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서 프라이빗 뱅킹을 정의하면서 살펴본 것처럼, 이 서비스는 고액자산가나 가족 기업을 대상으로 한 맞춤형 자산관리라는 점에서 일반 은행과 뚜렷하게 구분된다. 그러나 ‘프라이빗 뱅크’라고 해서 모두 같은 모습은 아니다. 운영방식이나 소유구조, 그리고 서비스 범위에 따라 서로 다른 색깔을 띠기도 한다.
일반적으로는 크게 세 가지 유형으로 나눌 수 있다. 대형 상업은행의 한 부서로 자리 잡은 유니버설 은행(Universal Bank), 오직 프라이빗 뱅킹만을 전문으로 하는 순수 프라이빗 뱅크(Pure-play Private Bank), 그리고 소매금융 고객층을 기반으로 확장한 리테일 기반 프라이빗 뱅크(Retail-linked Private Bank)가 그것이다.
1) 유니버설 은행(Universal Bank): 원스톱 금융 서비스
유니버설 은행은 말 그대로 ‘종합 금융 서비스의 집합소’라 할 수 있다. UBS, JP모건, BNP 파리바 같은 이름만 들어도 알 만한 글로벌 은행들이 여기에 속한다. 이들은 상업은행, 투자은행, 프라이빗 뱅킹을 모두 보유하고 있어, 고객은 한 그룹 안에서 사실상 모든 금융 니즈를 해결할 수 있다.
예금과 대출 같은 기본적인 은행 서비스는 물론이고, 주식 및 채권 발행이나 인수합병 같은 투자은행 서비스, 자산관리와 보험까지 한곳에서 제공된다. 고객 입장에서는 ‘원스톱 플랫폼(One-stop platform)’을 통해 단일 은행에서 모든 요구를 처리할 수 있으니 편리하고, 자연스레 은행에 대한 충성도도 높아진다. 특히 많은 고액자산가가 동시에 기업가라는 점을 고려하면, 개인 자산관리와 회사의 상장이나 매각 등 투자은행 업무를 한 계열 은행에서 함께 맡길 수 있다는 점은 큰 매력이다.
은행 내부적으로도 이점이 크다. 여러 부서가 긴밀히 협력해 고객 맞춤형 솔루션을 제공할 수 있고, 자산 규모가 크다 보니 경쟁력 있는 금리나 수수료를 제시할 수 있다. 또 특정 부문이 부진해도 다른 부문이 이를 보완해주는 구조이기 때문에 수익 다각화가 가능하다.
하지만 모든 장점에는 그림자가 있다. 유니버설 은행은 투자은행 부문에서 자기자본을 활용한 거래 등 더 큰 리스크를 떠안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전 세계적으로 ‘시스템적으로 중요한 은행(G-SIB, Global Systemically Important Bank)’으로 지정되어 더 높은 규제를 받고, 주기적인 스트레스 테스트도 감내해야 한다.
이 리스크의 실체를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가 바로 2023년 크레딧 스위스의 붕괴다. 167년 역사를 가진 스위스의 상징적 은행이었던 크레딧 스위스는 프라이빗 뱅킹과 투자은행, 자산운용을 두루 갖춘 글로벌 유니버설 은행이었다. 프라이빗 뱅킹 부문만 놓고 보더라도 2022년 기준 운용자산(AUM)이 약 1.35조 달러에 달해 세계 3~4위권을 기록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투자은행 부문에서 과도한 리스크가 누적되면서 결국 그룹 전체가 흔들렸고, 끝내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크레딧 스위스는 미국의 헤지펀드 아르케고스 캐피탈(Archegos Capital Management)에 막대한 신용을 제공하며 프라임 브로커(Prime Broker) 역할을 맡았다. 문제는 담보 관리가 허술했다는 점이다. 결국 2021년 아르케고스가 투자한 주식이 폭락하자 연쇄적인 마진콜(Margin call)이 발생했고, 크레딧 스위스는 약 55억 달러라는 막대한 손실을 떠안게 되었다.
설상가상, 같은 해 또 다른 악재가 찾아왔다. 영국의 공급망 금융회사 그린실 캐피탈(Greensill Capital)이 파산하면서, 크레딧 스위스가 고객 자산을 담아 운용하던 약 100억 달러 규모의 펀드가 동결된 것이다. 그린실 캐피탈은 기업이 공급망에 지급해야 할 자금을 대신 지불하고 수수료를 받는 공급망 금융(Supply Chain Finance) 서비스를 제공하는 핀테크 회사였다. 공급망 금융이라는 신선한 투자 아이디어가, 핵심 고객의 신용 불안과 보험 계약 붕괴로 인해 무너진 셈이다. 투자자들은 자금을 회수하지 못했고, 법적 분쟁으로까지 번졌다.
이 두 사건은 단순한 투자 실패가 아니었다. 프라이빗 뱅킹 고객 자산도 투자은행 및 외부 금융상품과 연결될 때 얼마나 취약해질 수 있는지 보여준 사례다. 아무리 프라이빗 뱅킹 부문이 안정적으로 보이더라도, 같은 그룹의 투자은행이나 다른 사업 부문이 흔들리면 프라이빗 뱅크 고객에게도 충격을 미칠 수 있는 것이다.
결국 2023년, 크레딧 스위스는 신뢰를 완전히 상실하며 대규모 예금 인출 사태를 겪었고, 스위스 정부의 중재 아래 UBS에 인수되었다. 160 여년 역사를 자랑하던 은행이 하루아침에 사라진 것이다. 이 사건은 전 세계 프라이빗 뱅킹 업계에 중요한 교훈을 남겼다.
한 그룹 안에서 원스톱으로 모든 서비스를 제공하는 편리함은 분명 매력적이다. 그러나 동시에, 프라이빗 뱅킹 고객의 자산도 결국 그룹 차원의 리스크와 얽혀 있다는 사실을 지각해야 한다. 따라서 고액자산가라면 단순히 “서비스가 다양하다”는 점만 볼 것이 아니라, 그 은행의 프라이빗 뱅킹 서비스가 얼마나 독립적으로 운영되는지를 꼼꼼히 따져볼 필요가 있다.
순수 프라이빗 뱅크(Pure-play Private Bank)
그렇다면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질문이 있다. “프라이빗 뱅킹 서비스만을 제공하는 순수 프라이빗 뱅크(Pure-play Private Bank)에 자산을 맡기는 것이 더 안전하지 않을까?”
실제로 스위스의 줄리어스 베어(Julius Baer), 롬바르드 오디에(Lombard Odier), 픽테(Pictet & Cie) 같은 은행들이 대표적인 순수 프라이빗 뱅크다. 이들은 오랜 역사와 전통을 지닌 가문형 혹은 파트너십 기반의 은행으로, 오직 프라이빗 뱅킹과 자산 관리에만 집중해왔다.
순수 프라이빗 뱅크의 가장 큰 특징은 비즈니스 모델이 단순하다는 점이다. 상업은행이나 투자은행 부문을 보유하지 않기 때문에 은행 전체의 리스크가 상대적으로 낮고, 고객 자산 관리에 전념할 수 있다. 고객 자산 관리, 상속·증여 설계, 신탁, 패밀리 오피스 운영 등 본질적인 프라이빗 뱅킹 서비스에만 집중할 수 있다는 점이 강점이다. 또한 조직 구조가 단순해 고객 맞춤형 서비스 제공이 더 유연하다는 장점도 있다.
하지만 단점도 있다. 고액 자산가들은 종종 기업을 소유하거나 운영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때 회사 자금 조달, 글로벌 인수합병(M&A), 해외 거래와 같은 복잡한 금융 서비스가 필요하다. 순수 프라이빗 뱅크는 이런 니즈를 자체적으로 충족하기 어렵기 때문에, 고객은 별도의 유니버설 은행이나 다른 금융기관을 병행해 이용해야 하는 불편함이 있다.
또한 순수 프라이빗 뱅크는 대형 유니버설 은행에 비해 운용 자산 규모가 작고, 글로벌 네트워크나 인프라 구축에 있어 뒤쳐진다. 따라서 대규모 글로벌 딜에 접근하기는 어려워 다양한 투자기회가 상대적으로 제한적이다. 최근 강화되는 세금 투명성 규제나 자금세탁방지(AML) 기준 같은 국제 규제를 충족하는 데 필요한 비용도 소규모 은행에는 더 큰 부담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순수 프라이빗 뱅크는 여전히 매력적인 선택지다. 고객 자산 관리라는 본질적인 역할에 집중하고, 은행의 다른 사업부와의 이해관계에 휘둘리지 않는 투명성과 고객 중심성이야말로 이들의 진정한 강점이다.
리테일 기반 프라이빗 뱅크(Retail-linked Private Bank)
마지막 유형은 리테일 뱅킹을 기반으로 성장한 프라이빗 뱅크다.
대부분 고객은 처음에 예금, 대출, 신용카드 등의 단순한 리테일 서비스로 은행과 거래를 시작한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자산이 늘어나고, 보다 전문적인 자산관리 서비스가 필요해지면, 같은 은행 안에서 자연스럽게 프라이빗 뱅킹 서비스를 제공받게 된다.
대표적인 예로 HSBC, 스탠다드 차타드(Standard Chartered), 싱가폴 은행인 DBS Wealth Management, UOB Private Wealth를 들 수 있다.
이 모델의 장점은 고객 입장에서의 편리함이다. 이미 오랫동안 거래해온 은행이기 때문에 신뢰가 쌓여 있고, 하나의 은행 안에서 리테일 서비스와 프라이빗 뱅킹 서비스를 모두 이용할 수 있다. 즉, 일상적인 금융 거래(입출금, 카드, 대출)부터 고급 자산관리(투자, 상속·증여 계획)까지 개인 자산을 통합 관리할 수 있는 것이다. 동시에 많은 리테일 은행의 경우 글로벌 네트워크가 잘 구축되어 있어 국제 거래나 해외 자산 관리가 용이하다.
물론 한계도 있다. 리테일 기반 프라이빗 뱅킹은 일반적으로 그룹 내에서 리테일 뱅킹에 비해 부수적 위치에 있어, 상대적으로 고액자산가 맞춤형 서비스의 전문성이 떨어진다. 대형 은행의 규모 경제가 오히려 개인화된 경험을 희석시킬 수 있다.
또한 리테일 기반 프라이빗 뱅크도 결국 하나의 대형 은행 그룹 안에 있기 때문에, 다른 사업부문의 리스크가 프라이빗 뱅킹 고객에게 전이될 가능성이 있다. 만약 은행 그룹 내 다른 사업 부문(신흥국 기업금융)에서 대규모 손실이 발생한다면, 이는 그룹 전체의 재무 건전성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프라이빗 뱅킹 고객 자산이 직접 손실을 보는 것은 아니지만, 은행의 신뢰도와 안정성이 흔들릴 수 있다. 하지만 자산을 늘려가는 중산층 고액자산가(HNWI)에게는 접근성과 실용성 면에서 매우 편리한 구조이다.
현재의 프라이빗 뱅킹 시장은 이처럼 크게 세 가지 형태로 나뉜다.
*유니버설 은행(Universal Bank): 원스톱으로 모든 금융 서비스를 제공하지만 그룹 전체 리스크에 노출됨
*순수 프라이빗 뱅크(Pure-play Private Bank): 고객 자산 관리에 집중하지만 서비스 스펙트럼은 제한적
*리테일 기반 프라이빗 뱅크(Retail-linked Private Bank): 친숙한 리테일 기반에서 출발해 통합 관리가 가능하지만 초고액 맞춤에는 한계
아시아 프라이빗 뱅커(Asian Private Banker)에서 매년 아시아 지역의 프라이빗 뱅크의 통계 분석 자료를 제공하는데, 은행의 유형별 자산 규모 및 다양한 통계를 확인할 수 있다. 자료에 따르면, 2024년 말 기준 아시아 프라이빗 뱅크 중 UBS가 관리자산(AUM) 6천650억 달러로 1위를 차지했다. UBS는 2023년 크레딧 스위스 인수 이후 AUM이 47% 증가하며 세계 최대 프라이빗 뱅크로 올라섰다. UBS는 대표적인 유니버셜 뱅크로, 이외에도 미국계 제이피모건, 모건 스탠리 등의 은행도 큰 자산 규모를 보여준다.
반면 순수 프라이빗 뱅크들은 규모는 작지만 독립성과 고객 중심성을 강점으로 유지하고 있으며, 리테일 기반 은행들은 종합은행으로서, 기업 금융의 기관고객 및 다수의 개인고객을 바탕으로 안정적이고 꾸준한 성장세를 이어가고 있다.
결국, 프라이빗 뱅킹은 단순히 부자 전용 은행이라는 이미지로 설명하기에는 너무나 다채롭다. 고객의 자산 규모, 요구 수준, 그리고 은행의 구조와 전략에 따라 전혀 다른 형태로 나타난다. 그리고 이러한 차이는 고객이 어떤 경험을 하게 되는가, 그리고 얼마나 개인화된 서비스를 받게 되는가를 결정짓는다. 바로 이 점이 프라이빗 뱅킹을 매력적이면서도 복잡한 세계로 만드는 요소이며, 적합한 은행 타입이 고객의 성향이나 필요에 따라 다를 수 있다.
#싱가포르프라이빗뱅킹
#해외자산관리
#글로벌금융
#고액자산
#자산이민
#프라이빗뱅크
#글로벌뱅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