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생대 백악기 건천리층
경주에서 지인의 결혼식이 있어 뜻하지 않게 경주를 가게 되었습니다. '천년고도 경주'하면 불국사나 첨성대 같은 신라시대 유적이 우선 떠오르겠지만, 제 관심사는 화석이 더 우선이라 경주시내에서 가까운 건천리에 들러 중생대의 시간 속으로 들어가 보기로 했습니다.
영천을 거쳐 경주로 갑니다.
지나는 길 바로 옆으로 지층이 보입니다. 약 1억 년 전 만들어진 중생대 백악기 지층입니다. 지층아래 부스러기처럼 나뒹구는 돌을 살펴보면 이매패나 복족류 화석을 찾을 수 있습니다. 조금 아쉽지만 여기서 화석을 찾고 있을 만큼 충분한 시간 여유는 없네요.
조금 더 가니 영천의 명물 돌할매가 나옵니다. TV에도 몇 번 소개되었죠.
돌로 조각상을 번듯하게 만들어 놓았네요. 손에 큰 알 같은 걸 들고 있는데 그게 바로 돌할매입니다. 돌할매가 돌할매를 들고 있다고 해야 할까요? 아니면 돌할매가 돌할매에 안겨있다고 해야 할까요?
뭐가 됐든 앞서 나온 건 가짜 돌할매입니다. 진짜는 따로 있죠. 진짜 돌할매가 너무 궁금해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보러 갑니다. 이놈의 호기심...
약수터 바가지가 있네요. 예전엔 그냥 생각 없이 바가지로 물을 떠 마셨는데, 생각해 보면 이 사람 저 사람이 입을 댄 걸 쓴다는 게 조금 위생적으로 좋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코로나 사태를 겪으면서 사람들의 위생관념이 예전보다 많이 좋아진 긍정적인 측면이 있습니다.
대학 다닐 때까지만 해도 술잔 돌리기, 신발에 술 부어 마시기, 찌개에 여러 사람이 숟가락 넣어 아밀레이스 나눠먹기, 아이스크림 한입충 등 지금 생각해 보면 미개한 일이 참 많았죠.
경건한 마음으로 기도를 하고 있네요. 돌할매가 소원 하나는 꼭 들어준다고 합니다.
가운데 있는 알 같은 것이 바로 돌할매입니다. 이 동그란 돌할매는 언제인지는 정확하지 않지만 몇백 년 전부터 이 마을에서 영험한 수호신 역할을 했다고 하네요.
무게가 약 10kg 정도인데, 경건한 마음으로 기도를 하고 돌을 한번 들은 다음, 자신의 신분을 밝히고 소원을 빌고 돌을 다시 들었을 때 이전보다 무겁게 느껴지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네요.
그런데 보통 두 번째 들으면 힘이 빠져 더 무겁게 느껴지는 것이 아닐까?
가볍게 느껴지면 꽝이랍니다. 저는 무게 차이를 잘 못 느꼈습니다. 욕심쟁이라 돌할매가 소원을 안 들어준 듯합니다.
아무튼 돌할매도 구경하고 결혼식도 다녀오고 시간이 넉넉하게 남아 경주 건천리에 들러 화석탐사를 해보기로 합니다.
약 1억 년 전 중생대 백악기에 형성된 건천리층이 잘 드러나 있는 노두 즉 지층의 모습입니다. 중생대의 대표적인 동물로는 공룡과 암모나이트가 유명한데, 우리나라에서 공룡 화석은 여러 차례 발견되었지만 암모나이트는 단 한 번도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왜 우리나라는 암모나이트가 발견되지 않을까요?
이유는 의외로 간단합니다. 우리나라는 바다에서 형성된 지층인 '중생대 해성층'이 전무하기 때문이죠. 암모나이트는 바다에서 살았던 동물이니 발견되지 않는 것이 당연합니다. 따라서 중생대 지층에서 발견되는 이매패, 복족류, 어류는 모두 민물에서 살았던 생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멀쩡한 지층 노두에 작은 망치를 가지고 덤벼드는 것은 실로 무모합니다.
때문에 공사가 오래 중단된 곳에 무너져 내린 폐석더미를 살펴보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오후 들어 낮 최고 기온이 무려 30도가 넘을 정도로 뜨거웠고, 태양의 직사광은 마치 지옥의 불길인 인페르노와 같이 따가웠습니다.
자동차에서 에어컨 바람을 쐬며 대기하다가 구름에 해가 가려졌을 때를 틈타 잽싸게 튀어나와 전석을 두드리고, 다시 해가 나오면 자동차로 도망치는 게릴라 식 탐사를 했습니다.
폐석 더미 사이에 이매패의 단면이 드러난 화석이 보입니다. 잘 모르면 화석인지도 모르고 지나칠 만큼 성의 없게(?) 생긴 화석이네요.
생뚱맞게도 폐석 더미에 이질적인 유백색 이암이 더러 보입니다. 바로 포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떡돌이죠. 이게 어쩌다 여기에 와서 버려졌는지 알쏭달쏭합니다. 만만한 돌을 하나 두드려보니 이매패 화석이 모습을 드러냅니다. 중생대 지층이 있는 곳에서 신생대 화석이 튀어나오다니, 시공을 초월한 만남이네요.
약간 회색빛을 띠고 있는 건천리층 암석입니다. 망치로 몇 번 두드리니 이매패 화석들이 모습을 드러냅니다.
이것들은 중생대에 번성했던 이매패인 유삼각 조개 '트리고니오이데스 파우시술카투스(Trigonioides paucisulcatus)'입니다. 모암이 입자가 곱고 무른 실트암이라 살살 두드리면 부서지며 상대적으로 단단하게 경화된 화석들이 툭하고 떨어져 나옵니다.
이 정도면 누가 봐도 조개라는 것을 대번에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상태가 좋은 경우 패각에서 여러 겹의 'V'자 형태(삼각형) 문양을 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이름이 유삼각 조개로도 불리는 것이죠.
크기는 긴 쪽으로 대략 3~5cm가 일반적입니다.
유삼각 조개 오른쪽에 현생 다슬기 비슷한 것이 보입니다.
건천리층에서 유삼각 조개보다 더 흔하게 볼 수 있는 것이 복족류인 '시라기멜라니아 타테이와이(Siragimelania tateiwai)'입니다.
일제시대에 경주 건천리 시장에서 한약재로 팔리는 것을 목격했다고 보고한 일본 지질학자 '타테이와'의 이름을 딴 화석입니다.
당시 민간에서 이것을 삶아 복용하면 뼈를 다친 데 효험이 있다고 해서 먹었다고 하며, 비교적 근래까지도 교통사고로 인한 골절 환자들이 종종 먹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화석엔 납을 비롯한 중금속과 여러 유해물질이 많이 함유되어 있다는 것이 실험을 통해 밝혀졌습니다. (제63회 전국과학전람회 출품작 '화석, 먹지 마세요!') 따라서 민간요법으로 믿고 먹으면 좋을 게 전혀 없습니다.
화석을 용의 뼈인 용골(龍骨)로 알고 먹은 역사가 꽤 깊습니다. 지금도 중국 한약재 시장에서는 신생대 동물의 뼈 화석을 용골이라고 판매를 하고 있으며 우리나라에도 일부 수입이 되어 유통되고 있습니다.
화석 구경도 어느 정도 했고, 더위도 식힐 겸 시원한 커피라도 마시려 건천 읍내로 들어왔습니다. 오래전, 이 건천 시장 어딘가에서 복족류 화석을 한약재로 팔던 곳이 있었을 것입니다.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재래식 전통시장이 현대식으로 깔끔하게 리모델링이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날 시장에서 손님은 물론 상인조차 거의 보지 못했습니다. 상설시장 형식의 건물을 갖추고 있지만 실상은 5일마다 장이 열리는 정기시장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역사 깊은 건천 시장이 지금도 지역 시장으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네요.
한약재로 화석을 팔던 그 시절의 분주한 장터는 사라지고,
광장은 말끔해졌지만 화석과 함께 사람들도 사라졌습니다.
건천리가 행정구역상 경주시에 들어있긴 하지만 농촌 마을의 모습입니다.
유동인구도 없어 거리가 너무 썰렁했고, 그나마 가끔 보이는 사람도 대부분 나이 지긋한 노인들이네요.
이곳 지명이 건천(乾川)이 된 데는 아마도 마을을 가로지르는 이 하천이 종종 말라버려서 붙은 이름으로 보입니다.
경주 건천, 화석처럼 시간이 멈춘 마을 같은 느낌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