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괜찮아, 너는 괜찮아질 거야" 2

나에게 가장 먼저 해주고 싶은 말이 무엇인가요?

by 지안의 문장

아홉 살의 아홉수는 지나갔지만, 아이의 시간은 좀처럼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열 살, 열한 살이 되어도 아이는 여전히 세상의 소리로부터 비껴 나 있었다. 해야만 하는 최소한의 말들은 가끔 밖으로 나왔지만, 마음에 차오른 수많은 말들은 혀끝에서 돌이 되어 번번이 가라앉았다. 시간만 흐르면 모든 게 제자리를 찾을 거라는 어른들의 말은, 아이에게는 해당하지 않는 듯했다.


고요함을 담은 아이에게 누구도 먼저 다가와 손을 내밀지 않았다. “쟤는 말을 못 하나 봐.” 아무런 악의가 담기지 않은 사실만을 말했음에도 손끝에 깊게 박힌 가시처럼 계속 따끔거린다. 조별 활동 시간, 모두가 짝을 찾을 때 마지막까지 홀로 남는 아이. 선생님의 질문에 자리에서 일어나 그저 고개만 푹 숙이고 마는 아이. 자리에 앉아 한참을 망설이다 “선생님, 화장실 다녀와도 돼요......?”하고 힘겹게 말을 꺼내는 아이. 할머니 댁에 가서는 묻는 말에만 대답하다 이내 눈치를 보는 아이. 무엇이 이 아이를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만든 것일까.


그 아이가 유일하게 편안함을 느끼는 순간은 누구의 시선도 닿지 않는 골목길을 혼자 걷는 것, 나란히 누운 어린 남동생과 별것 아닌 이야기를 속삭이는 밤뿐이었다. ‘어른이 되면 나는 정말 괜찮아질까?’ 아홉 살부터 시작된 질문은 2년 내내 아이를 따라다녔다. 매일이 어서 지나가기만을 바라던 시간, 고요함이 너무 짙어 모든 것이 가라앉고 있던 침잠의 시간이었다.


결국 열한 살 되던 해, 아이는 참을 수 없는 마음에 움직였다. 가방에 소중한 것 몇 개를 챙겨 넣고 무작정 집을 나섰다. 일을 하느라 바빠서 멀리 산다는 엄마의 집이 어디인지 어렴풋이 기억이 나서 그저 걷고, 또 걸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문득 홀로 남겨졌을 남동생이 떠올랐다. 나처럼 아파하고 있을 동생의 얼굴이 보이자,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겠는 막막한 두려움이 발걸음을 멈추게 했다. 열한 살 아이를 다시 집으로 이끈 것은 희망이 아닌, 어떤 변화도 이룰 수 없다는 무력감이었다.


무력감에 눌려 제대로 할 줄 아는 게 없어지던 한 해를 지나고, 열두 살의 어느 날이었다. 여느 때와 같이 아이는 청소 당번으로 마지막까지 교실에 남아 있었다. 친구들이 재잘거리며 놀러 나가는 소리가 창밖으로 멀어지고, 텅 빈 교실에는 희미한 먼지와 노을빛만 반짝이며 부유했다. 가방을 메고 나서려던 아이의 시선이 교실 한편에 기다랗게 누워있는 책꽂이에 머물렀다. 순간 세상에 슬로모션이 걸린 듯했다. 아이는 홀린 듯 천천히 책꽂이로 다가갔다. 수많은 책들 사이에서 유독 한 권의 책이 아이를 부르는 것 같았다. 망설임 없이 손을 뻗어 꺼내 든 책, 그 표지에는 ‘어린 왕자’라는 네 글자가 적혀 있었다.


어른이 된 지금이야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베스트셀러라며 웃어넘길 수 있지만, 그날 오후 텅 빈 교실에서 만난 그 책은, 웅크린 아이의 닫힌 세계에 처음으로 생긴 작은 문이었다. 그 문 너머에는 아이가 한 번도 상상해 보지 못한 다른 우주가 기다리고 있었다. 고요한 아이는 요란하지 않게 살며시 첫 페이지를 넘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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