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언어적 소통법

시선, 침묵, 공기로 지음(知音)

by Ubermensch


나는 언어를 전공한 사람이다. 전 과목 중 언어 성적이 가장 높았고, 학창 시절 내내 작문 분야에 관련한 수상이 많았다. 고등학교땐 교지편집부, 대학 시절에는 기자 생활을 했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언어를 활용한 소통보다 비언어적 소통을 좋아한다. 아주 드물지만 그 소통이 가능한 사람을 좋아한다.


발화 형식의 대화란 사실 아주 피곤한 일이다. 뇌에서 사유를 거쳐 문장을 구성하고 성대를 진동시켜 상대방에게 전달될 만큼의 소리를 만들어내야 한다. 또한 반대로 말소리를 듣는 것도 매우 피곤한 일이다. 내 귀가 선호하지 않는 음역대를 가진 사람들이 있다. 돌고래처럼 날카로워서 귀가 찌릿찌릿해지거나, 너무 커서 고막을 윙윙 울리거나, 너무 희미하게 뭉개져서 여러 번 반복하는 청취 노동을 해야 하는 경우도 있다.


결론적으로 발화 형식의 대화에서는 불필요한 에너지를 쓸 일이 많다. 물론 세상 모든 사람들이 소리 내어 대화하는 게 일상이고, 대화는 사회에서 필수적이고도 당연한 상호작용이며, 나도 필요한 경우에 사람들과 대화를 하므로. 대화가 불필요한 에너지 사용이라는 표현은 좀 소시오패스스럽고 극단적인 관점이라는 사실에 대해 인정하는 바다.


그럼에도, 우리는 세상을 살다 보면 굳이 저 소모적이고 피곤한 발화의 과정을 거치지 않아도 되는, 지음(知音)의 대상을 만나기도 한다. 내가 말로 표현하지 않아도, 내 머릿속이나 마음속에 품고 있는 생각과 감정을 그대로 느끼고 읽어주는 사람을 만나는 행운을 마주할 때가 있다. 보통 그런 경우, 나도 그 상대를 읽어줄 수 있다. 물론 그런 관계가 되기까지, 서로에 대한 앎의 시간이 차곡차곡 쌓여야 하고 충분한 깊이가 생겼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그리고 그 단계에 이르기까지는 분명 언어가 필요하다.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일단은 언어의 형태를 통해 교류해야 구체적으로 학습할 수 있고, 그래야 궁극적으로 그 사람의 세계에 발을 디딜 수 있기 때문이다.


한번 형성된 이 관계의 세계는 특별하다. 이런저런 맥락에 대한 부연 설명이 딱히 필요 없다. 한 번의 눈길, 몇 초간의 침묵, 순간 뿜어내는 공기의 온도로 충분히 의사소통이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미안해, 고마워, 좋아해, 걱정하고 있어, 부끄러워, 나는 네 편이야. 이런 류의 표현은 굳이 언어로써 표현하지 않아도 충분히 전하고 전달받을 수 있다. 물론 그 관계에 공고한 신뢰가 확보되어 있고, 그런 비언어적 소통을 감지할 만큼 예민한 촉수가 발달된 사람들 사이에서만 이런 방식의 상호작용이 가능하다. 내 인생을 거쳐간 그런 사람들 몇몇이 떠오른다.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들어주던 사람. 큰 눈에 마음을 투영하던 사람. 지금은 더 이상 서로의 언어를 나누지 못하는 사람에게 전한다.


괴로워하지 마세요. 응원합니다. 행복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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