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캉의 결여, 니체의 힘
욕망이라는 개념을 두고 라캉과 니체는 서로 상반된 관점을 제시한다. 인간을 본질적으로 동적이고 불안정한 존재로 보고, 만족 상태에 머무르지 않고, 단순히 생존하는 존재를 넘어 더 나아가려는 충동을 가진 존재로 본다는 점 외에는, 두 사상가가 인간이 가진 욕망을 다루고 해석하는 방식은 전혀 다르다.
라캉의 욕망은 결여(lack)에서 비롯된다. 인간은 타고날 때부터 결여된 존재이며, 이를 채우려는 끊임없는 추구를 욕망으로 본다. 언어와 상징계 등의 더 심도 있는 내용이 있지만, "인간은 타자의 욕망을 욕망한다"는 타자의 욕망 개념이 라캉의 철학에서 가장 친숙한 개념일 것이다. 라캉의 욕망은 본질적으로 충족될 수 없는 만족 불가능성을 내재한다. 인간은 타고나기로 결여된 존재이고, 완벽한 충족에 이르지 못하며, 한 단계의 욕망의 실현은 또 다른 욕망을 낳는 사슬로 이어질 뿐이다. 이는 끝없이 갈구할 수밖에 없는 존재론적 비극을 함축한다. 그러므로 인간은 수동적이고, 상실과 좌절을 느끼는 숙명에 처할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된다.
반면 니체는 욕망을 힘에의 의지(will to power) 본다. 어떤 장애를 넘어서려는 충동이 바로 힘에의 의지이자 욕망인 것이다. 니체는 쾌락이나 생존을 넘어서는 더 근본적인 힘이 인간을 움직이며, 이는 단순한 자기 보존을 넘어 스스로의 한계를 극복하고 창조하는 과정과 연결된다. 현재의 자신에게 만족하지 않고 더 강하고 위대한 존재가 되기 위해 스스로를 끊임없이 변화시키고 극복해 나가려는 의지가, 니체가 바라보는 인간의 욕망이다. 그렇기에 삶이 아무리 비극적일지라도, 그 비극적 삶을 대하는 내 시선과 태도는 능동적이며, 주어진 운명을 사랑하며 살아가는 과정 자체를 긍정하기로 한다. 그럼으로써 위버멘쉬(ubermensch)를 향해 걸어가는 것이다.
박태원의 소설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에서 식민지 조선의 지식인 구보는 경성 시내를 하릴없이 배회하며 천태만상을 관찰한다. 대학시절 문학 강의에서 교수님이 알려주신 흥미로운 포인트가 기억난다. 이렇게 길거리를 목적 없이 배회하고 관찰하며 다니는 사람은 남성이라는 거다. 여성들은 목적 없이 배회하지 않는다고. 라캉의 '타자의 욕망' 개념에서 타자를 담당하는 그 시선의 주체는 주로 남성이고,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는 자, 그러니까 그 시선의 객체는 여성이라는 거다. 나도 교수님의 말에 공감했다.
남자들은 그들의 외모가 사회적으로 어떻게 비치는지에 대해 여성들만큼 강박적이거나 엄격하게 의식하지 않는다. 그들이 욕망과 시선의 주체 역할을 주로 맡는 까닭이다. 반면 여성들은 욕망과 시선의 객체 역할에 익숙한 탓에, 상대적으로 스스로의 외모를 더 엄격하게 평가하고 신경 쓴다. 그렇다고 해서 이러한 입장차가 여성에게 일방적으로 불리하다거나 불합리하다고 여기진 않는다. 여성들은 남성의 욕망의 대상이 되는 점을 영리하게 활용할 방법을 알기 때문이다.
라캉식 욕망은 타인과 사회를 전제한다. 내가 간절히 원하는 것이 있는데, 타인이 아무도 없는 외딴섬에 혼자 있을 때도 원할 만한 것인지 생각해 본다면 이해하기 쉽다. 가령 수천만 원짜리 에르메스 백이라든지, 내가 가진 콤플렉스 신체 부위에 대한 성형을 원한다고 했을 때, 그 아무도 없는 외딴섬에 홀로 있다면 그 백을 가지거나 성형을 해서 콤플렉스 부위가 개선된다 한들 행복을 느낄 수 있을까?
그렇게 따지고 보면 SNS에 전시된 불특정 다수의 호화롭고 행복한 삶이 과시된 장면을 굳이 찾아보고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는 행위나, 그것을 부러워하고 욕망하는 마음이 아주 허상에 근거한 것이며 무의미한 에너지 소모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다. 타인을 의식하고 비교하는 순간 우리는 결코 충족할 수 없는 욕망의 굴레에 빠져 좌절한 채 비극적 삶을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대신, 타자에 쏠린 시선을 스스로에게 돌려 니체식으로 욕망하면, 삶은 훨씬 더 나아진다. 실제로 뭔가를 더 소유하진 못할지라도, 최소한 자기 성장이나 발전은 할 수 있고 정신이 건강해진다.
라캉의 욕망이론에 따르면 어차피 모든 인간들이 숙명적으로 결코 만족하지 못하는 욕망의 굴레 속에서 끊임없이 갈구하고 좌절하며 사는 비극적 존재인건 마찬가지이므로, 그 와중에 누가 더 가졌니 못 가졌니 하며 비교하고 부러워할 시간에 나 스스로 뭐가 더 부족한가, 내가 현재의 나에게 만족하지 못하고 있는 점은 무엇인가, 내가 나아가고자 하는 길에 장애물은 무엇인가, 그걸 넘어서려면 나에게 어떤 힘이 필요한가, 그 힘을 갖기 위해 나는 무엇을 해야 하나, 하는 궁리를 하는 게 훨씬 더 생산적이다. 타인과 나를 비교할 것이 아니라,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와 내일의 나를 비교하며 살아가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삶을 풍요롭게 채울 수 있다.
나는 니체식으로 욕망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