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절

좋은 기억이 없던

by Ubermensch






몇 년 전 할머니가 돌아가신 것을 마지막으로 명절에 찾아갈 친가가 없어졌다. 처음에는 아빠, 그다음엔 할아버지 그다음엔 할머니가 세상을 떠났다. 나를 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있는 곳에 가지 못하는 것은 항상 마음 한 켠에 죄책의 무게로 묵직하게 남아있어서, 더 이상 갈 곳이 없다는 사실은 서글픔과 안도의 감정을 동시에 준다. 어린 시절 언젠가부터 엄마는 명절에 친가에 가지 않았다. 어린 동생과 나만 보냈다. 나 혼자 가거나. 가정이 망가지고 가족들이 모여도 괴로운 아빠는 자리를 지키지 않거나 술에 취해 있곤 했다. 그래서 나는 나를 유독 끌어안아 싸고도는 할머니 품 말고는 특별히 갈 곳이 없었다. 고모네, 작은아빠네 식구들은 다들 가족 단위로 행복해 보였다. 우리 원가족은 늘 조각나있었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친가에 있는 것은 슬펐고, 외가에 있으면 항상 욕과 고성과 폭력이 난무했다. 가만히 밥을 먹다 티비 프로그램에 소녀가장이나 불우이웃이 힘들게 사는 장면이 나오면 외할아버지는 내가 저렇게 살아야 한다고 했다. 내가 먹는 것도 아까워했다. 외가 식구들은 나 때문에 엄마가 고생을 하고 엄마 등골을 빨아먹으며 엄마 인생을 망친 애 취급을 했다. 그러면 나는 숟가락을 던지거나 소리를 지르며 울었다.


왜 항상 이런 소리를 듣고 이런 취급을 받고 살아야 하는지 진절머리가 났다. 터울이 많이 나는 내 남동생은 예외였다. 그 집에서는 엄마도 불쌍하고 동생도 불쌍한데 나만 아니었다. 안 버려진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해야 한다고 했다. 내게 항상 아빠나 친가나 내 욕을 했다. 엄마는 가만히만 있었다. 나는 무수한 울음과 비명과 전쟁을 거쳐 성인이 되고나자마자 독립한 이후부터는 명절에 본가에 거의 안 갔다. 혼자 있었다. 명절이 즐겁거나 행복했던 기억이 거의 없다. 그래서 나는 보통 사람들에게 형식적인 명절 인사도 잘 안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집안에서 가장 모범적으로 성장해 가장 자랑할 만한 자식이 되었다. 겉보기엔 그렇다. 지긋지긋하고 답 없는 현실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내가 최선을 다해 미래를 바꾸는 방법밖에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치열하게 공부했다. 단 한번의 탈선을 한 적도 사고를 친 적도 없다. 특별히 정서적으로나 물질적으로 큰 지원을 받진 못했지만 악착같이 공부해서 상위권 대학에 갔다.


고시준비를 하거나 대학원에 가고 싶었지만 집안 형편상 바로 취업을 해야 했다. 그게 한으로 남았다. 어쨌거나 보편적인 기준에서는 그럭저럭 좋아 보이는 직장에 다니게 되고 본가에 발길을 끊자 그제야 외할머니는 나를 애타게 찾는다. 뒤늦게서야 사랑한다고 하고 자꾸 전화를 걸고 미안해한다. 나는 아주 긴 시간 외할머니 외할아버지를 증오하다가 증오하는 나 스스로가 너무 괴롭고 힘들어서 대충 용서하기로 했다. 하지만 서른 중반이 넘은 아직도 나는 그 시절의 꿈을 꾼다. 가위에 눌리면서.


우리 사무실에서 종종 이야기하는 주제가 있다. 너무 급진적인 관점이라 남들은 비난할지 모르지만 앞자리 계장님과 의견이 일치하는 부분이다. 난데없이 세상에 태어나 학대당하고, 방치당하고, 고통받고, 나아가 생명까지 잃는 아이들이 너무 많아서 그렇다. 우리는 자식을 낳으려면 어떤 자격시험을 통과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태어나게 해달라고 요청해서 태어나는 아이는 없다. 부모라면 자기 자식을 보호하고 돌보고 최소한의 책임을 져야 한다. 아이가 울면 안아주고 달래줘야 한다. 내가 울 때는 보기 싫으니까 안 보이는 데 가서 울라고 했다. 스스로 방어할 능력이 없는 아이를 방치하고 내몰고 학대한 흔적은, 그 아이가 자라 성인이 되어도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한 사람의 인생에 그림자를 드리우는 일이다. 집에서 연휴에 오라고 연락이 여러 통 왔다. 안 간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