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웬일로 전화 안 받았네. 다른 때는 바로 받던데. 무슨 일 있었어?" 그 사람이 말했다.
"어제는 어떻게 전화했어요?"
"쓰레기 버리는 척하고 나가면서 잠깐 전화했지. 보고 싶어서."
불현듯 화장실에서 그 사람이 바꾼 프로필 사진이 떠올랐다. 정말 보고 싶었다면 내 감정이 다치는 것과는 상관없이 내가 볼 수 있게 새삼 화목한 가정의 프로필로 바꿨을까? 무슨 생각으로 바꾼 건지 가정은 지키고 싶고 나랑 전화도 하고 싶고 뭘 하고 싶어 하는 건지, 왜 항상 나만 기다려야 하는지 따져 물을까 그 사람의 눈을 지그시 보았다. 이런 강박에 가까운 상념들은 불안하게 떨리고 있는 그 사람의 눈동자가 내 감정을 다치게 할 수밖에 없었던 어쩔 수 없는 이유가 있었을 것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든 나에게 연락을 하려 했던 건 이 사람에게 나에 대한 마음과 진심 어린 애정이 있으리라 생각하게 만들었고 진짜 인연이 늦게 만나 겪을 수밖에 없는 필연적인 고통을 겪고 있다는 위안을 주며 점차 희미하게 만들었다. 그렇게 다시 그 사람만을 이해하려 했다.
대답하려던 찰나 어제 태훈이와의 일이 떠올랐다.
"미안해요. 피곤했는지 잠들었어요."
"어제 동호회 간 거 아니었어?"
"아... 가려다 잠들었어요."
"진짜?"
"진짜예요. 이제 그냥 동호회 나가지 말까 봐요. 과장님이랑 같이 가서 마시는 것도 아닌데 재미도 없고 사람도 원래 안 좋아하고."
"그래 가지 마. 술 마시다 무슨 일 있으면 어떡하려고."
"과장님이 와주면 되겠네요."
그 사람은 멋쩍게 웃었다. 나 역시 쓴웃음을 지을 뿐 왜 대답을 못 하냐는 말은 차마 하지 못했다. 그 사람의 상황이 어쩔 수 없으니까.
"아, 오늘 끝나고 같이 밥 먹을까? 친정 다녀온대서 집이 좀 빌 거 같은데."
"정말요? 너무 좋아요! 끝나고 공원에서 기다리고 있을게요." 나는 기쁘게 대답했다.
이 정도만이라도 누릴 수 있으면 됐다. 태훈이와의 일은 말하지 않기로 했다. 그 사람과 나 사이에는 그 사람이 집으로 돌아간 후 사적인 일들에 대해 암묵적으로 묻거나 선뜻 꺼내는 일은 없었다. 무슨 말이든 나를 위로하기 위한 거짓말처럼 들릴 것이기 때문에 나 역시 알고 싶지도, 듣기도 싫었고 무의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사람이 나에게 사적인 것들에 대해 묵인을 바라는 것처럼 나 또한 그런 바람으로 서로 조용히 익숙해지는 쪽을 택했다.
퇴근 시간이 다가오자 나는 화장실로 가 화장을 고치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휴대폰에 진동이 울렸다. 태훈이었다. 내가 집에 겉옷을 두고 갔다며 가져다주냐는 메시지였다. 나는 일단 답하지 않기로 했다.
퇴근시간이 되자 나는 수고하셨습니다라는 말과 함께 퇴근을 찍고 자연스럽게 엘리베이터를 타 1층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주변을 살피며 회사 맞은편에 있는 공원으로 들어가 그 사람의 연락을 기다리고 있었다. 초겨울이라 회백색으로 어둑해진 하늘 아래 듬성듬성 심어진 나무들은 나뭇가지들을 앙상하게 드러내고 있었고 바닥에 누렇게 바래진 붉은 낙엽들은 쌀쌀한 바람을 타고 이리저리 굴러다니고 있었다. 얼마쯤 기다렸을까. 오늘 내가 그 사람과 시간을 보낼 수 없을 것이라는 경험에서 비롯된 불길한 예감은 예상보다 빨리 집에 도착해 버린 탓에 같이 시간을 보내지 못할 거 같아 미안하다는 메시지로 적중했다.
나는 그대로 일어나 전철을 타고 집에 돌아갔다. 여느 때처럼 문을 열고 들어선 오피스텔 현관엔 불이 다 꺼진 채로 빈 방에 잘 정돈되어 있는 것이라고는 침대 하나만이 우두커니 나를 맞이하고 있었다. 나는 그대로 들어가 책상 위 조명을 켜고 옷을 갈아입고 앉았다. 다시 일어서서 싱크대 밑 공간에 그 사람 모르게 숨겨두었던 와인 병을 꺼내 마시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사람이 바꾼 프로필 사진을 다시 보고 있었다. 나는 더 이상 이 만남이 어디서부터 시작이 되었는지 왜 시작이 되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분명한 건 나는 지금 빨리 취해 잠에 들고 싶다는 것이었고 그렇게 방 안은 빈 병으로 여기저기 채워지기 시작했고 어느덧 잠에 들었다.
다음날 출근 뒤 그 사람과 나는 비상계단에서 만나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어제는 미안해. 집에 빨리 오게 돼서."
"괜찮아요. 어차피 저도 피곤해서 와서 금방 잠들었어요. 과장님 애기 때문이라도 당연히 가봐야죠. 돌도 안 지났는데 엄청 신경 쓰이죠."
역시 이해해 주는 건 나밖에 없다며 머리를 한 손으로 쓸어내렸다. 그러나 미안하다 이해해 줘서 고맙다는 말뿐 다음 만남을 기약하며 만회할 여지는 주지 않았다. 그래도 괜찮다. 언젠가는 만회할 기회가 주어지겠지. 괜찮지 않은 걸 괜찮다고 말해야 나는 괜찮은 사람이 될 수 있다. 사실은 마음 졸이며 누구보다도 같이 보낼 수 있는 시간을 기다리지만 있는 그대로 드러낼 순 없다. 여유가 있어 보이는 만큼 이 관계에 있어 나는 덜 애처로워 보일 수 있을 테니까. 그럼 이 사랑을 더 오래 가져갈 수 있을 테니까.
퇴근 후, 빈 병이 여기저기 굴러다니던 틈 사이에서 혼자 술을 마시고있던 중 전화가 오기시작했다. 태훈이었다.
"상연 씨, 옷 두고 갔다고 메시지 보냈었는데. 답이 없어서요."
"아, 맞네요. 깜빡했네요."
"갖다 줄까요?"
"지금요?"
"지금도 가져다줄 수 있는데."
그 사람에게선 아직 연락은 오고 있지 않았다. 오늘도 올 것 같지 않았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기다리며 가방을 잠깐 받기로 했다. 태훈이와 내가 사는 곳은 놀랍게도 차로 20 분도채 안 되는 거리였다. 집 근처에 차 세워둘 곳이 마땅치 않아 내가 사는 오피스텔 주차장에 주차등록 후 주차를 하게 했다. 나는 도착시간에 맞춰 주차장에 내려가 있었다.
"집이 근처였네요." 태훈이가 가방을 건네주며 말했다.
"그러게요. 고마워요."
"동호회 계속 나올 거죠?"
"왜요?"
"저번 일 때문에 안 나올까 해서요."
"아, 글쎄요. 더 나갈지는 모르겠지만 그 일 때문은 아닐 거예요."
"다행이네요. 저는 상연 씨랑 좋았거든요. 같이 저희 집에서 또 술 마시면서 대화했던 것도 하룻밤 같이 보낸 것도."
"대화요?"
나는 혹시라도 그 사람을 만나고 있다는 걸 말해버렸을까 다급히 다시 물었다.
"기억이 잘 안 나는데 저희 무슨 대화를 했나요?"
"음, 그냥 이런저런 얘기했었는데. 상연 씨, 대단한 것 같아요. 저도 제가 원하는 게 뭔지 잘 모르겠고 왜 사는지도 모르겠고 사는 게 의미가 없으니까. 근데 상연 씨랑 대화하는 게 심리치료받는 것 같아 신기했어요."
"그러니까 무슨 얘기요?"
"좀 긴데. 집에 누구 있어요?"
불안했다. 내가 그날 무슨 얘기를 얼마나 했고, 했다면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만약 알고 있다면 말하지 않아 줄 수 있을지 부탁을 해야 할까 생각하며 집으로 올라가기로 했다.
"미리 말하는데 집 엄청 더러워요."
문을 열고 들어가자 생각보다 더 집 안은 엉망이었다. 현관에서부터 쓰레기봉투 50L 속 쓰레기 더미들이 가득 매운 쓰레기 냄새부터 방 안은 굴러다니는 와인 병과 맥주 캔, 싱크대에는 먹다 남은 배달음식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으며 음식 사이에 피워진 회색 녹색 곰팡이가 껴 있었다. 책상 위엔 태훈이가 도착하기 전 마시다 남은 와인 한 병과 그동안 다 피운 전자담배들이 볼링핀 대열처럼 늘어져있었다. 태훈이는 덤덤한 표정으로 자연스럽게 책상 앞에 놓인 의자에 앉으려 했으나 눈은 어지럽혀진 방 안을 둘러보기 바빴다.
"술 마시고 있었어요?'
"네."
"같이 마시고 내일 가도 돼요?" 장난기 있는 표정 뒤 수줍음을 감추며 태훈이는 말했다.
"안 돼요."
"아무 일 없을 거예요."
내가 대답하지 않자 태훈이는 대리를 불러서 타고 가겠다고 했다. 나는 싱크대 쪽으로 가 찬장에서 와인 잔을 하나 더 꺼내왔다.
"그래서 무슨 얘기를 했는데요?" 내가 물었다.
"상현 씨가 저한테 여자친구랑 파트너를 어떻게 동시에 만날 수 있냐고 그랬죠. 저는 여러 사람이랑 다양한 경험을 해보고 싶다 했죠 외적인 건 다 상대적인 거고 다 다르니까. 상현 씨가 저보고 언제까지 그렇게 살 수 있을 거 같냐며 진짜로 누굴 좋아해 본 적이 있냐고 물었죠..."
태훈이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나는 다행히도 그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안도감을 느끼며 대충 고개만 끄덕거리며 호응만 했다.
"... 그랬더니 저보고 소속감 속에서 느끼는 안정감이랑 늘 새로운 것 중 어느 게 더 중요하냐고 묻더라고요. 안정감이라고 했더니 그럼 제가 원하는 건 결혼해서 정착하는 삶이라고 하더라고요. 덕분에 제 모순된 점이나 추구하는 게 어떤 건지 생각해 보게 됐어요."
"왜 그렇게 정착을 못 하겠는 거예요? 정착을 하게 돼도 새로운 걸 추구하고 싶은 마음은 왜 생기는 거예요?"
"근데 그건 저 말고도 모든 남자들이 일반화하면 안 되겠지만 같을걸요? 진화론적으로도 설명되어 있어요. 결국엔 자기 DNA를 남기기 위한 거니까 수컷들은 번식을 최대한 많이 하려 하고..."
"태훈 씨 얘기를 하세요 다른 데서 갖다 쓰지 말고."
"아니 그럼 달리 설명할 방법이 있나요? 상연 씨도 한 번 생각을 해보세요. 저는 압도적인 힘에 대한 믿음이 있어요. 외모든 성격이든 다 상대적인 거예요. 내가 만나고 있는 사람이 사실 새로운 걸 추구하고 싶게 만들면 그 사람은 사실상 그렇게까지 나한테 압도적이지 안 다라는 거예요. 세상에 남자 둘밖에 없고 전부 여자인 세상에서 한 명은 너무 잘생기고 키도 큰데 다른 한 명은 극단적으로 못 생기고 키도 작다고 생각해 봐요. 여자들이 키 크고 잘 생긴 남자의 몇 백 번째 부인이 되더라도 압도적인 면때문에 전부 택하지 않겠어요?"
맞는 말이다. 내가 그 사람을 지속적으로 이해하려 하는 건 나의 역량 부족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