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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위

사각사각 말고, 악몽을 동반한

by Ubermensch





자주는 아니지만 어렸을 때부터 이따금씩 가위에 눌리는 경험을 하곤 한다. 한평생 가위에 눌려본 적이 없는 사람도 있다는데, 연달아 일주일 밤을 꼬박 눌리는 시기도 있고. 일 년 이상 무탈한 밤을 보내는 운 좋은 해도 있다. 오늘 새벽에는 오랜만에 가위에 눌렸다.


내 절친 챗 지피티에게 물어보았다. 가위눌림은 일종의 수면 중 마비현상이라고 한다. 렘수면 직후 뇌는 깨어나면서 활발하게 활동하지만, 몸의 근육은 다치지 않도록 억제되어 있는 상태에서 벌어지는 일이라고 한다. 유발 요인으로 수면부족, 불규칙한 수면, 스트레스, 불안, 술, 약물, 카페인, 유전적 경향이 있다고 한다.


넉 달 전, 어떤 계기로 뇌센터를 찾아 이런저런 검사를 받았다. 그중 수십 개의 이런저런 질문에 답변을 하는 선별 검사가 있었는데, 그 결과는 다음과 같다. 우울이나 불안 항목의 점수는 아주 낮았고, 충동성이 평균보다는 조금 웃돌았고, 무쾌감증 점수가 높았다. 뭐 크게 우울하거나 불안한 상태가 아니면 됐고. 내가 겪는 세상에 그다지 행복하고 쾌락을 느낄 만한 일이 딱히 없기 때문에 충분히 납득이 되었으므로, 이 정도면 노말 하네. 가 결과지를 받아 든 내 인상이었다. 수십만 원의 비용을 들여 이런저런 다양한 검사를 받고 난 이후, 뇌파 검사 결과를 피피티로 띄워 보여주며 설명하던 원장님은 내가 아주 심각한 상태라고 했다.


이 정도면 일상에서 불편함이 많았을 텐데, 꽤 오랫동안 치료를 해야 할 것 같네요,라고. 저는 잘 모르겠는데요. 정신과 약을 복용하면 멍해지거나 생각이 없어지는 게 아닌가요. 제가 좀 예민하고 생각이 과한 건 인정하지만 그게 제 고유성이기 때문에 딱히 바뀌고 싶진 않아요, 했다. 원장님은 약을 먹는다고 해서 특별히 생각이 없어지는 것도 아니지만, 약으로 없어질 정도의 과도한 생각이라면 보통의 사람들은 원래 안 하는 정도이므로 없어지는 게 차라리 낫다고 했다. 내 뇌는 너무 과도하게 각성이 된 채로 쉬지를 못해 탈진한 상태고, 그래서 일상적인 부분을 오히려 소홀히 넘기는 중이라고 했다. 불안도 크다고 했다.


돌이켜보면 살면서 유독 내 주변에서는 사건 사고가 많았다. 교통사고도 많고, 침대 밖은 위험하다는 말이 농담이 아니라 나에겐 정말 현실이었다. 안전한 집 안에 머무는 혼자 있을 때조차, 여기저기 부딪히고 뭘 떨어트리고 깨트리고 쏟아서, 멍들고 까지고 다치는 유혈사태가 심심치 않게 벌어진다. 결과상으로는 내가 남들이 보는 것의 반 정도밖에 보지 못하고 있다고 했다. 뇌가 다른 쪽에 에너지 소모를 너무 많이 하고 있어서 그렇다고 한다. 뇌를 조금 쉬게 하고, 좀 편안해질 필요가 있다고 했다. 의사는 내게 항불안, 항우울, 수면제 등등을 처방해 주었다. 그곳은 약물 처방을 선호하지 않는 병원으로 알려져 있다.


선별 검사 수치에 의하면 나는 우울하거나 불안한 사람이 아닌데, 왜 이런 약을 먹는 신세가 되어야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몸이 아파도 정신력으로 이겨내는 방식을 선호했는데. 어쨌든 심각하다고 하니 전문가의 지시를 따르기로 했다. 그래도 왠지 유약한 사람이 된 마음이 들고 썩 내키지 않아 내 친구 챗 지피티에게 물어보았다. 내가 왜 이런 약들을 먹어야 하고 내 문제가 뭔지. 내 친구 챗 지피티는 선별 검사 결과는 실제 병리적 상태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인식하고 있는 상태일 뿐이라고 했다.


스스로를 우울하거나 불안한 사람으로 인정하고 자기 연민에 빠져버리면, 인생이 무너지거나 망가지기 쉬운 성장 환경에서 자라왔던 까닭에. 우리 엄마 아빠가 내가 안심하고 약한 모습을 드러내고 기댈 만한 존재가 되어주지 못했기 때문에. 나라도 나를 채찍질하고 굳게 다잡아주지 않았다면, 나는 진작에 우리 회사 손님으로 오거나 저세상에 속해 있을 확률이 더 높았을 것 같다. 그래서 나는 내가 아무렇지도 않다고 철석같이 믿은 채, 삼십몇 년을 살아왔던 거다. 하지만 모니터에 떠있는 내 뇌의 단면 그림 속 알파파가 어쩌고 베타파가 어쩌고 빨갛고 노랗고 파랗고 복잡하게 얽힌 선들은 내가 사실은 아무렇지 않지 않았다고 알려주었다. 오랫동안 스스로를 속이고 살아온 나 자신에게 미안했다. 그간 고생했다고 말해주고, 안아주고 싶었다.


그간 풀가동해서 탈진상태라는 내 불쌍한 뇌를 회복시키기 위해 결국 나는 넉 달째 착실하게 약을 복용하고 있다.


어제는 금요일인데 구속기간만료가 임박한 무시무시한 정신분열증 인격장애 할아버지의 사건기록이 배당되었고, 우리 부장님은 내게 당장 월요일에 소환해서 조사하라고 하셨다. 내가 구속 조사 경험이 전무한 삐약이인걸 전혀 개의치 않으시고. 집도 멀고 비도 오고 혼자 근무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회사에서 조사 준비를 하며 날을 새기로 마음을 먹었다.


나는 일하는 걸 좋아하기 때문에 무료 노동도 상관이 없다. 사건 기록을 파악하다 보니 너무 재미있기도 하고. 경찰 조사 단계에서 정신분열증 인격장애 피의자 할아버지의 태도는 불량하기 짝이 없어서 웃음이 킥킥 나왔다. 본인이 떡하니 찍혀 있는 범행 현장의 CCTV영상을 경찰이 보여주는데, 내가 아니에요. 나랑 닮은 사람일 수도 있잖아요. 이 세상에 내가 모르는 쌍둥이가 있을 수도 있죠. 내가 알바가 아니에요. 로또를 사러 가야 하는데 여기 잡혀 있으니까 기분이 나빠서 조사받기 싫어요. 기억이 안 나요. 나는 모르는 일이에요.


이 할아버지를 불러다 어떻게 조사를 이끌어가야 할지, 논리적으로 조서 초안을 꾸리는 게 과연 의미가 있을지, 추적추적 빗소리를 들으며 사무실에 홀로 앉아 궁리를 하다 보니 새벽 4시가 됐다. 일과시간에 기록을 대충 훑고 전에 함께 일한 내 유일한 믿을 구석 비빌 언덕 검사님께, 이 할아버지는 전에 몽키 스패너로 어린애 머리통을 내리친 전력도 있어서 걱정입니다. 하며 조언을 구했더니, 생각의 무한 확장자들끼리 통하는 구석이 있지 않을까요? 하며 응원을 해주셨다. 결이 조금 달라요. 저는 정신분열이나 인격 장애는 없다고요. 주취상태가 아니라면 폭력성도 없고요.


예상치 못한 밤샘 야근이라 약을 미처 챙겨 오지 못했다. 저녁으로 짬뽕과 컵라면과 과자와 카스텔라와 커피 3캔과 젤리 한 봉지와 토레타 2병을 먹었다. 공무원증을 놓고 엘리베이터를 탔다가 갇혀버리는 바람에 밤 11시 넘어서 문을 하염없이 두드리다가 간신히 구조됐다. 해뜰 무렵 회사 여자 휴게실에서 잠이 들었는데, 가위에 눌린 거다.


가위에 눌리면 정말이지 정말 무섭다. 공황장애 같은 건 없지만 그 공포가 뭔지 알 것 같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온몸에 숨 막히는 공포가 빼곡히 들어차는데, 나는 여자휴게실 여덟 칸의 침대 중 가장 안쪽 첫 번째 침대에서 잠이 들었다. 내 양발을 귀신이 잡고 문 입구로 확 끌어당기는 느낌이 드는데, 정말 물리적으로 잡아당겨지는 감각이라, 끌려가지 않으려고 온몸에 힘을 주면서 비명을 지른다. 아무리 크게 소리를 질러도 정작 내 귀에는 조그만 신음정도로밖에 안 들린다.


잠든 장소는 제각기 달라도 가위에 눌릴 때면 항상 내용과 양상은 똑같다. 그리고 같은 내용의 악몽을 동반한다. 외가쪽 누군가가 나오고 나는 울면서 막 싸운다. 그건 잠꼬대 형식으로 소리로도 흘러나온다. 그리고 귀신이 내 양 발을 잡고 어떤 출구로 나를 끌고 가려는 형태다. 나는 다리를 붙잡힌 채 공포에 질려 그 무서운 곳으로 안 끌려가려고 몸부림치며 비명을 지른다. 뇌는 이미 깨어났기 때문에 또 가위에 눌린 걸 인지하고 엄마, 하고 나를 깨워달라고 외치는데 소리가 원하는 만큼 안 나온다. 자기 직전 내 글에 밤인사를 해준 까마귀의 발이라는 닉네임이 떠오를 만큼 의식이 분명 있는데, 몸은 계속해서 깨어나지 못하고, 나를 누가 자꾸 잡아당겨 끌고 가려고 해서, 공포에 질려 숨이 막혀 죽을 것 같았다. 영영 끝나지 않을 것만 같던 길고 긴 시간의 사투 끝에, 크고 날카로운 비명을 지르며 깨어났다. 오늘 우리 회사 여자 휴게실 여덟 칸의 침대 중 나 말고 누군가 잠들어 있었다면 내 비명소리에 소름이 쫙 끼쳤을 거다.


조선시대였다면 애를 여덟 명쯤 낳고, 가난이나 질병으로 인해 그 자식 중 한두 명은 저세상으로 떠나 보냈을 가능성이 있을 만큼의 나이를 먹었음에도 나는 아직도 커다란 인형을 안고 자는 습관이 있다. 오늘 새벽에는 인형을 안고 자지 못해서 그런 건지, 넉 달 동안 꾸준히 복용해 온 수면제를 빠트려서 그런 건지, 하루 종일 커피를 넉 잔이나 마셔서 그런 건지, 첫 조사에 대한 압박 때문인지 원인은 정확히 모르겠다. 확실한 건 간밤의 경험은 너무 공포스러워서 네버 에버 다시는 절대로 겪고 싶지 않다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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