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번 쓰러지고 네 번 일어선 회복탄력성 이야기
"왜 이 길을 선택했을까."
아침이 오면 밤새 머문 자책이 눈물이 되어 흘렀다.
커튼을 닫았다. 창문을 파고드는 희미한 빛조차
눈을 찌르는 가시 같았다. 저녁이 올 때까지 얼굴까지 이불을 끌어올린 채 세상에 등을 돌렸다. 어제와 오늘의 경계가 조금씩 흐려졌다.
입맛은 오래전에 사라졌다. 매일 챙겨 먹던 닭가슴살마저 억지로 삼키다 구역질을 했다. 책상 위엔 나사 빠진 독서대와 너덜너덜해진 필기노트가 기름에 절은 나를 비추고 있었다. 의미 없는 질문들은 고장 난 신호등 안내음처럼 멈출 줄 몰랐고, 방 공기는 점점 눅눅해져 들숨마저 무겁게 짓눌렀다.
대학 시절 친했던 선배의 결혼식 전날, 회식 자리가 잡혔다.
"안 나오면 다시는 안 볼 거야."
선배의 농담 섞인 진담에 결국 나갔다.
"야! 우리 대배우님 오셨다!"
주점에 들어서자 대학 시절 내 별명을 부르며 소리쳤다. 예전 같았으면 유쾌하게 넘겼겠지만, 오늘은 그럴 마음이 들지 않았다.
자리에는 아는 얼굴들이 많았다.
아이 사진을 보여주는 형들, 예식장을 예약한 동기,
대기업에 취업해 새 차를 뽑은 후배. 각자의 자리에서 부지런히 굴러가는 톱니바퀴 같았다.
"요즘 뭐 해?"
잔을 들어 대답을 피하려 했지만 꼬치꼬치 이어지는 질문에 결국 입을 열었다. 약대 입시를 준비했었고 최근에 그만뒀다고.
"괜찮아." "힘내라."
도대체 뭐가 괜찮은 거고, 뭘 위해 힘을 내라는 걸까. 짧은 위로들은 내 고통의 무게를 헤아리지 못했다.
"그래도 서른이면 취업했어야 하는 거 아냐?"
현실을 담은 질문. 누군가의 말끝엔 사회가 그려놓은 정상 궤도에서 벗어난 사람에 대한 은근한 비난이 숨어 있었다. 그들에게는 상대의 아픔 따윈 안중에도 없었고 오직 성과와 결과만이 전부였다.
"밥 한번 먹자 연락할게."
회식은 끝났고 단체톡방에 환하게 웃는 그들의 사진이 올라왔다. 그 속에 내 모습은 없었다.
집에 돌아와 복잡한 마음으로 노트북을 켰다. 한 줄도 적지 못한 커서는 기다란 세로줄만 껌뻑였고, 또래들의 SNS 는 대기업 사원증과 함께 #승진 #로맨틱 #성공적 해시태그로 곪아 터진 나의 상처 위에 소금을 뿌려댔다. 밥 한번 먹자던 지인들의 연락은 역시나 오지 않았다. 우울은 서서히 그리고 깊게 번져 갔다.
며칠 뒤, 의미 없이 휴대폰을 넘기다 기사 하나에 손이 멈췄다. 잊을 수 없는 이름.
'배우 OOO 사망'
망치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 머리가 멍해졌다. 얼마 전 티비 속에서 환하게 웃던 그의 얼굴이 눈앞에 선했다. 따로 작품을 찾아볼 정도로 팬은 아니었지만, 오랫동안 알고 지낸 지인이 세상을 떠난 것처럼 참을 수 없는 감정이 몰아닥쳤다.
숨이 턱 막혔다. 그토록 많을 걸 이뤄온 그조차 사는 게 얼마나 힘이 들었을까. 아무것도 이룬 것 없는 나는 과연 그와 다를 수 있을까. 창밖을 스치는 바람이 유난히 차갑게 느껴졌다. 그 차가움 속으로 몸을 던지고 싶은 충동이 올라왔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내렸고 이내 심장을 쥐어짜듯 오열했다.
그때, 몇 해전 함께 어학연수를 다녀온 형에게 전화가 왔다. 목소리를 듣는 순간, 낯선 도시에서 함께 웃고 즐기던 기억들이 가슴 한 켠을 두드렸다. 오슬롭의 에메랄드 폭포와 투명한 바다 속을 유유히 헤엄치던 고래상어 무리. 눈물을 닦고 가까스로 마음을 추스르며 카페로 향했다.
구석에 앉은 그는 잔 위로 피어오르는 김 너머로 내 얼굴을 한참 바라보다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얘기 들었어."
나는 괜찮은 척 웃어 보였지만, 그 웃음엔 힘이 없었다.
그는 잔을 천천히 돌리며 숨을 고른 뒤 자신의 이야기를 꺼냈다. 대학원 졸업 이후 입사와 퇴사, 그리고 다시 시작한 공무원 준비까지, 여태껏 지내온 굴곡진 날들을 풀어놓았다. 말끝마다 묻어나는 책임의 무게가 테이블 위에 내려앉았다.
"넌?"
목 끝이 뜨거워졌다. 숨겨왔던 좌절과 고통, 그리고 오늘의 감정들이 서랍을 열 듯 흘러나왔다. 감정이 북받쳐 정적이 흐를 때도 있었지만 그는 단 한 번도 말을 끊지 않았다.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마치 '계속해도 돼'라고 말하는 듯했다.
"너도 힘들었구나."
서로의 상처에서 피어난 동질감은 마음의 공명을 일으켰고, 그 울림은 곧 공감으로 이어졌다. 얼어붙은 물 위로 미세한 금이 갔다. 그 틈으로 부드러운 빛이 내려앉았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타인의 온기.
"종종 보자. 네가 부르면 올게."
그 말은 보이지 않는 손이 되어, 멈춰주길 바라는 내 마음을 살며시 감싸 안았다.
집에 돌아오자 부엌에서 생선을 튀기는 소리와 칼로 도마를 두드리는 소리가 정갈하게 들려왔다. 엄마는 프라이팬을 옮기며 이마의 땀을 훔치셨고, 퇴근하신 아빠와 동생들은 소파에 앉아 각자의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 평범하고 일상적인 풍경 속에서, 이제야 조금씩 곁에 있는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혹여 내가 굶을까, 새벽마다 반찬 위에 랩을 씌워 식탁 위에 올려두셨던 엄마. 말없이 현금 몇 장이 든 봉투를 두고 가셨던 아빠. 본인들은 잘 먹지도 않는 빵과 과자를 사 오며 내 방까지 닿으라는 듯 "신상이야!" 외치던 동생들. 누구도 다그치지 않았고 누구도 힘내라는 말을 하지 않았지만 그 침묵 속에서 가족들은 같은 마음을 전하고 있었다.
'우리가 여기 있어.'
'네가 다시 일어설 때까지 기다릴게.'
그날 밤, 한참 동안 불 꺼진 거실에 앉아 있었다. 창밖의 가로등 불빛이 커튼 틈으로 스며들었다. 식탁 위 유리컵이 그 빛을 받아 반짝였고, 잔잔한 물결 위를 유영하는 고래상어의 숨결을 느끼며 그 몽환 속에 잠시 머물렀다.
동전에는 앞과 뒤가 있고, 지구에는 낮과 밤이 존재한다. 세상의 만물은 장단의 선율로 완성된다. 실패와 좌절 역시 다르지 않다. 그것들은 우리를 주저앉히지만, 동시에 다시 일어설 힘을 길러준다. 아직은 그 의미를 다 알 수 없어도, 내가 흘린 시간과 노력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그것들은 언젠가 우리의 길을 밝혀주는 불씨가 될 것이다.
삶은 한 번에 커다란 도약을 요구하지 않는다. 그저 '오늘 하루만 살아내자'라는 마음으로 시작하면 될 일. 작은 결심 하나가 쌓여 내일을 만들고, 그 내일이 모여 결국 길이 된다. 다시 일어설 수 있다. 그리고 넘어져도 흔들려도 여전히 걸을 수 있다.
서서히 날숨이 길어지고 가슴 깊은 곳이 조금은 가벼워졌다.
다음 날 아침. 배게에 흘린 침이 흥건하다. 커튼을 걷었다. 창문 너머 엷게 번진 금빛이 방 안 깊숙이 내려앉았다. 침대 위 이불을 정리하며 오랜만에 아침을 품었다. 나를 짓누르던 자책들은 더 이상 메아리치지 않았다.
식탁에 앉아 밥을 먹어봤다. 입맛이 조금 돌아왔다. 그래도 여전히 닭가슴살은 맛이 없다. 샤워를 마치고 발목까지 올라오는 흰 양말을 신었다. 발목을 조이는 고무줄의 팽팽함이 가라앉은 심장박동을 점점 끌어올렸다.
'오늘 하루만 움직여 보자.'
대단한 결심 대신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한 가지를 하기로 했다. 작은 다짐이었지만 분명하게 마음속에 새겼다.
그렇게 청춘을 함께해 온 나의 펜은 새로운 목표를 향해 조용히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