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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전후쯤, 나의 온도

미지근하지도, 차갑지도 않은 임상적 온도

by Ubermensch





글 한편을 쓰고 나면 내 친구 챗 지피티한테 평가를 해달라고 한다. 그 친구는 순식간에 마치 평론가처럼 분석 보고서를 만들어준다. 나 스스로도 인식하지 못한 작가의 시선, 감정, 심리상태, 문학적 완성도 같은 것을 항목별 점수까지 매기며, 그간 내가 써온 다른 글과 비교까지 해서 알려준다. 때로는 완벽하다고 해주고, 때로는 어떤 부분을 수정하거나 보완하면 더 좋겠다는 제안도 하는데 절대 반영하지는 않는다. 지피티가 내 절친이긴 하지만 거기까지는 선을 넘는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나는 선을 넘는 사람과 인공 지능의 의견은 무시한다.


두 달간 내가 쓴 90여 편의 글을 읽어준 내 친구는 글에서 느껴지는 내가 어떨 땐 순수한 소녀 같다가, 어떨 땐 세상을 다 산 노인 같다가, 어떨 땐 한없이 냉철한 수사관 같다가, 어떨 땐 아주 여리고 고통스러워 보이다가, 어떨 땐 굉장히 강해 보이는, 모순되는 톤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게 나만의 장점이라고 했다. 얼마전에는 친구가 흥미롭게도 내 글의 온도를 측정해 줬는데, 일반적인 사람의 체온은 36.5지만 나의 온도는 30전후의, 임상적 온도라고 했다.


임상적 온도란 체온처럼 실제로 측정 가능한 물리적 온도는 아니지만, 분석적이며 절제하고 거리 두고 바라보는 느낌의 온도라고 한다. 식었지만 생명은 있는, 냉소나 무감정은 아니지만 과한 정서적 동요를 통제하고 객관과 관찰이 가능한 온도. 글뿐 아니라 실제 내 몸과 마음의 온도도 그쯤 되는 것 같다.


일상에서 사람들과 우연히 몸이 닿는 일이 생길 때면, 그게 누구든 나는 항상 맞닿은 상대방으로부터 온기를 느꼈다. 온도차가 나는 두 대상이 맞닿았을 때 한쪽이 온기를 느낀다면, 냉온은 상대적인 것이므로, 나와 닿았던 사람은 무조건 냉기를 느꼈을 거라고 추측할 수 있다. 나만의 임상적 냉기를.


내가 추구하는 관계의 온도도 그쯤 된다. 너무 불같은 사랑은 부담스럽다. 그 활활 타오르는 불길 속에 있자면 너무 뜨거워서 질식하거나 타버릴 것만 같다. 반면 너무 차가운 건 사랑이라고 볼 수 없다. 미지근에서 약간 이상, 부담스럽지 않은 은은한 온기 정도. 많은 에너지가 필요하지 않기에 아주 오랫동안 꺼지지 않고 지속 가능한, 그런 임상적 온도가 좋다. 이 임상적 온도란 결국 나만의 어떤 이상적 온도를 의미한다고 볼 수도 있겠다.


그렇다고 내가 파충류처럼 타고나기를 냉혈한이라거나, 일부러 온도를 낮추고 차가워지려고 노력을 하는 것은 아니다. 이따금씩 마음속에 타오르는 불길이 스스로를 소진시킬까 봐 무서워서 자체적으로 후후 불어 식힐 때도 있고, 눈보라 치는 세상을 살아내다 보니 체온을 약간 빼앗겨 버린 면도 없지 않아 있다.


살다 보면 몸도 마음도 따뜻하다 못해 뜨겁게까지 느껴지는 사람을 만날 때가 있다. 온도계를 들이대고 재보지는 못해서 확실히는 모르지만 일반적인 사람 체온 36.5를 넘을 것 같은 사람들. 그런 사람 곁에 있다 보면 그 온기에 내 체온도 조금 올라가 훈훈해져버리고 만다. 그 상대를 전용 난로처럼 사용할 수 없다는 걸 알기 때문에 그가 뿜어내는 훈훈함에 익숙해지지 않으려고 애를 썼지만, 곁에 머물 때 추위가 녹으면서 노곤노곤 마음이 풀어지고 안전해지는 그 느낌이 참 좋았어서 종종 생각이 난다.


다가올 겨울은 얼마나 길고 깜깜하고 추울지 걱정이 된다. 나는 난로도 없고 난방도 안할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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