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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왜 지금 싱가포르 프라이빗 뱅킹인가?

1-1. 60년 역사의 싱가포르

by Sing


2010년 12월, 처음 싱가포르에 오게 되었다. 그때는 싱가포르에 이렇게 오래 살게 될 줄 전혀 몰랐다. 공항을 나서자마자 눈에 들어온 첫인상은 화려함과 깨끗함이었다. 반짝이는 고층 빌딩과 질서정연하게 움직이는 사람들, 군더더기 없이 정돈된 거리는 낯설면서도 묘하게 매력적이었다. 그 순간 문득 궁금해졌다. “이 작은 섬나라가 어떻게 세계 금융의 중심지로 자리 잡게 되었을까?”


싱가포르는 스스로를 ‘Red Dot’, 즉 지도 위의 빨간 점이라 부른다. 서울보다 조금 큰 1.2배 정도의 면적에 불과한 작은 도시국가로, 인구는 약 592만 명이다. 그 가운데 40% 가까이가 외국인과 영주권자이며, 매년 약 2만명 가량이 새로 싱가포르 시민권 취득하고 있다. 다시 말해 ‘순수한 토박이’만을 따지자면 오히려 소수에 불과한 셈이다. 초창기 싱가포르 국민도 대부분 이주민의 후손이었으니, 싱가포르는 태생부터 ‘이민자의 나라’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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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은 출산율(2024년 기준 0.97)에도 불구하고 싱가포르가 여전히 활력을 유지하는 이유는 끊임없이 글로벌 인재와 자본을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나 역시 그 수많은 외국인 중 한 명으로 이곳에 발을 디뎠다. 처음에는 잠시 머물다 떠나겠지 했던 발걸음이 어느새 15년이 지나, 이 나라의 성장과 변화가 나의 삶과 뒤섞이며 하나의 이야기가 되어가고 있었다. 싱가포르를 단순히 낯선 이방인의 눈으로만 바라볼 수 없게 된 것은 아마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이 나라의 뿌리를 더듬다 보면, 결국 리콴유(Lee Kuan Yew)라는 인물에게 닿는다. 리콴유는 영국령 싱가포르 자치정부 총리 시절부터 독립 싱가포르의 초대 총리로 취임하며 30여년이 넘는 기간 내각을 이끌면서 오늘날의 발전된 싱가포르를 이끈 지도자이다. 1965년 말레이시아 연방에서 분리되어 독립한 직후, 그는 절망적인 상황을 그의 자서전, “내가 걸어온 일류국가의 길” (From Third World to First)에서 이렇게 회고했다.


“We had no natural resources. We had to depend on our people, on their talent, their discipline, their drive.”

(우리는 자원이 없었다. 국민의 재능과 규율, 그리고 의지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석유도, 광물도 없는 작은 섬나라가 생존하기 위해선 오직 ‘사람’과 ‘신뢰’가 자산이었다. 그래서 리콴유는 외국 기업과 자본이 안심하고 들어올 수 있는 제도적 환경을 만드는 데 집중했으며, 국민을 교육시켜 세계와 경쟁할 수 있는 인재로 키우는 것을 강조했다. 1970년대, 독립 직후 싱가포르의 문맹률은 40%를 넘었다. 리콴유는 이를 국가적 위기로 인식하고, 교육을 단순한 복지가 아니라 경제 생존 전략으로 규정했다. 영어로 업무가 가능한 인재 풀은 훗날 세계적 다국적 기업들이 아시아 본부를 싱가포르에 세울 수 있는 좋은 기반이 되었다.


또한 신뢰를 쌓기 위해 그가 가장 강조한 가치는 ‘청렴’이었다. 그는 단호하게 말했다.


“If I had to choose one word to explain Singapore’s success, it is integrity.”

(싱가포르의 성공을 설명하는 단어를 하나 고르라면, 그것은 청렴성이다.)


1959년 총선 승리 직후, 리콴유와 각료들이 흰색 셔츠와 바지를 입고 국회에 들어선 장면은 지금도 상징적이다. 깨끗하고 투명한 정치를 하겠다는 선언이었다. 실제로 그는 공무원 급여를 대폭 인상해 부패의 유혹을 차단했고, 의혹이 제기되면 끝까지 조사했다. 1990년대 고위 공무원 및 정당 관계자들의 고급 아파트 분양 의혹이 불거졌을 때조차, 법적으로 문제가 없었음에도 국민 신뢰를 위해 할인분 전액을 자선단체에 기부했다. 작은 나라의 생존은 ‘합법’보다 ‘신뢰’ 위에 세워져야 한다는 그의 철학이 드러난 사례였다. 이는 향후 싱가포르가 신뢰받는 금융 허브로 자리 잡는 데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그렇다면 왜 하필 금융이었을까? 싱가포르의 독립 직후 경제 구조를 살펴보면, 사실상 무역업과 항만업이 거의 전부였다. 말라카 해협을 통과하는 국제 무역선들이 잠시 들러 연료를 채우고 화물을 옮겨 싣는 중계무역이 국가 경제의 90%를 책임지고 있었다. 리콴유는 무역항으로서의 번영이 언젠가 한계에 부딪힐 것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실제로 그는 북극해 항로 개척 가능성까지 언급하며, 만약 알라스카의 빙하가 녹아 북극항로가 열리면 동서 무역의 중심축이 바뀌고 싱가포르 항만의 위상이 줄어들 수 있다고 우려했다. 따라서 무역만으로는 국가의 미래를 보장할 수 없다는 현실주의적 판단을 내린 것이다.

Screenshot 2025-09-17 114656.png 1960년대의 싱가포르

1968년, 영국이 아시아에서 철수하면서 싱가포르는 큰 전환점을 맞는다. 영국은 2차 세계대전 이후 싱가포르를 아시아 내 주요 상업 및 군사 기지로 활용하며 간접적으로 금융 네트워크를 지원했으나, 철수하면서 이러한 지원이 줄어들었다. 이에 따라 HSBC, Standard Chartered 등 영국계 은행의 상업 활동이 단기적으로 재조정되었다. 이는 위기였지만 동시에 기회였다. 싱가포르가 자립 경제를 구축하고, 아시아 금융 중심지로 도약하는 계기로 작용한 것이다. 리콴유는 자서전에서 이렇게 밝혔다.


“We could not rely on trade alone. We had to move up the value chain, to higher skills and higher value industries. Finance was one of them.”

(우리는 무역만으로는 의존할 수 없었다. 더 높은 기술과 부가가치를 가진 산업으로 올라서야 했다. 금융은 그 중 하나였다.)


“Singapore could not afford to remain just a trading port. We had to become a financial center.”

(싱가포르는 단순한 무역항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반드시 금융 중심지가 되어야 했다.)


싱가포르의 금융산업 발전은 단번에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독립 직후부터 싱가포르 정부는 국가의 전략적 금융 기반을 마련하였다. 초기에는 국제 금융이 드나들 수 있는 ‘통로’를 여는 데 집중했다. 그 대표적인 성과가 1968년 아시아 달러 마켓(ADM, Asian Dollar Market)의 출범이었다. 아시아 달러 시장은 싱가포르에 기반을 둔 은행들이 아시아 지역의 달러 예금을 받아들이고 대출하는 오프쇼어(Offshore) 금융시장으로, 이는 유럽의 유로달러 시장의 성공을 벤치마킹한 것이었다. 여기서 오프쇼어란 싱가포르 국내 통화(SGD)가 아닌 외국 통화(주로 USD)를 다루는 것을 말한다. 달러가 자유롭게 오갈 수 있는 이 제도를 통해 아시아 지역의 달러 유동성을 크게 높였고, 싱가포르가 단순한 무역항에서 국제 금융의 교차로로 변모하는 전환점이 되었다.


또한 1971년 설립된 싱가포르 통화청(MAS, Monetary Authority of Singapore)은 금융 규제를 일원화하고 글로벌 은행들이 안심하고 들어올 수 있는 제도적 기반을 마련했다. 자유로운 거래를 보장하면서도 불법자금은 철저히 단속하는 체제를 확립했다. 이로써 싱가포르는 ‘열린 시장이면서도 깨끗한 시장’이라는 확고한 이미지를 얻었다. 1970~80년대에는 외환과 파생상품 거래가 활성화되며 싱가포르는 글로벌 트레이딩 허브로 도약했고, 동시에 국제 투자자들에게 신뢰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 리콴유가 보여준 단호한 청렴의 리더십은 금융산업에도 그대로 투영되었다.


그리고 2000년대 이후, 싱가포르는 단순히 거래의 중심지를 넘어 자산관리와 프라이빗 뱅킹의 성지로 부상했다. 글로벌 자산운용사와 초고액자산가들이 잇따라 이곳을 거점으로 삼으면서, 싱가포르는 오늘날 ‘아시아의 스위스’라 불릴 만큼 독보적인 금융허브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무역이 싱가포르의 생존 토대였다면, 금융은 글로벌 경제의 중심으로 도약하기 위한 전략적 선택이었다. 자원이 없는 나라가 경쟁력을 가질 수 있는 영역이 바로 금융과 같은 무형의 산업이었던 것이다. 지난 60여 년간의 노력 끝에 싱가포르는 ‘아시아의 금융허브’, ‘아시아의 스위스’라는 수식어가 붙는 국가로 자리매김했다. 이는 단순한 비유가 아니라, 지금도 전 세계 자산가들이 자산을 안전하게 맡길 수 있는 곳으로 싱가포르를 선택하는 이유다. 그 화려하고 깨끗한 도시 풍경은, 알고 보면 수십 년간 전략적 선택과 철저한 원칙, 그리고 ‘작지만 강한 나라’로 살아남겠다는 집념이 만든 결과였다.

Screenshot 2025-09-17 115046.png StratisTimes

신장섭, 청렴 強國 만든 리콴유, 영원한 國父가 되다, 청렴 強國 만든 리콴유, 영원한 國父가 되다 | 경영전략 | DBR (2025년 4월)



Zoran Hodjera, The Asian Currency Market: Singapore as a Regional Financial Center, https://www.elibrary.imf.org/view/journals/024/1978/002/article-A001-en.xml?utm_source=chatgpt.com (1978년 1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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