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자

by 만티스

"그럼 태훈 씨는 태훈 씨가 만나는 사람이 압도적이지 않기 때문에 두 사람 이상을 만나고 있고 어느 누구도 채워줄 수 없기 때문에 태훈 씨가 자꾸 새로운 경험을 추구하게 만든다는 건가요? 그건 그냥 회피형 애착을 합리화고 상태한테 그걸 책임전가 한 거 아닌가요?"


"뭐, 맞는 말일 수도 있죠. 근데 그러면 단순하게 아까 말한 진짜 잘생기고 조건도 괜찮은 사람이랑 정말 외적으로도 너무 별로고 조건도 좋지 않은 사람 둘만 남자고 다 여자인 상태에서 두 사람 다 한 사람한테 헌신한다고 했을 때, 과연 누가 압도적이다라고 할 수 있냐는 거예요. 당연히 선택지가 많은 사람한테는 그게 압도적이다라고 할 수 있지만 상대적으로 그 사람보다 조건이 좋지 않은 사람은 헌신한다는 게 선택지가 없으니까 헌신이라는 명목하에 만족하고 산다는 거예요. 제 말이 틀렸나요?"


"모든 게 상대적이고 비교우위 선택지의 문제라면 태훈 씨가 말하는 건 조건적인 사랑이네요. 이 상대가 나를 어떤 부분에서 만족시켜 줄 수 없어 다른 상대한테 그 만족감을 찾게 되고 그 상대한테서 다른 충족감을 또 다른 상대한테서 찾으면 결국 어디가 끝인 건가요?"


태훈이는 잠시 골똘히 생각하는 듯했다. 불현듯 그 사람이 떠올랐다. 그 사람에게 묻지 않았다. 어떤 부분이 결혼 생활에서 만족스럽지 못했는지. 나와 만남이 어떠한 충족감을 주고 있는지. 관계의 수명을 앞당기는 진부한 질문들이었기 때문에 묻고 싶어도 묻지 않았다. 그 사람 또한 내게 어떠한 것도 말해주지 않았다. 진심은 없다. 알고 있지만, 내가 이 관계를 붙잡고 있는 이유는 뭘까?


"상연 씨는 대단한 것 같아요. 한 번도 저한테 이런 걸 누가 물어봐준 적이 없는데. 상연 씨 말이 맞아요. 비교라는 게 끝도 없긴 하죠. 제가 생각했을 때 저도 제가 뭘 원하는지 모르겠어요. 결혼은 해야 할 것 같은데 상대한테 확신을 느끼기가 참 어려운 일인 것 같아요. 그래서 방황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어요."


그 날도 태훈이는 자기 감정이나 생각에 솔직했다. 상대에게 자기 감정이나 생각을 솔직하게 말한다는건 결국 그 상대에게 가장 원초적인 욕구에대한 나의 실체가 다른 이들과 다르지 않아 처음 상대에게 안겨주었던 기대감과 특별함이 점점 희미해지고 실망감으로 변모해버리는 일로 어렵기에 태훈이의 솔직한 태도가 신기했다.


태훈이와 나는 그날 이후 종종 와인 동호회에서 볼뿐, 그 일에 대한 별 다른 말도 그 뒤 별 다른 일도 없었다. 그럼에도 동호회에서 태훈이를 보는 일은 어느새 일상에 새로운 즐거움이 되었다. 태훈이와의 만남은 기약 없는 기다림으로부터 일종의 해방이자 그 사람의 빈자리를 잠시나마 대체함으로써 혼자인 시간에 내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가능성에 대한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동시에 그 사람만이 내 일상에 전부가 아니라는 위안을 스스로에게 맛보게 하여 가장 안전한 방식으로 시간이 흘러가게 만들었다. 하지만 이러한 즐거움은 아이러니하게도 또 다른 기다림으로 자리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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