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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싱가포르는 어떻게 금융허브가 되었는가?

오프쇼어 뱅킹

by Sing

뉴욕, 런던, 도쿄.

우리는 흔히 세계 금융의 중심지를 이렇게 떠올린다.
그러나 오늘날, 이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도시가 있다.


하루 외환 거래량에서 세계 3위를 기록하고,
글로벌 프라이빗 뱅킹의 아시아 본부들이 집결하며,
아시아에서 두 번째로 큰 파생상품 시장을 운영하는 도시.


그 이름은 다름 아닌 싱가포르다.


싱가포르는 불과 몇십 년 만에 세계 금융의 중심 무대에 올라섰다. 단순히 지리적으로 아시아 한가운데에 있거나, 높은 경제 성장을 이뤘기 때문만은 아니다. 싱가포르가 택한 진짜 비밀 무기는 바로 “돈이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환경”이었다.


세금을 낮추고 규제를 최소화해, 전 세계 자본이 몰려들 수 있도록 문을 활짝 연 것이다. 이 전략이 바로 우리가 곧 살펴볼 오프쇼어 뱅킹(Offshore Banking)의 핵심과 맞닿아 있다.



오프쇼어 뱅킹(offshore banking)


‘오프쇼어 Off + shore.'는 말 그대로 ‘해안에서 떨어져 있다’는 뜻이다. 바다 한가운데 닻을 내린 배처럼, 국경과 규제의 육지를 벗어나 있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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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가포르와 말레이시아는 다리로 연결되어 있다. 주말마다 차로 말레이시아 국경을 오가는 차량 행렬을 본 적이 있는가? 국경 검문소를 통과해 잠시만 달리면, 전혀 다른 국가에 도착한다. 세금 체계도, 물가도, 생활 환경도 달라지는데, 금융의 세계에서도 마찬가지다. 자산이 국경을 넘는 순간, 세율이 달라지고 규제가 달라지며 기회도 달라진다. 바로 이 지점에서 ‘오프쇼어 뱅킹(Offshore Banking)’이라는 개념이 태어났다.


자신이 속한 나라의 경계 밖에서, 더 안전하고 더 유리한 조건을 찾아 자산을 맡기는 일. 그것은 단순한 돈의 이동이 아니라, 불안정한 시대를 살아온 사람들의 두려움과 욕망이 투영된 선택이었다. 중세시대부터 유럽의 전쟁과 정치적 격변 속에서 부유층이 스위스를 찾았던 이유도 바로 그것이었다. 작은 내륙국가 스위스는 오히려 국경을 넘어선 금융을 발전시켰고, 그렇게 오프쇼어 뱅킹의 본산이 되었다. “내 나라에서는 불안하지만, 저 나라에서는 안전하다”는 믿음이 금융을 국경 밖으로 흘러가게 만든 것이다.


오프쇼어 뱅킹이란 예금자의 거주 국가가 아닌 다른 나라에 위치한 은행이 제공하는 금융 서비스를 말한다. 예컨대, 싱가포르 은행이 말레이시아에 거주하는 한국 국적의 고객에게 예금·대출·투자 상품을 제공하는 것이다. 고객이 싱가포르에 거주하지 않더라도 계좌 개설과 자산 관리를 받을 수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일반적으로 고액 자산가들이 세금, 규제, 투자 환경 등이 유리한 비거주 국가를 선택해 자산을 관리하는 방식을 의미한다.


반대 개념인 온쇼어 뱅킹(Onshore banking)은 한 국가 내의 은행 활동으로 일반적으로 국내 은행이 해당 국가 거주자 및 기업을 위해 제공하는 금융 서비스를 말한다. 한국에 등록되어 있는 은행이 한국에 거주하는 개인 거주자(자국민 및 외국인 포함) 또는 한국내에 등록된 기업(한국 기업 및 외국계 기업 포함)을 대상으로 저축 계좌, 예금 계좌, 대출, 모기지 및 투자 상품 등 다양한 금융 서비스를 제공 하는데, 이를 온쇼어 뱅킹이라 볼 수 있다.


전통적으로 대부분 서유럽의 부유층은 자국에서 자산을 보관하기보다는 정치적 안정성과 중립성을 이유로 스위스 오프쇼어로 자산을 관리하는 것을 선호했다. 2백여년 전부터 이어진 유럽의 전쟁과 정치적 격변 속에서 스위스 은행에 자산을 맡기는 것이 가장 안전했기 때문이다. 오래 전부터 해외 자산의 종착지(top destination)로 스위스가 꼽혔다. 스위스의 초기 뱅킹에 대해서는 3장에서 자세히 살펴보고, 이 장에서는 싱가포르에 대해 살펴보자.


1990년대 들어 아시아 경제가 고도성장기에 접어들며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 고액 자산가(HNWI)들이 급증했다. 아시아의 부가 빠르게 성장하면서 새로운 축이 형성되었고, 아시아의 자산은 지리적으로 가까운 홍콩이나 싱가포르로 향하기 시작했다.


이 시점부터 싱가포르는 “아시아의 스위스”를 표방하며 프라이빗 뱅킹과 오프쇼어 뱅킹을 국가 전략 산업으로 집중 육성하기 시작했다. 1998년, 아시아 금융위기의 충격이 채 가시기도 전에 싱가포르 통화청(MAS)은 본격적인 오프쇼어 뱅킹 허브 전략을 선언하였다. 이 정책을 통해 UBS, 크레디트 스위스(Credit Suisse) 등 스위스계 글로벌 은행들을 적극 유치하면서, 외국 자산가들을 위한 양도소득세 면제 및 다양한 세제 혜택을 마련했다.


홍콩과 싱가포르의 오프쇼어 뱅킹 산업은 빠르게 성장해왔다. 2014 BCG 글로벌 자산보고서(Global Wealth Report)에 따르면, 2013년 기준 전 세계 오프쇼어 자산은 약 8조9천억 달러였는데, 이 중 스위스가 25.8%에 해당하는 2조3천억 달러를 기록했다. 그러나 아시아의 두 금융허브인 홍콩과 싱가포르가 관리하는 규모도 1조4천억 달러(15.7%)에 달하며 존재감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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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10년 동안 아시아의 성장 속도는 더욱 가팔랐다. 2023년 전 세계 오프쇼어 자산은 13조2천억 달러 규모로 확대되었는데, 스위스가 2조6천억 달러(19.7%)로 여전히 1위를 차지했지만 비중은 오히려 줄었다(25.8%->19.7%). 반면, 홍콩은 2조4천억 달러(18.2%), 싱가포르는 1조7천억 달러(12.9%)로 급성장하며 글로벌 오프쇼어 금융 지형의 균형추를 아시아로 옮겨겨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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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가포르의 도약


2008년 가을, 전 세계 금융시장은 패닉에 휩싸였다. 리먼브라더스 파산, 미국 주택시장 붕괴, 유럽 주요 은행의 대규모 손실 소식이 연일 뉴스 헤드라인을 장식했다. 뉴욕과 런던 증시는 폭락했고, 세계 곳곳에서 은행들이 긴급 자본 확충을 위해 안간힘을 썼다. 국제통화기금(IMF)은 “글로벌 금융위기는 1930년대 대공황 이후 최악”이라고 평가했고, 월스트리트와 유럽 금융 중심지는 그야말로 불안의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이 시기, 많은 외국계 은행들이 유럽과 미국 본사를 중심으로 자본을 회복하고 비핵심 사업을 축소하거나 철수하며 아시아 시장에서 비중을 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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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혼란 속에서 싱가포르 통화청(MAS)은 이를 역으로 활용하는 전략을 펼치며 위기 상황을 기민하게 활용했다. 싱가포르는 오히려 적극적인 외국계 은행 유치 정책을 통해 싱가포르를 아시아 금융 허브로 더욱 공고히 다지는 계기가 되었다. 이는 향후 프라이빗 뱅킹 산업의 장기성장으로 이어졌다.

시티은행, HSBC 등은 아시아 내 소매은행 사업 일부를 정리하며 비용 절감을 도모했고, UBS, 크레딧 스위스 등의 프라이빗 뱅크들도 신용 경색과 자산가치 하락 등으로 수익성이 떨어져 규모를 축소하게 되었다. 당시 네덜란드의 ING 그룹도 비핵심 사업을 매각하며 자본을 확보하려는 전략을 펼쳤는데, ING의 아시아 프라이빗 뱅킹 사업부(ING Asia Private Bank)를 시장에 내놓았다.


이 기회를 놓치지 않은 싱가포르 기반의 OCBC 은행(Oversea-Chinese Banking Corporation)은 프라이빗 뱅킹 사업을 확대하고자 ING의 아시아 프라이빗 뱅크와 아시아 지역 자회사들을 약 14억6천만 달러(1조 8천억 원 상당)에 인수하여 Bank of Singapore라는 OCBC의 전용 프라이빗 뱅킹 브랜드로 재탄생시켰다. 이후 Bank of Singapore는 OCBC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지난 15년간 빠른 성장을 거듭하며 싱가포르를 대표하는 프라이빗 뱅크로 자리 잡게 된다. 이는 단순한 인수합병을 넘어, 정부와 민간이 공조하여 외국계 은행의 철수 공백을 싱가포르 은행 성장의 기회로 전환시킨 사례라 할 수 있다.


많은 글로벌 은행들이 축소 전략을 취하는 상황에서 싱가포르는 정반대로 외국계 은행들을 유치하며 금융 허브로서 입지를 넓혔다. 양도소득세 면제, 정치적 안정성, 규제 투명성, 첨단 인프라를 앞세워 자산가와 은행 모두에게 매력적인 환경을 제공했던 것이다. 특히 2008~2010년 사이 JP Morgan, 도이치은행(Deutsche Bank), 크레딧 스위스 등 주요 글로벌 프라이빗 뱅크들이 아시아 허브를 싱가포르에 세웠다.


단순히 은행만 끌어들인 것이 아니었다. 2010년에는 스위스 제네바의 예술품 보관소 모델을 참고해 르 프리포르(Le Freeport) 를 싱가포르에 설립하여 미술품·금괴·희귀 와인 같은 대체자산을 안전하게 보관 및 거래할 수 있는 생태계를 마련했다. 이는 자산의 안전한 안식처라는 이미지를 심어주며, 싱가포르가 ‘아시아의 스위스’로 불리게 된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실제 성과는 수치로도 확인된다. 금융위기로 2008년 싱가포르의 운용자산 규모는 26.3% 감소했지만, 불과 1년 만에 완전히 회복했으며 2010년에는 1조 354억 싱가포르 달러(약 1조 달러)에 달했다.


Screenshot 2025-08-20 114007.png MAS SINGAPORE ASSET MANAGEMENT INDUSTRY SURVEY 2010

특히 MAS는 단순한 비밀주의가 아니라 투명성과 안전성을 내세우는 새로운 프라이빗 뱅킹 모델을 제시했다. 2009년에는 자금세탁방지(AML) 기준을 강화해 국제사회 신뢰를 확보하는 동시에, 외국인 투자자에게는 세제 혜택을 확대해 합법적인 자금 유입을 촉진했다.


이는 전통적으로 ‘은행 비밀주의(Bankgeheimnis)’를 무기로 삼아온 스위스 모델과 뚜렷이 대비된다. 스위스는 1934년 연방은행법 제47조를 통해 고객 정보 비밀을 절대적으로 보장해 왔지만, 이로 인해 세금 회피, 자금 세탁, 독재자의 불법 자산 은닉이 가능하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었다. 2010년 미국의 FATCA 법 도입과 2016년 OECD의 자동 정보교환제도(AEOI) 시행은 사실상 스위스식 은행 비밀주의의 종언을 의미했다. 반면 싱가포르는 이러한 흐름을 선제적으로 반영하여 “합법적이고 투명하며 안전한 금융 허브”라는 차별화된 정체성을 확립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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