127). 조상의 영. 낯선 표현이다. 하지만 바로 이거다. 우리 안에는 보이지 않는 존재들이 산다. 과거에 만났던 사람들, 그들이 건넨 말 한마디, 그 눈빛 하나가 무의식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다가 필요한 순간 나타나 일을 한다. 그게 현실이다.
무의식이 기억하는 것들
칼 구스타프 융은 집단무의식이라는 개념을 만들었다. 개인이 경험하지 않은 것까지 무의식에 새겨져 있다는 거다. 인류가 수천 년 동안 반복해온 패턴들이 우리 마음 깊은 곳에 원형으로 존재한다. 지혜로운 노인, 대지의 어머니, 영웅의 여정. 이 모든 게 이미 우리 안에 들어 있다.
주위를 보면 너나없이 비슷한 경험을 한다. 설명할 수 없는 직관을 느낀다는 것이다. "이 사람은 믿어도 될 것 같아" 또는 "이 일은 하면 안 될 것 같아" 같은 감각. 논리적 근거는 없다. 하지만 확신이 든다. 그게 바로 무의식이 보내는 신호다. 과거의 경험들, 만났던 사람들, 겪었던 상황들이 무의식에 패턴으로 저장돼 있다가 비슷한 상황에서 경고를 보낸다. 피부로 실감한다.
융은 이를 '그림자'와 '페르소나'로도 설명했다.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내면의 또 다른 자아. 그림자는 인정하고 싶지 않은 부분이고, 페르소나는 세상에 보여주는 가면이다. 하지만 진짜 자아는 그 사이 어딘가에 있다. 그리고 그 자아를 찾아가는 과정에서 우리는 과거에 만났던 사람들을 내면에 통합한다.
후배가 전 직장 상사를 떠올리는 것도 바로 이거다. 그 상사가 보여준 태도, 판단 방식, 일 처리 능력이 후배의 무의식에 각인됐다. 이제 그게 후배 안에서 하나의 목소리로 작동한다. 의사결정이 필요한 순간, 그 목소리가 자동으로 나타나 조언을 건넨다. 의존이 아니다. 내면화다. 별반 다르지 않다.
마트에서 본 할머니가 있었다. 장을 보다가 어떤 과일 앞에서 한참을 서 있었다. "우리 영감이 이거 좋아했는데." 남편은 2년 전에 세상을 떠났다. 하지만 할머니는 여전히 남편을 위해 장을 봤다. 남편의 취향, 습관, 목소리가 할머니 안에 살아 있었다. 그게 할머니를 움직이게 만들었다.
단순한 추억이 아니다. 내면화된 대상이 실제로 작동하는 거다. 할머니의 무의식 속에서 남편은 여전히 살아 있다. 그래서 할머니는 남편과 대화하고, 남편의 의견을 구하고, 남편을 위해 행동한다. 미신이 아니라 심리 작용이다. 조용헌이 말한 "귀신"과 융이 말한 "무의식 속 대상"은 같은 현상을 다른 언어로 표현한 것이다. 정확히 그거다.
집단무의식은 더 깊은 층에서 작동한다. 개인이 경험하지 않은 것까지 알고 있다. 인류가 수천 년 동안 겪어온 패턴들이 무의식에 새겨져 있다. 위험을 감지하는 본능, 관계를 맺는 방식, 의미를 찾는 욕구. 이 모든 게 거기서 나온다. 그래서 우리는 처음 만난 사람에게도 묘한 친숙함을 느끼고, 전혀 모르는 상황에서도 어떻게 해야 할지 직감적으로 안다. 누구든 마찬가지다.
여기서 핵심은 이거다. 이런 내면화가 무작위로 일어나지 않는다는 거다. 우리는 자신에게 필요한 것을 무의식적으로 선택한다. 후배가 그 상사를 내면화한 이유는 그 상사에게서 필요한 무언가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결단력이었을까. 일에 대한 태도였을까. 정확히 무엇인지는 모른다. 하지만 후배의 무의식은 알고 있었다. 확실하다.
관계가 만드는 내면 지도
존 볼비는 애착 이론을 만들었다. 아기와 양육자 사이에 형성되는 정서적 유대가 평생 영향을 미친다는 거다. 하지만 핵심은 내적 작동 모델이라는 개념이다. 우리가 경험한 관계들이 내면에 일종의 지도로 저장된다. 이 지도가 평생 작동한다. 일종의 법칙이다.
어린 시절 부모가 어떻게 반응했는지, 힘들 때 누가 도와줬는지, 실패했을 때 어떤 말을 들었는지. 이런 경험들이 쌓여서 관계에 대한 기본 도식을 만든다. "사람들은 믿을 수 있다" 또는 "사람들은 결국 떠난다" 같은 기본 믿음. 이게 형성되면 바꾸기 어렵다. 하지만 불가능하지는 않다.
그런데 놀라운 건 이거다. 이 모델이 무의식적으로 작동한다는 거다. 우리는 자신이 어떤 모델을 갖고 있는지 모른 채 그 모델대로 행동한다. 후배가 전 직장 상사를 떠올리는 건 그 상사가 후배의 내적 작동 모델에 통합됐기 때문이다. 단순하다. 하지만 강력하다.
애착 이론에서는 '안전 기지'라는 개념으로 이를 설명한다. 아기는 엄마를 안전 기지 삼아 세상을 탐험한다. 불안하면 엄마에게 돌아와 안정을 찾고, 다시 나가서 탐험한다. 이 패턴이 내면화되면, 성인이 된 후에도 비슷하게 작동한다. 어려운 도전 앞에서 우리는
내면의 안전 기지를 찾는다. 예외가 없다.
후배의 전 상사가 바로 그 안전 기지였다. 힘든 프로젝트를 맡길 때마다 "네가 하면 되지 뭐"라고 말했다고 한다. 처음에는 무책임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그 말 속에는 신뢰가 담겨 있었다. 그 신뢰가 후배 안에 들어와 자리 잡았다. 이제 후배는 새 직장에서도 그 신뢰를 꺼내 쓴다. 차의 성능이 좋아져도 휘발유나 전기 없이는 1밀리미터도 움직일 수 없듯, 내면의 신뢰 없이는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조용헌은 이렇게 말했다. "인간이 겪는 그 숱한 위기를 어떻게 자신의 힘만으로 벗어날 수 있겠는가! 보이지 않는 음조(도움을 받는 사람이 모르게 넌지시 도와줌)가 작용하는 것이다"(조용헌, 2025: 125). 정신분석으로 말하면, 그 보이지 않는 도움이 바로 내적 작동 모델이 하는 일이다. 딱 이거다.
애착 연구에 따르면 내적 작동 모델은 고정되지 않는다. 새로운 관계 경험을 통해 모델을 수정할 수 있다. 나쁜 관계 경험으로 "사람들은 믿을 수 없다"는 모델을 갖게 됐더라도, 좋은 관계를 만나면 모델이 바뀐다. "어떤 사람들은 믿을 수 있구나"로 업데이트된다. 그게 바로 치유다.
후배와 전 상사의 관계가 그랬다. 후배는 그 전까지 상사들에게 인정받지 못했다고 했다. 항상 부족하다는 말을 들었다. 그래서 "나는 능력이 없는 사람"이라는 내적 모델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그 상사가 달랐다. "네가 하면 된다"고 믿어줬다. 그 경험이 후배의 내적 모델을 바꿨다. 단 한 사람의 믿음이 한 사람의 인생을 바꾼다. 틀림없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건 이거다. 내적 작동 모델은 단순한 기억이 아니라 살아서 작동하는 시스템이라는 거다. 새로운 상황을 만나면, 과거의 관계 패턴을 자동으로 불러와서 대응 방식을 결정한다. 어려운 프로젝트를 맡으면, 과거에 비슷한 상황에서 누가 어떻게 반응했는지를 무의식이 검색한다. 그리고 가장 적합한 대응 방식을 제안한다. 택배 배달원처럼 먼 길을 떠나 필요한 걸 가져다준다.
세탁소 사장님의 "그래도 잘될 거야"라는 한마디가 손님들에게 힘이 되는 이유도 여기 있다. 그 한마디가 손님들의 내적 작동 모델에 새로운 데이터를 추가하기 때문이다. "힘들 때 누군가 나를 믿어줬다"는 경험이 쌓이면, 나중에 혼자 있을 때도 그 경험을 꺼내 쓸 수 있다. 산소 없는 곳에서는 숨을 쉴 수 없듯, 내면에 믿어준 사람의 목소리가 없으면 살 수 없다. 생존의 최소 조건이다.
내면의 목소리 활용법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이 내면의 목소리들을 활용할 수 있을까.
첫 번째, 인식하라. 내가 어떤 내적 작동 모델을 갖고 있는지 의식하는 거다. 간단한 질문으로 확인할 수 있다. "어려운 일 앞에서 나는 어떤 생각이 자동으로 드는가?" "나는 할 수 없어"라는 생각이 드는가, "해볼 만해"라는 생각이 드는가. 전자라면 과거에 지지받지 못한 경험이 많았다는 뜻이다. 후자라면 누군가 당신을 믿어준 경험이 내면화된 거다. 이걸 아는 것만으로도 반은 해결된다. 분명하다.
두 번째, 선택하라. 좋은 대상을 의식적으로 내면화하는 거다. 연구에 따르면, 성인이 된 후에도 내적 작동 모델은 수정 가능하다. 나쁜 모델을 갖고 있다면, 좋은 관계 경험을 통해 바꿀 수 있다. 나를 지지해주는 사람을 찾아라. 그리고 그 사람의 목소리를 내면에 들여라.
"당신을 가장 믿어준 사람은 누구였나요?" 이 질문에 답해보라. 그 사람이 뭐라고 말했는지 기억해보라. 그 말을 의식적으로 반복하라. 어려운 순간마다 그 목소리를 불러내라. 처음에는 어색하다. 하지만 반복하면 자연스러워진다. 그게 새로운 내적 작동 모델을 만드는 방법이다. 바로 여기가 포인트다.
세 번째, 전달하라. 스스로 누군가의 좋은 내적 모델이 되는 거다. 조용헌의 표현을 빌리자면, "귀신의 능력으로 축적한 재물은 사회에 환원해야 한다"(조용헌, 2025: 127). 받은 것을 나눠야 한다는 뜻이다. 당신이 받은 지지를 다른 사람에게 전해야 한다. 그게 바로 은혜를 갚는 방법이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할까. 후배나 동료가 어려워할 때 "넌 할 수 있어"라고 말해주는 거다. 한 번 하는 말이 아니라, 반복해서 믿어주는 거다. 그 말이 상대방의 내적 작동 모델에 들어간다. 나중에 그 사람이 혼자서도 "나는 할 수 있어"라고 말할 수 있게 된다. 그게 힘이다. 강한 위력을 지닌다.
정신분석에서는 이를 '벌림과 닫힘의 순환'이라고 부른다. 안전 기지가 있으면 세상으로 나가 탐험한다. 탐험하다가 불안하면 다시 안전 기지로 돌아온다. 이 순환이 건강하게 작동하려면 안전 기지가 안정적이어야 한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안전 기지가 돼줄 때, 그 사람은 더 멀리 나가 도전할 수 있다. 그게 바로 관계의 힘이다.
내적 작동 모델에는 나쁜 목소리도 들어 있다. "넌 안 될 거야"라고 말했던 사람의 목소리도 있다. 그럴 때는 의식적으로 구분해야 한다. "이건 내 생각이 아니라 그 사람의 생각이었어"라고 인식하는 거다. 그리고 좋은 목소리로 교체해야 한다. "나를 믿어줬던 사람은 뭐라고 했지?" 이게 전부다.
후배에게 이렇게 말해줬다. "전 상사를 떠올리는 건 의존이 아니야. 그분이 네 안에 들어온 거야. 그분의 믿음이 이제 네 믿음이 된 거지. 그 믿음을 활용해. 중요한 결정을 할 때마다 '그분이 날 믿어준 것처럼 나도 나를 믿어보자'고 생각해봐. 그리고 네가 후배를 만나면, 네 안에 있는 그 믿음을 전해줘. 그게 연결이 이어지는 방식이야."
후배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혼자가 아니다. 내 안에는 만났던 사람들이 산다. 그들의 목소리가 필요한 순간마다 나타나 일을 한다. 그게 바로 보이지 않는 힘이다. 그 힘을 믿고, 좋은 목소리를 키우고, 다른 사람에게 전하는 거다. 그게 우리가 할 일이다. 거기까지다.
조용헌(2025). 팔자를 고치다. 서울: 삼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