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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 우리 할머니

목화송이 같던 우리 할머니

by Ubermensch



이 세상에서 엄마보다 아빠보다, 심지어 나보다 나를 더 사랑한 건 돌아가신 우리 할머니일 거다. 할머니에게는 다섯 명의 자식과 여덟 명의 손주가 있었다. 할머니가 시집오기 전, 할아버지는 강원도에 많은 땅을 가진 부잣집의 사대 독자라던가 오대 독자라던가 했던 손이 귀한 가문의 외아들이었다. 할머니가 아들 둘과 딸 셋을 낳고, 그 아이들이 아이들을 낳아 대가족을 만들었고. 나는 오대 독자라던가 육 대 독자가 될 뻔했던 집안 장남의 첫 딸이었다.


아빠는 너무 귀한 아들이어서 고모들이 만지지도 못하게 했다고 한다. 너무 귀하게 자란 나머지 아빠는 남의 밑에서 일을 하기 힘들었고, 몇 번의 사업에 연달아 실패했다. 그리고 그 실패로 아빠 스스로의 인생과 나를 포함한 아빠가 속한 가정이 망가졌다. 가문의 그 많던 땅과 산도 다 팔게 됐다고 한다. 그로 인해 내가 일곱 살 때부터 엄마와 아빠는 함께한 적이 없었고. 나는 엄마가 없는 친가에, 혹은 아빠가 없는 외가에 이리저리 옮겨 다니며 자랐다.


친가에서 나는, 그리고 나만 공주라고 불렸다. 명절이면 각 분야에서 잘 나가는 대가족이 모였고, 그 가족끼리 모여 앉았다. 사회적으로, 경제적으로, 가정적으로 실패한 아빠는 그 자리가 괴로웠을 테고, 그래서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우러 사라졌다.


갈 곳이 없던 나를 할머니는 종일 무릎에 앉혀놓거나 품에 안고 있었다. 내 얼굴이 닳도록 쓰다듬으며 우리 예쁜 공주, 공주 했다. 다른 손주들에게 만원을 주면 나에겐 십만 원을 쥐어줬다. 고모들은 엄마, 우리는 무수리고 쟤만 공주야? 하고 볼멘소리를 했다. 안방 벽엔 내 사진이 덕지덕지 붙어서, 멀리 사는 내가 그리울 때마다 사진을 본다고 했다.


할머니는 내가 서너 살 때 가르쳐주지도 않은 목련꽃을 알아봤다는 일화를 마치 무슨 영웅 신화라도 되는 듯, 지겨워하는 가족들의 반응에도 아랑곳 않고 반복했다. 내가 어쩌다 2등을 하면, 1등 한 애를 그렇게 미워했다. 할머니, 2등도 잘한 거야. 걔가 나보다 더 열심히 했나 보지. 괜찮아. 해도 손주가 어디 가서 밀리는 꼴을 못 봤다. 나는 전교 4등밖에 못했는데, 부풀려 전교 1등이라고 동네방네 자랑했다.


내가 크면 미스 코리아도 아니고 미스 유니버스에 나가야 한다고 했다. 나 그 정도 아닌데, 해도 소용없었다. 할머니 눈엔 내가 우주 최고였다. 내가 어디 가서 기라도 죽을까 봐. 덕분에 나는 지금까지도 기고만장하게 산다.


중학생 시절 내가 악몽을 꾸면, 할머니는 몸으로 호랑이 흉내를 내며 나를 달랬다. 호랑이 흉내에 재미있어하기엔 나이가 너무 많은데도. 할머니에게 나는 언제나 아기 공주님이었다.


할머니는 여든이 넘어 치매에 걸려 요양원에 갔다. 자식들, 사위 며느리, 손주들은 못 알아보면서 나만 알아봤다. 할머니 나 왔어, 하면 우리 공주 왔나. 하며 함박웃음을 지었다. 불효자식인 우리 아빠가 할머니 할아버지보다 먼저 세상을 등졌을 때도, 치매에 걸린 할머니는 그렇게 귀했던 맏아들의 죽음을 인지하는 것보다 눈앞에 내가 온 게 더 반가워 나를 끌어안고 노래를 불렀다.


언젠가 할머니 어릴 때 예뻤어? 하는 내 물음에 할머니는, 예쁜 건 네가 예쁜 거고. 할미는 하얗고 동그래서 목화송이 같았단다, 했다. 할머니는 텃밭에 꽃을 잔뜩 심어놓고, 그 꽃들을 돌보며 소녀처럼 노래를 부르곤 했다. 할머니의 부고를 듣고 가서, 나는 때 이른 아빠의 장례식에서보다 더 많이 울었다. 가족들은 내 서러운 울음을 보고 따라 울었다. 내가 너무 예쁘고 귀해서, 내가 흘리는 눈물까지 아까워하던 우리 할머니. 울림소리가 예쁜 옥랑이라는 이름의 우리 할머니.



다음 생에는 꼭, 내 딸로 태어나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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