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ghly Sensitive Persen : 고도 민감성 개인
우연한 계기로 뇌파 검사를 받게 되었다. "너는 너무 생각이 많아." "생각 좀 그만해."라는 말을 살면서 수도 없이 듣곤 했는데, 눈에 보이지 않는 내 머릿속 생각의 존부를 타인이 어떻게 알고 그런 말을 한 건지 지금 생각하면 신기하다. 그렇게 많은 생각을 하면서도 정작 내 뇌를 들여다볼 일이 있으리란 생각은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었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뇌파검사는 머리에 그물망을 쓴 채로 수조에 들어있던 축축한 촉수 같은 것을 머리 곳곳에 붙인 채 눈을 감고, 눈을 뜨고 벽을 응시하며 진행되었다. 애써 머릿속을 비우지 않았고, 특별히 부정적이거나 긍정적 감정도 의식적으로 떠올리지 않으려 애쓰며, 평소 의식의 흐름에 맡긴 채 검사를 진행했다. 검사 결과지에는 두 가지 유형의 뇌 그림들이 인쇄되어 있었는데, 하나는 빨강-파랑-노랑-초록의 색으로 각각의 구역이 칠해진 형태였고, 다른 하나는 점들이 분포하고 여러 선들이 그 점을 꼭짓점처럼 연결하고 있는 형태였다. 전자의 경우 초록색이 정상, 후자의 경우 아무 선이 없는 것이 정상이라는 것이 의사의 설명이었다.
설명을 듣고 나는 놀랐다. 초록이 정상이고 아무런 선이 없는 것이 정상. 첫 번째 유형에서 내 검사지 위 뇌 그림에는 빨강 파랑 노랑이 곳곳에 분포되어 있었다. 특히 빨간색 큰 덩어리가 한가운데 눈에 띄게 커다랗게 자리 잡고 있었는데, 의사는 그 빨간 덩어리를 '불안'이라고 알려주었다. 두 번째 그림에서는 빈 공간이 오히려 드물정도로 아주 많은 선들이 복잡하게 얽혀있었다. 선이 없는게 정상이라니. 외부 자극이 없이 눈을 감고 받은 검사임에도 그랬다. 휴식 중에도 내 뇌는 사고를 멈추지 않는다는 거다. 나는 과도하게 각성된, HSP(Highly Sensitive Persen)였다.
나는 삼십 년 이상을 사는 동안 내가 특별히 불안하거나 우울한 사람이라고 생각한 적이 없다. 그렇게 규정지으면 왠지 약하거나 불완전한 사람으로 느껴졌고, 스스로를 그렇게 평가하고 싶지 않았다. 다른 사람의 뇌로 살아본 적이 없는 까닭에, 나만 특별히 더 예민하다거나 남달리 특이하다고 느낀 적도 없다. 생각이 많다는 지적을 들을 때면 생각하기 때문에 존재한다는 철학자 데카르트의 말처럼, 사유가 존재의 근거이고 생각이 없다면 동물과 다를 바가 뭔가, 하는 생각을 했을 따름이다.
검사지에 인쇄된 내 뇌 속 빨간 덩어리 형태의 불안을 눈으로 마주하게 된 순간, 나는 그것의 존재를 인정하기로 했다. 내가 왜 사계절 내내 기온과 무관하게 담요를 무릎 위에 두고 있는지, 지금 이 나이에도 잘 때 인형을 안고 자는지, 어떤 부드럽고 폭신한 촉감을 통해 불안을 다스리고 안전함을 느끼고 싶었던 내 무의식이 작동했던 건가 보다. 언젠가 누군가 내게 말해주었다. "생각이 많으세요. 생각이 많은 건 불안 때문이에요." 하고. 그땐 나에 대해 뭘 안다고 저렇게 말을 하나. 좀 무례하다고 느꼈는데, 나를 정확하게 본 것이었다. 불안이란 어떻게 정의하면 될까. 편안하지 않은 상태일까, 안전하다고 느끼지 않는 상태일까. 두려운 상태일까.
나의 불안은 HSP와 관련이 있을 듯하다. 너무 많은 것이 동시에 감지된다. 어떤 경험을 할 때, 시각뿐 아니라 그 순간의 온습도 같은 촉각, 후각, 청각, 감정이 비디오처럼 저장이 되는데, 나는 늘 생각 중이기 때문에 머릿속에서 그 영상들이 끊임없이 재생된다. 재생되는 영상에서 새로운 디테일과 정보를 발견하고, 그에 대해 다시 생각한다. 내 인생의 주된 장르는 희극이 아닌 까닭에, 영상의 무한 생성과 재생이 내 스스로를 해치기도 하고, 그 과정의 반복이 결국 내 뇌를 탈진시키고 갉아먹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기도 한다. 의사는 내 과각성 상태를 무디게 하고, 생각을 덜 해야 보통의 사람들처럼 편안해질 수 있다고 했다.
그런데 불안한지도 모르고 살아왔던 내가 보통의 사람들처럼 편안해지기를 원하는지, 그게 가능한 일인지. 그건 앞으로 생각을 조금 더 해 볼 주제로 두려고 한다. 이 불안과 과각성이 어떤 불편한 축복같달까. 그렇게 나는 여전히 과도하게 생각하고, 존재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