턱 들고, 어깨 펴고, 당당하게 걷기
며칠 전 아파트 분리수거날 일이다. 출근 전에 머리를 덜 말린 채로 재활용품을 잔뜩 싸들고 엘리베이터를 탔는데, 엄마 뻘 되어 보이는 아주머니가 뒤이어 타더니 느닷없이 말을 걸었다. 밥은 먹고 다니냐고. 너무 말랐다고. 밥은 먹고 다니냐니, 생판 처음 본 남에게 듣기에는 조금 생경한 말이어서, 웃음이 터졌다. 아주머니는 여전히 걱정이 된다는 듯 다이어트하는 거냐고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말을 이어갔다. 그런 게 아니고 밥 잘 먹고 운동도 하고 건강하다고 안심시켜 드리곤 함께 분리수거를 했다. 아마 내가 딸처럼 보였나 보다.
최근 이런저런 일신상의 사유로 살이 꽤 빠졌다. 회사에서도 복도를 걷다 보면 피죽도 못 먹은 사람처럼 왜 그렇게 말랐냐, 안쓰러워 보인다는 말을 종종 듣곤 한다. 피죽도 못 먹는 건 아니고, 뭐 밥도 먹고 술도 마시고 야식도 먹고 운동도 한다. 1년 만에 인바디를 재봤는데, 162cm가 조금 넘는 키에 45kg이 나왔다. 원래 마른 체질이긴 했지만 꾸준히 운동하면서 술과 야식을 곁들여왔고, 나잇살 때문인지 서른 중반에 들어서는 50kg대 초반정도로 유지하고 있었다. 깡 마른 건 아니지만 보기 좋게 탄탄한 몸이라고 생각했는데, 최근엔 좀 병약해 보이나 보다.
그럼에도 인바디상 수치는 꽤 훌륭했다. 근육량은 상체는 표준-하체는 표준 이상, 체지방은 상하체 전부 표준 미달이었고, 종합 결론은 저체중 강인형이랬다. 살면서 여러 운동을 꾸준히 해 왔던 편이지만 최근 1년간은 발레만 했는데, 발레가 생각보다 고강도 운동이다. 그 어떤 운동을 할 때보다 선명한 복근도 장착하게 됐다.
발레에선 유연성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을 거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건 근력이다. 특히 코어힘. 그리고 그걸 뒷받침해 줄 단단한 정신력. 우리 학원 선생님은 작고 마른 체구에 아주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무섭게 수업을 진행하는데, 가끔은 그 티칭에서 단순 발레 동작 이상의 삶을 살아가는 자세에 대해 배울 때가 있다.
"턱 끝 들어요."
"천장에 실이 내 머리를 고정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매달려 있으세요."
"머리를 뽑으세요"
"갈비뼈 꽉 조이세요."
"귀를 양 옆으로 쫑긋 세우세요."
"다리가 뿌리처럼 땅에 박혀있다고 생각하세요. 휘청거리지 마세요."
"기둥다리를 바로 세워서 잘 지탱해야 다른 쪽 다리를 높이 들 수 있어요."
"그랑 쁠리에(grand plie) 내려가서 쉬지 마세요. 앉아있어도 내 몸은 계속 위로 뽑아내는 중이에요."
"힘들어도 표정에 티 내지 말아요. 영부인이라고 생각하고 미소 지으세요."
저 말 중 현실적으로 실행이 가능한가 싶은 부분도 있다. 고양이도 아니고 귀를 어떻게 양 옆으로 쫑긋 세울 수가 있는 건지. 영부인이 되어본 적이 없는데 어떻게 영부인의 미소를 지어야 하는지. 머리를 뽑으라고?.. 어쨌거나 최근 레슨 중 마음에 깊이 새겨진 말이 있다.
"손으로 무릎을 잡아서 최대한 높이 올리고 종아리를 펴세요. 손을 놓고, 그 높이에 책임을 지세요."
그 높이에 책임을 지라니. 발레 레슨에서 느닷없이 듣기에 굉장히 철학적인 말이었다. 한 다리로 서서 한 다리를 높이 드는데, 손의 힘으로 다리를 들어 올렸을 때까지는 그럭저럭 높은 고도를 유지할 수 있었지만 손을 놓는 순간 다리는 그 무게를 버티지 못하고 쳐진다. 하지만 선생님은 단호하게 그 높이에 책임을 지라고 외친다. 고작 내 다리 한쪽일 뿐인데. 그 다리 한쪽의 높이를 책임지려니 땀이 비 오듯 쏟아지고 온몸의 근육이 힘을 쥐어짜느라 내적 비명을 지른다. 내 몸 하나 가누는 게 참 쉽지가 않다.
발레를 하는 사람들이 남들과 눈에 띄게 다른 점이 있다면, 그건 자세다. 턱끝을 살짝 위로해서 시선을 정면 위로 향한 채 어깨를 펴고 허리를 세우고 당당하게 걷는다. 살짝 팔자로 걷기도 하는데, 그건 발레의 기본자세가 외회전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신체는 감각을 기억해서, 감각과 신체현상이 반대로 작용할 때가 있다. 아무 웃긴 일이 없어도 그냥 한번 웃어보면 갑자기 밝아지는 느낌이 드는 것처럼, 어깨를 펴고 당당하게 걸으면 왠지 내가 꽤나 대단한 사람이 된 것 같은 씩씩한 기분이 든다. 그래서 습관적으로 등과 어깨를 구부정하게 굽히고 시선을 떨구고 다니는 사람들에게 의식적으로라도 가슴을 펴고 힘차게 걸어보라고 권해주고 싶다.
마음의 근육도 단련이 필요하다. 그래야 회복탄력성도, 기능성도 좋아지므로. 코어힘을 차곡차곡 길러서 신체의 균형도, 마음의 균형도 단단히 유지할 줄 아는 사람이 될 수 있게, 연습을 많이많이 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