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번 쓰러지고 네 번 일어선 회복탄력성 이야기
"넌 커서 뭐가 되고 싶어?"
어릴 적부터 줄기차게 들었던 말. 단순한 질문이지만 대답은 항상 쉽지 않았다. 그럼에도 분명한 한 가지.
"도움을 주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실패는 내게 긴 그림자를 드리웠다. 하지만 그 어둠이야말로 새로운 길을 비추는 등불이 되었다.
어느 날 유튜브 알고리즘이 낯선 영상 하나를 띄웠다. 현장 경찰관들의 하루를 담은 다큐. 공기를 가르는 무전기 소리, 창밖을 스치는 사이렌에 눈을 뗄 수 없었다. 운동을 좋아하는 내게 어울릴지 모른다는 기대와 또다시 실패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뒤섞였다.
실패의 충격을 최소화하기 위해서는 단계적인 접근이 필요했다. 그래서 시험과목이 겹치는 교정직 공무원을 함께 준비하여 기회의 폭을 넓혀 가기로 했다. 나는 현실과 이상을 잇는 다리 위를 조심스럽게 첫 발을 내디뎠다.
하지만 전략이 곧 승리를 보장해 주진 않았다. 시험까지는 고작 몇 달. 책상 앞에 앉아도 십 분을 버티지 못했고 글자들은 눈앞에서 흩어져 버렸다. 우울의 그림자가 집요하게 집중력을 갉아먹었다.
답답한 마음에 형에게 연락하여 함께 산에 올랐다. 풀과 나무, 물과 바위가 빚어내는 소리가 마음을 두드리며 머릿속에 잡념을 씻어냈다. 산 중턱의 작은 사찰에 닿은 순간, 며칠 전에 본 황당한 뉴스가 현실로 튀어나왔다. 담장 너머 저 멀리 수풀에서 검은 형체가 슬그머니 모습을 드러냈다. 짙은 털, 짧은 귀, 다부진 체격.
곰이다.
"형. 고... 곰 맞지?"
"아냐, 커다란 개 같은데?"
"저렇게 큰 개가 어딨어."
"있어. 판다 푸들."
"형, 장난칠 때 아니야. 나 얼마 전에 뉴스..."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형은 천천히 뒷걸음질 치며 말했다.
"근데... 우리 쪽으로 오는 것 같은데...?"
고개를 돌리는 순간, 곰과 눈이 마주쳤다.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곰을 만나면 죽은 척하라는 속설이 떠올랐지만 사지는 이미 돌처럼 굳어버려 움직일 수 없었다. 곰은 잠시 서성이더니 돌연 나를 향해 달려들었다.
"으아아악!"
그때, 등 뒤에서 짧은 외침이 울렸다.
"앉아!" 순간, 거짓말처럼 털썩 주저앉았다.
"이리 와!" 여승의 부름에 엉덩이를 씰룩이며 달려가는 곰의 모습을 보고 나는 순간 머릿속이 하얘졌다.
곰이 스님을 따르다니! 에이션트 원의 재림이 아니던가!
쿵쾅대는 가슴을 겨우 진정시키고 스님 옆으로 다가갔다. 그리고는 직접 확인해 보니... 정말 개였다. 검은 털의 살이 찐 차우차우...
허탈한 웃음과 함께 번뇌 속 작은 깨달음이 찾아왔다. 개를 곰으로 착각했던 것처럼, 상처에 잠식된 나의 인지 기능이 현실을 왜곡해 두려움을 제어하지 못한 게 아닐까. 그래서 글 한 줄 읽는 것조차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무겁게 다가오지 않았을까.
"한 줄만 읽어도 돼."
다시 책상 앞에 앉았다. 스스로를 다독이며 문단 아래 작은 점을 찍었고, 그 옆에 기분을 적었다. 점들이 줄지어 늘어날수록 마음은 한결 가벼워졌다. 점은 선이 되고, 선은 곧 면을 이루었다. 그렇게 하루가 되고 이틀이 지나면서 의자에 앉아 있는 시간은 두 배, 세 배로 늘어갔다. 작은 성공이 자신감을 불러왔고, 익숙한 리듬이 다시 내 안으로 돌아왔다. 그렇게 나는 무서운 속도로 공부를 이어갔다.
결과는 교정학개론 45점. 다행히 평균 점수는 합격선을 넘었다. 기세를 몰아 아버지께 경찰 시험에 도전하겠다고 말씀드렸다.
"그건 안 된다."
단호한 목소리가 돌아왔다. 부모님의 반대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거실에는 며칠 동안 숨 막히는 침묵이 흘렀다.
사실 나는 그 말 뜻을 잘 알고 있었다. 부모님께서는 누구보다 가까이에서 나를 지켜보셨다. 나의 두려움은 곧 부모님의 두려움이었다. 자식에 대한 사랑이 깊었던 만큼, 다시 그 고통을 감당할 자신이 없으셨던 것이다. 나는 욕심을 내려놓고 현실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날 저녁, 연수 일정을 말씀드리려던 찰나, 아버지께서 내 입을 막아서듯 먼저 입을 여셨다.
"아들, 엄마 아빠 생각만 했네. 돈은 걱정하지 말고 다시 도전해 봐."
그 말에 시간이 멎은 듯 고요해졌다. 열손가락 깨물어도 안 아픈 손가락은 없다지만 그중에서 부모님의 가장 아픈 손가락은 언제나 나였다. 입술은 괜찮다고 말씀드리고 있었지만 가슴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죄책감이 밀려들어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그렇게 현실의 벽 앞에 꺾여버린 내 자아는 부모님의 품에 기대어 다시 몸을 일으켰다.
다음 날 새벽, 작은 등불 아래 첫 문제를 풀고 정답 옆에 점을 찍었다. 그 점이 선이 되고 길이 되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렇게 난 경찰공무원이 되었다.
누군가는 약대 시험 대신 경찰 시험에 도전한 내 결정을 실패라 말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도망친 게 아니다. 나에게 맞는 새로운 목표를 다시 그려낸 것이다. 주어진 조건에서 최선을 다했고 실패 속에서 내 모습을 마주하였으며 그 과정을 통해 진정한 나를 발견했다.
우리의 인생은 수많은 위험과 불확실함 속에서 끊임없이 넘어지고 주저앉는다. 그러나 그 속에서도 삶은 끝나지 않는다. 오히려 세상을 다시 읽는 법을 배우게 된다.
결국 중요한 건 넘어진 우리의 모습이 아니라 그 모습을 '어떻게 받아들이냐'이다.
잡초라 부르면 쓸모없지만 들꽃이라 부르면 아름다워진다. 이름 하나에 풍경이 달라지듯 관점 하나로 두려움은 곧 힘이 된다.
우리는 더 이상 '실패한 사람'이 아니다. 상처를 극복하고 한 걸음 더 내디딘 '성장한 사람'이다. 인생은 넘어진 자리마다 새로운 이름을 새겨가는 과정의 연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