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래에 조용하고 빠르게 확산하는 현상이 있다. 공감 숭배다. 의료진의 진단도 없이, 전문가의 개입도 없이, 공감이 모든 관계 문제의 해답이라는 믿음이 급격하게 늘고 있다.
현장에서 자주 목격한다. 회사에서도, 학교에서도, 가정에서도. 사람들은 공감을 배워야 한다고 말한다. 공감 능력이 떨어지면 관계가 실패한다고 믿는다.
틀렸다. 완전히 틀렸다.
내가 상담실에서 본 건 다르다. 공감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되는 폭력이 있다. 공감이라는 미명 아래 사람들이 침묵당한다. 공감이라는 포장지로 감정이 단순화된다.
바로 이거다. 공감은 만병통치약이 아니다. 잘못 쓰면 독이 된다.
"네 마음 이해해" - 침묵 강요의 시작
회사 근처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있었다.
한 남자가 동료에게 말하고 있었다. 30대 초반쯤 돼 보였다.
"이번 승진에서 또 떨어졌어. 3년째야. 내 프로젝트 결과가 좋았는데도. 팀장이 내 아이디어를 자기 거라고 보고했더라고."
목소리에 분노가 섞여 있었다. 주먹을 쥐었다. 턱에 힘이 들어갔다.
동료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마음 이해해. 진짜 화나겠다. 팀장이 너무하네."
친절한 목소리였다. 공감이었다. 진심 어린 눈빛이었다.
그런데 그 남자가 멈췄다. "응... 그래..." 말을 잇지 못했다.
동료: "많이 속상하겠다. 힘내. 다음엔 잘될 거야."
남자: "...그래. 고마워."
대화가 끝났다.
나는 이상한 걸 봤다. 그 남자는 더 말하고 싶어 보였다. 하지만 말할 수 없었다.
왜? 동료가 이미 자신을 '이해했다'고 선언했기 때문이다.
동료가 "네 마음 이해해"라고 말한 순간, 그 남자는 더 이상 말할 권리를 잃었다. 더 말하면 같은 이야기를 반복하는 것 같았다. 공감받았으니 이제 그만 털어놓고 넘어가야 할 것 같았다.
친구의 공감이 그를 침묵시켰다. "네 마음 이해해"라는 말이 사실은 "이제 그만, 알았으니까"라는 신호로 작동한 것이다.
그가 진짜 말하고 싶었던 건 뭐였을까?
어쩌면 분노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자괴감도 있었을 것이다. '내가 부족해서 승진 못 하는 건가?' 안도감도 있었을 것이다. '승진 안 해서 오히려 편한가?' 혼란도 있었을 것이다. '계속 다녀야 하나, 이직해야 하나?'
하지만 동료의 공감은 그의 감정을 하나로 단순화했다. "화나겠다." 다른 감정들은 사라졌다.
바로 이거다. 공감이라는 이름의 폭력.
이해한다는 착각
병원 대기실에서 본 장면이다.
한 여자가 친구에게 말하고 있었다. 40대쯤 돼 보였다.
"엄마가 돌아가셨어. 한 달 전에. 갑자기."
친구가 손을 잡았다. "오빠도 그랬잖아. 네 마음 완전 알아. 진짜 힘들지."
여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뭔가 이상했다. 표정이 굳어 있었다.
친구: "많이 울었어?"
여자: "아니... 잘 안 나와."
친구: "괜찮아. 슬픔은 시간이 지나야 돼. 나도 그랬어."
대화가 끝났다.
나는 생각했다. '저 친구, 진짜 이해한 걸까?'
사람들은 공감을 감정의 복사라고 착각한다. 상대가 슬프면 나도 슬퍼지고, 상대가 화나면 나도 화가 나는 것. 그걸 공감이라고 부른다.
완전히 틀렸다.
정신분석에서 말하는 공감은 전혀 다른 차원이다.
그레고리 바우어는 치료자의 태도에 대해 명확히 말한다. "환자의 이야기가 잠재적인 전이 감정에 대한 암시라는 확신이 들더라도, 그 이야기가 진정으로 뜻하는 바를 환자에게 곧바로 말한다면 저항에 부딪힐 것이다. 잠재적인 내용이 곧 환자가 진정으로 말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Bauer, 2014: 253).
읽고 또 읽어라. 이 문장을.
"잠재적인 내용이 곧 환자가 진정으로 말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핵심은 이거다. 환자가 "진정으로 말하고 있는" 것과 치료자가 "파악한" 것 사이에는 간극이 있다. 그 간극을 존중해야 한다.
일반인의 공감은 이 간극을 무시한다. "내가 당신을 이해해"라고 선언하는 순간, 상대가 진정으로 말하려는 것을 가로막는다.
저 병원 대기실의 여자. 엄마가 돌아가셨다고 했다. 친구는 "슬프겠다"고 이해했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어쩌면 그 여자는 슬프지 않았을 수도 있다. 안도했을 수도 있다. 엄마와 관계가 나빴다면? 평생 엄마한테 억압받았다면? 엄마가 돌아가신 게 해방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감정을 말할 수 없다. 친구가 이미 "슬프겠다"고 규정했기 때문이다. 사회가 "부모가 돌아가시면 슬퍼해야 한다"고 정해놨기 때문이다.
친구의 공감이 그녀를 슬픔이라는 감정 안에 가뒀다. 다른 감정들은 억압됐다.
감염과 이해의 차이
김형경 작가의 사례를 보자. 이건 진짜 공감이 뭔지 보여주는 결정적 장면이다.
30대 후반 여성 내담자가 있었다. 여러 해 동안 김형경을 찾아왔다. 의존적이었다. 매번 같은 문제를 들고 왔다.
어느 날 김형경이 독하게 직면시켰다. "왜 아직도 나를 찾아와 이런 것을 달라고 하느냐?"
날카로웠다. 따뜻하지 않았다. 공감적이지 않았다.
그날부터 그 여성이 변했다. 자기 마음을 알아가기 시작했다. 스스로 답을 찾기 시작했다.
몇 달 후, 그녀는 아버지 이야기를 꺼냈다. 아버지는 흥남 철수 세대였다. 14세에 형제들과 함께 남쪽으로 내려왔다. 평생 그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딸이 처음 물었고, 아버지가 처음 말했다.
상담실에서 김형경이 '굳세어라 금순아'를 언급했다. 그 여성은 그 노래조차 몰랐다. 스마트폰으로 검색해서 가사를 읽기 시작했다.
"눈보라가 휘날리는 바람 찬 흥남..."
그러다 멈췄다.
"이건 나중에 혼자 있을 때 읽어야겠어요."
그 순간, 김형경에게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내면에서 느껴지는 슬픔을 회피하는 순간, 그 모든 것이 고스란히 내게로 건너왔다. 폭포수를 뒤집어쓰는 듯한 슬픔이 온몸을 감쌌다. 어지럼증이 지나가면서 거짓말처럼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눈 주변 근육이 마비된 듯 눈물이 제어되지 않았다"(김형경, 2017: 1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