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가포르 프라이빗 뱅킹에 대하여
2012년 페이스북(현재의 메타플랫폼) 공동 창업자인 에두아르도 세브린(Eduardo Saverin)은 회사 IPO(기업공개)를 앞두고 미국 국적을 포기한 사실이 알려져 세상을 놀라게 하였다. 그는 마크 주커버그(Mark Zuckerberg)와 함께 2004년 페이스북을 공동으로 창업한 사람이다. 그 당시 에두아르도가 보유한 페이스북의 주식은 전체수량의 약 2%에 해당하는 5,300만여주였으며, 그 가치는 2012년 최소한 20억 달러(약 2조8천억원) 상당에 달한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에서 성공한 젊은 창업자가 페이스북의 주식 상장을 앞두고 미국 국적 포기라는 결정을 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단순히 고향인 브라질로 돌아간 것도 아니었고, 그의 선택은 예상 밖이었다. “싱가포르”
그는 2009년 이미 싱가포르로 이주해 싱가포르에서 영주권을 취득한 상태였고, 2012년 미국 국적을 포기하였다. 그는 “동남아시아 스타트업 투자에 집중하기 위해”, “기후와 라이프스타일이 좋아서”라는 이유를 표면적으로 밝혔지만, 그렇게 단순하게 미국 국적 포기를 결정하지 않았을 것이라는게 일반적인 해석이다.
그의 이같은 행보의 저변에는 IPO가 얼마 남지 않은 시점에서 양도소득세가 없는 싱가포르로 이주 결정을 내렸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그는 미국 시민권 포기 직전, 보유 주식 일부를 신탁으로 옮겼고, 싱가포르에 이미 기반을 둔 패밀리 오피스를 통해 자산 이전을 분산 처리했다.
당시 언론은 그의 국적 포기를 크게 다뤘다. 미국 정치권에서는 “애국심 없는 세금 회피자”, “국가에 등을 돌린 억만장자”라는 비난이 쏟아졌고, 미국 국세청(IRS)은 출국세(Exit Tax)를 그에게 부과했다. 미국 출국세는 미국 국적을 포기하는 미국 시민권자는 자산규모가 일정 기준 이상일 경우, 모든 보유 자산에 대해 가상의 양도소득세를 계산해 일괄 과세하는 제도이다.
만약 그가 미국에 계속 머물렀다면, 페이스북 상장 후 최소 5억 달러 이상의 세금을 부담해야 했을 것이다.-그가 사업 초기 투자한 소액의 투자금을 고려한다면, 주식 매각으로 발생한 자본이득에 대해 15% 의 양도소득세는 대략적으로 5억 달러(약 7천억 원)에 해당한다. 현재 그의 주식 보유 가치로 계산하면, 그 절세효과는 더욱 막대할 것으로 판단된다. 포브스가 선정한 2025년 9월 기준으로 싱가포르 50대 부자 중 1위에 꼽히는 그는 순자산 규모가 430억 달러로 (약 60조원 상당) 세계 50위권 부자에 해당한다.
에두아르도 세브린 외에도 많은 외국인들을 싱가포르 포브스 리스트에서 찾아볼 수 있다. 리시팅(Li Xiting)은 중국인 사업가로 신천(Shenzhen)에 본사를 둔 바이오 메디컬 의료기기 민드래이(Mindray) 의 공동창업자이자 회장이다. 포브스에 따르면 그는 싱가포르 3대 부자이며 순 자산 규모는 134억 달러(18조7천억원) 상당이다. 그 역시 가족 전체가 2018년 싱가포르로 이주해 싱가포르 시민권을 취득하고, 싱가포르에 거주하고 있다. 이 외에도 SHI 인터내셔널(SHI International Corp)공동 설립자인 레오 코관(Leo Koguan), 캐나다계 광산 회사인 아이반호(Ivanhoe Mines) 설립가인 로버트 프리드랜(Robert Friedland) 등 원화로 조단위대의 부자들이 싱가포르로 이주하고 영주권이나 시민권을 취득한 사례는 상당히 많다.
한국의 포브스 순위에는 외국인이 한명도 없다는 점에서 이런 현상은 눈여겨 볼 만하다. 현재도 많은 부자들이 싱가포르로 향하고 있다는 기사나 뉴스는 계속해서 쉽게 접할 수 있다. 비단 아시아 부호들만이 아니라 미국, 유럽의 자산가들도 왜, 무엇 때문에 싱가포르로 향하는 걸까?
<싱가포르 포브스 2025>
싱가포르 프라이빗 뱅킹은 일반적인 뱅킹이나 자산 관리와는 다른 성격을 지닌다. 한국의 PB센터에서 다루는 세무·부동산 중심 자산관리와 달리, 싱가포르의 프라이빗 뱅킹은 글로벌 자산 다변화, 세대 간 자산 이전, 패밀리 오피스와 신탁을 통한 장기적 자산 운용이 중심이다. 고객과 뱅커의 관계 또한 단순한 거래를 넘어 인생 전반에 걸친 신뢰 관계로 이어진다. 싱가포르에서 뱅커를 “관계 매니저(Relationship Manager)”라 부르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흥미롭게도, 싱가포르는 오랫동안 ‘아시아의 스위스’를 꿈꾸며 금융 산업을 국가 전략 산업으로 육성해 왔다. 스위스 프라이빗 뱅킹이 여전히 상징적 위상을 지니고 있지만, 최근 20년간 그 무게추는 아시아로 옮겨오고 있다. 홍콩이 그 역할을 오랜기간 주도해 왔으나, 민주화 시위와 코로나19 팬데믹을 거치며 싱가포르가 급부상했다. 지난 십여년간 중국의 고속 경제 성장을 통해 축적된 중국 자산의 싱가포르 이전, 글로벌 정치 리스크 회피 수요, 그리고 싱가포르의 안정적 제도가 맞물리면서, 이제 싱가포르는 아시아 프라이빗 뱅킹의 핵심 허브로 자리매김하고 있으며, 앞으로 싱가포르가 전세계의 프라이빗 뱅킹 산업에서 더욱 중요한 국가가 될 것으로 보인다.
이 책은 지난 10여 년간 싱가포르 뱅킹 현장에서 직접 경험한 사례와 고민을 토대로 쓰였다. ‘슈퍼리치들의 전용 서비스’처럼 보이지만, 그 이면에는 세대 간 자산 이전, 문화적 차이에 따른 고객 관리, 글로벌 자산 흐름 등 일반 독자에게도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숨어 있다. 또한 한국의 프라이빗 뱅킹과 비교해 보면 재미있는 차이점도 많다.
오랜 기간 고액 자산가들의 자산 증감을 지켜보며 발견한 사실이 있다. 부자들은 공통적으로 끊임없이 자산관리를 공부하고, 돈이 계좌에 그냥 앉아서 노는 것을 결코 두고 보지 않는다는 점이다. 마치 공장을 멈추지 않고 돌려 부를 생산하듯, 자산도 일을 하도록 만드는 데서 부의 차이가 시작된다. 그것은 화려한 투자 기법이 아니라, 현금에 대한 태도 하나만으로도 십 년, 이십 년이 지난 뒤 자산 규모에 엄청난 차이가 벌어진다는 점이다. 단순히 안전하게 저축하는 것과 꾸준히 투자하는 것 사이에는 시간이 지날수록 메워지지 않는 간극이 생긴다. 바로 복리(compounding)의 마법 때문이다.
또한 집중투자와 분산투자, 고수익·고위험 전략과 안정적인 자산 배분 사이에서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결과는 크게 달라진다. 이러한 원리들은 어쩌면 금융 교과서에서 늘 보던 뻔한 소리일지 모른다. 그러나 실제로 수많은 고객의 케이스를 가까이에서 보면서, 시간이 흐르며 그것이 어떻게 현실이 되는지를 직접 목격해 왔다. 그렇기에 반복해서 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
프라이빗 뱅커라는 직업은 단기간에 성과를 증명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작은 눈덩이가 눈밭을 구르며 점점 커지듯, 고객과의 관계 역시 시간이 흐르며 신뢰가 쌓이고, 인생의 여러 단계를 지나면서 고객 자산과 뱅커가 관리하는 자산(AUM)도 함께 불어나게 된다. 그것은 숫자의 성장만이 아니라, 함께 나눈 대화와 의사결정, 그리고 서로에 대한 믿음이 만들어 낸 결과다.
작은 섬나라 싱가포르가 어떻게 세계 각국 자산가들의 선택지가 되었는지, 그리고 그곳에서 실제로 어떤 자산 관리가 이루어지고 있는지, 이 책을 통해 독자들과 나누고자 한다. 물론 이 책은 단순히 부자들의 성공담이나 절세 전략을 소개하는 데에 머물지 않는다. 싱가포르 프라이빗 뱅킹을 따라가다 보면, 자본이 얼마나 자유롭게 국경을 넘나드는지, 그리고 그 흐름이 사회 전체의 불평등 구조와 어떻게 맞닿아 있는지를 목격하게 된다. 고액 자산가들은 세금을 줄이고 리스크를 분산하며, 더 효율적인 글로벌 자산 배치를 통해 부를 불린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본국의 세원은 약화되고, 중산층과 청년 세대는 상대적으로 더 큰 부담을 떠안는다. 즉, 싱가포르의 금융 시스템은 개인에게는 해답이지만, 사회 전체에는 또 다른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이 책을 통해 단순한 투자 성공담을 넘어, 이러한 구조적 불평등이 앞으로 어떤 결과를 낳을 것인지, 그리고 금융인이자 사회 구성원으로서 우리가 어떤 책임과 선택을 해야 하는지 함께 고민해 보고자 한다.
또한 인공지능(AI)과 디지털 전환이 가속화되는 지금, 프라이빗 뱅킹 산업 역시 거대한 전환점을 맞이하고 있다. 투자 자문이나 리스크 분석의 상당 부분이 알고리즘과 데이터 모델에 의해 대체된다면, 뱅커의 가치는 어디에서 증명될 수 있을까? 단순히 상품을 권유하는 ‘판매자’가 아니라, 고객의 인생 궤적과 함께 호흡하며 장기적인 자산 비전을 설계하는 파트너로서의 정체성이 더욱 요구될 것이다. 디지털 기술은 효율성을 높이고 투명성을 강화하지만, 동시에 인간만이 제공할 수 있는 공감과 신뢰의 가치는 더욱 귀해진다.
싱가포르 프라이빗 뱅킹은 단순한 금융 서비스가 아니다. 그것은 세계 자본의 흐름을 비추는 거울이자, 디지털 혁신과 함께 금융이 나아갈 미래를 실험하는 최전선이다. 화려한 숫자 뒤에 숨은 구조와 질문들, 그리고 기술이 가져올 새로운 질서를 함께 고민해 보는 계기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 책을 준비하였다.
Brian Solomon, Eduardo Saverin's Net Worth Publicly Revealed: More Than $2 Billion In Facebook Alone https://www.forbes.com/sites/briansolomon/2012/05/18/eduardo-saverins-net-worth-publicly-revealed-more-than-2-billion-in-facebook-alone/#26d547432ac4 (2012년 5월 18일)
Tim Warstoll, Saverin's Citizenship Renunciation Before Facebook IPO Will Increase, Not Reduce, His Tax Bill, https://www.forbes.com/sites/timworstall/2012/05/12/saverins-citizenship-renunciation-before-facebook-ipo-will-increase-not-reduce-his-tax-bill/ (2012년 5월 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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